[김종배의 도백열전(29)] 제9대 양제박 도지사②
그 무렵 제주사회는 12년전에 발생한 「4.3」사건에 대한 국회진상규명이 새로운 이슈로 대두되고 있었다.
1960년 5월23일 제주출신 高湛龍 金斗珍 玄梧鳳 국회의원은 국회가 거창(巨昌) 양민학살사건에 대한 조사단을 구성, 파견하기로 결의한 것과 때를 맞춰 "4.3 사건과 6.25 동란 때에 제주도내 각처에서 억울하게 학살당한 수많은 원혼을 풀어주기 위해서도 4.3 사건의 진상이 규명돼야 한다"고 제의함으로써 「4.3」이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지도 못한 채 숨을 죽이며 살던 도민들에게 해원(解寃)의 희망을 주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제주사회는 국회의 4.3 사건 진상규명 분위기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일부 주민들 가운데는 그 당시의 일을 가지고 또다시 도민간의 갈등을 초래시키거나 보복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신중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또 다른 피의 숙청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지 불안해 했다.
고담용·김두진·현오봉 국회의원, 4.3사건 발생 12년만에 진상규명 제의
4.3 사건 규명을 주장한 제주출신 세 국회의원은 도민들의 이러한 논란에 대해 "우리나라는 반공을 국시로 하고 있기 때문에 4.3 사건의 진상은 반드시 규명돼야 하고, 적당한 시기에 규명한계를 정해 국회가 공동조사에 나설 계획이다"고 밝혀 4.3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이 구체화되고 있음을 시사, 관심을 모았다.
이들 국회의원은 이어 4.3 사건의 조사대상 시점은 유재흥(劉載興) 사령관의 부임이후가 될 것이며 조사인물은 제2연대장 함병선(咸炳善) 중령, 해병대 사령관 신현준(申鉉俊) 중장, 서북청년단장 김재능(金在能) 등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高 의원은 "경찰은 죽은 자가 2만7000명이라고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자료에는 6만5000~6만8000명에 이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진상규명을 위해 도민들도 국회에 필요한 자료들을 적극 제공해주길 바란다"고 주문했다.
4.3당시 감찰청장이 조사단위원장 임명…진상규명 의지 '의문'
5월30일 국회는 제주출신 세 국회의원이 제안을 받아들여 「국회양민학살진상규명조사단」을 파견할 대상지역에 제주도를 포함시키기로 의결하는 한편 5월31일부터 6월6일까지 7일간 거창과 제주지역에 대한 사실규명에 나서기로 했다.
그러나 조사단 위원장에는 4.3 사건당시 제주도감찰청장(지금의 제주지방경찰청장)을 지낸 바 있는 최천(崔天)의원이 임명됨으로써 도민들 사이에서는 국회의 진상규명 의지를 의문시했다. 또한 제주지역에 대한 조사는 경상남도지역반에서 맡되 조사기간은 6월6일 하루로 잡혀있을 뿐이었다.
최 위원장은 조사단의 위원장으로 임명되는 즉시"국회의 양민학살진상규명 조사작업은 제한된 짧은 시간관계로 전국의 학살진상을 철저히 조사하기에는 힘들겠지만 최선을 다하겠다. 따라서 이 문제는 제4대 국회에서 종결을 내리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이나 학살자처단과 양민피해가족에 대한 보상금 지급 등 對정부건의에 특위활동의 의의를 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혀 처음부터 진상규명의 의지가 없어 보였다.
제주신보, 4.3 진상규명 위한 피해 자료 수집…온 섬이 들 썩
최 위원장은 특히 4.3 사건 진상조사부분에 대해서 "4.3 사건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일어난 것이어서 규명작업이 거창이나 타 지역에 비해 훨씬 어려울 것은 물론이며 조사에도 신중을 기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언급하는 등 4.3 사건에 대한 그의 접근이 매우 신중을 기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와 때를 맞춰 제주신보는 국회진상조사단의 내도에 앞서 『국회조사단의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해 자료를 수집한다』는 사고(社告)를 낸데 이어 제주시의회에서도 의원들의 출신구별로 학살진상조사반 7개반을 편성하여 조사에 나섬으로써 제주사회는 갑자기 4.3 진상조사에 섬 전체가 들끓기 시작했으며, 가는 곳마다 화제가 됐다.
6월4일에는 제주도의회에서도 임시회의를 소집하고 자료수집에 들어갔다.
제주신보에 마련된 접수창구에는 각종 피해사건들이 속속 고발됨으로써 접수기간이 6월5일에서 6월10일로 연장됐다.
최천 위원장, 제주도민 죄인취급…"4.3사건 공소시효가 끝났다"
제주도민들의 지대한 관심 속에 국회 4.3 사건진상조사단은예정대로 6월6일로 공군 특별기로 내도했다. 최 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민주당의 조일재(趙一載) 자유당의 박상길(朴相吉) 의원 등은 제주출신 高湛龍 의원의 안내를 받으며 도착한 후 도의회에서 4.3 사건 유족과 당시 치안책임자를 불러 증언을 들었다.
이 자리에는 梁濟博 지사, 강영술(姜榮述) 도의회의장, 김차봉(金次鳳) 제주시장 등 도내 기관·단체장과 주민 등 다수가 참석하여 국회 4.3 사건 진상조사에 대한 도민들의 관심을 증명했다.
