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간·소리 공동기획-포토파일] ① 사진속 입춘굿, 일본인 도리이 류조 6월6일 촬영
영문 모른 채 동원된 군중, 내려앉을 듯한 관덕정 처마 ‘식민지 슬픔’ 엿 봬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올해 2019년이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공동기획 <하간+소리: 포토파일>을 마련했다. 과거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년)을 계기로 다른 모든 아시아 나라보다 앞장서서 서구의 제도와 학문을 도입하며, 세계를 향한 정복의 야욕을 품게 된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일본의 시선은 자신과 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들에게 향한다. 그 세력들 중 일부 일본인 학자들은 다양한 민족들이 사는 나라 및 지역으로 가서 그들이 원하는 학문이론(지리학, 인류학, 고고학, 민족학, 민속학, 언어학 등) 정립과 유포에 공을 들이기도 했다. 당시 이들 분야에 뛰어든 일본인 학자들은 군사력까지 동원하며 현지 조사를 단행했고, 필요에 따라서는 탈맥락적·탈역사적인 연출·분장을 요구하며 해당 민족의 지리, 관습, 민속, 제도, 일상생활 등을 조사·촬영했다. 이처럼 20세기 전후 일본의 아시아 침략·수탈 정책은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 민족 현지 학술조사를 토대로 그 수법이 날로 고도화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조사 대상지에는 제주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제주기록문화연구소-하간(대표 고영자) + 제주의소리 공동기획 <하간+소리: 포토파일>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조사·촬영된 당시 제주도 사진들 중 시사성이 짙고, 기록적 가치가 있는 것들을 추려 당대 제주도를 다각적으로 접근, 재조명할 목적으로 마련됐다. [필자·편집자 공동 주] 

일제강점기 사진은 새롭게 부상한 기록문화·기록매체가 되었다. 조사단, 연구단 명목으로 사진기를 지참한 일본인들은 조선 팔도강산을 누비며 필요한 모든 것을 촬영하며, '조선의 이미지' 생산에 주력한다. 사진(기)의 식민지 상륙은 그 자체로 새로운 문명의 도래이기도 했지만, 토착민들에겐 총과 칼에 버금가는 위협적 무기로도 다가왔다. 당시 제주도를 담은 사진들 속에서도 그 흔적이 역력하다.

(1) 1910년대 제주성내 관덕정

제공=제주기록문화연구소-하간. ⓒ제주의소리
[사진 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소장품 번호: 건판 002693). 제공=제주기록문화연구소-하간. ⓒ제주의소리
2012년 입춘굿 모습. 1910년대 흑백 사진 속 무너질 듯 낡은 관덕정 처마는 어느덧 반듯하게 정돈됐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2012년 입춘굿 모습. 1910년대 흑백 사진 속 무너질 듯 낡은 관덕정 처마는 어느덧 반듯하게 정돈됐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의소리
2019년 6월 27일 관덕정 마당 모습. 100년전 일제강점기의 허물어질 듯 초라했던 관덕정은 이제 제주 원도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제주의소리

[사진1]은 1910년대 제주성내 관덕정 모습을 담은 것으로 사진집 《제주100년》(제주도 발행, 1996년)에도 수록되어 제주사회에 비교적 널리 알려진 장면이다. 이 사진집에는 관련 사진이 잇달아 5점 더 수록되어 있다. 다만 이들 사진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촬영자, 촬영배경, 촬영시기 명시)가 없고, 대신에 장면에 대한 자의적 해석과 제목이 보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사진1] 제목은 ‘관덕정 처마 밑의 춤사위’, 아래 소개하는 [사진2]는 ‘관덕정 마당에서의 한 판 입춘굿 놀이!’ 그런가하면 《삼도2동》 향토지(2003년)에는 위 [사진1]을 재수록하면서 그 제목으로 ‘기와집이 무너지건 말건…관덕정 처마 밑의 춤사위’라 붙이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주도하에 생산된 대부분의 사진들은 누군가의 의도된 시선을 담은 기록매체라는 점을 주목한다면, 촬영장소, 촬영연대, 촬영주체 나아가 피사체 속 배경과 인물 등에 관한 정보 유무에 따라 180도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릴 수도 있다.

(2) 1914년 6월 6일 관덕정 마당, 연출된 봄맞이

제공=제주기록문화연구소-하간. ⓒ제주의소리
[사진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소장품 번호: 건판 002687). 제공=제주기록문화연구소-하간. ⓒ제주의소리
2016년 입춘굿 모습.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사진가 요청에 의해 연출된 100년전 입춘굿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읽혀진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2016년 입춘굿 모습.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사진가 요청에 의해 연출된 100년전 입춘굿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읽혀진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의소리
2019년 6월27일 관덕정 마당 모습. 장마가 잠시 소강 상태를 보이며 맑은 하늘이 푸르디 푸르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슬픔'이 짙게 엿보이던 풍경은 온데간데 없이 평온하다.  ⓒ제주의소리

[사진2]는 [사진1]과 같은 날 동일 장소-다른 각도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사진1]과 [사진2]를 포함한 관련사진(유리건판) 1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해당 사진 각각에 기본적인 서지정보가 있다. 가령, 조사자·촬영자는 일본인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1870~1953), 촬영지역은 제주도, 촬영년도는 1915년(그런데 촬영연도를 1914년으로 정정할 필요가 있다―필자 주) 등. 그 이상의 정보 구축과 상세 내용