그러나 국회진상조사단은 증언차 나온 주민들을 마치 죄인 취급하듯이 다뤄 도민들을 자극했다. 더구나 최 위원장은 4.3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으려는 모습이 조사과정에서 역력히 보이는가 하면 4.3 진상규명에 잔뜩 기대를 걸고 모인 주민들에게 "4.3 사건은 이미 10여년이나 지나 공소시효가 지난 일이다"고 공공연히 말하면서 진상규명보다 정부의 보상차원에서만 문제를 풀려는 인상이 짙어 주민들의 분노를 샀다.
국회의 형식적인 조사에 화가 난 주민들은 "그렇다면 국회가 무엇 때문에 왔느냐""국회는 그런 헛 일만 하는 곳이냐""사람 죽인 놈들에게 10년이 지났다는 게 무슨 큰 문제가 되느냐"면서 따져 들었다.
도민들 증언 잇따라…4.3 학살의 불법성과 잔인성 폭로
증언에 나선 유족대표는 애월면 하귀리의 장갑순(張甲順)을 비롯해서 「4.3 사건 진상규명동지회」의 고순화, 제주신보의 신두방 전무, 대정읍 하귀리의 김평중 등으로 이들은 한결같이 학살 당시의 불법성과 잔인성을 폭로하며"희생자들은 모두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호소했다.
처음 증언대에 나선 장갑순은 "서북청년단의 극악한 민폐행위는 양민학살의 시초였다. 애월면 구엄리 자운당에서 나의 아버지를 포함해서 양민 72명이 이유도 모른 채 집단학살을 당했고 당시 총살집행자는 함병선 중령이 연대장으로 있는 제2연대의 소속 중대였다"고 폭로했다.
장갑순의 증언을 듣고난 뒤 국회조사단이 학살의 동기와 그 후의 처리에 대해서 묻자 張은 "나의 아버지는 일체의 정치단체에 가입한 일도 없는 순박한 농부인데도 학살자들은 죽인 후에 구덩이에 매장했다"고 증언했다.
이어 고순화는 국회 진상조사단의 내도에 앞서 도일주를 하면서 50여개의 부락을 대상으로 피해를 조사했다고 밝히고 "일주도로변 부락주민들의 피해는 생각보다 훨씬 많았고 도두리에서는 양민 6명이 서북청년단의 모략으로 학살된 것을 비롯해서 외도리에서는 전 부락을 몰락하다시피 하여 500여 가구의 학살시체를 불태우는 냄새 때문에 며칠동안 밖에 나다니지 못했고 고산리에서는 600여명, 서귀포에서는 700여명의 양민이 집단 학살됐음이 드러났다"고 폭로했다.
"고성리·성산리·행원리·동복리 주민 학살…처녀들은 강간 후 총살" 증언
고순화는 또 "토산리에서는 동네 남녀를 모두 공회당에 모아놓고 그중 76명을 모래밭으로 끌어내어 총살시켰으며, 고성리와 성산리에서는 500~600명의 양민이 경찰과 군에 의해서 불법총살됐고, 행원리에서는 200여명, 동복리에서는 86명이 무참히 학살됐으며 학살된 처녀들은 강간당한 후 총살됐다"고 증언했다.
제주신보 신두방 전무는 "4.3 사건 후 6.25 때에 일어난 양민학살사건은 법치국가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많은 사람이 재산 무장대에게 어쩔 수 없이 약간 협조한 것이 죄가 되어 총살당했다"고 말했다.
이들의 증언청취를 끝낸 최 위원장은 "이번 국회의 조사기간이 극히 짧기 때문에 나중에 피해 당사자와 피해 재산 등을 상세하게 공문으로 작성한 후 6월10일까지 국회양민학살조사단 앞으로 보내주면 이번 4대 국회에서 전적으로 논의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5대 국회가 국가보상문제 등에 관한 특별법안을 만들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해 이번 조사는 진상규명보다 보상처리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함으로써 도민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최 위원장 "4대 국회가 못하면 5대 국회에서 특별법 만들겠다" 도민 실망
또한 박상길 의원은 "제주양민학살의 두목급이라고 지목되고 있는 인물은 함병선이 연대장으로 있던 제2연대의 중대와 소대를 비롯해서 당시 제주경찰서장 유근억(劉根億) 그리고 서북청년단의 김재능이다"라며 "이들은 현재 모두 생존하고 있으므로 처벌한계만 그어진다면 이들을 처단해서 억울하게 죽어간 도민들의 한을 풀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면서 국회진상조사단에 대해 실망의 표정이 역력한 도민들을 달래보이기도 했다.
이날 증언에는 제주신보 중역실에 접수된 양민학살신고내용도 일부 공개돼 관심을 모았는데 내용들이 아주 구체적이었다.그 가운데 우도(牛島)의 車모(54세)는 1948년 12월5일(음력) 국경일에 찢어진 태극기를 달았다는 이유로 경찰지서에 잡혀간 뒤 고문 끝에 죽었으며, 애월면 서기 이징호는 1948년 과료 8000환의 판결을 받은 사실로 6.25 때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1950년 7월초 애월지서에 수감된 후 소식이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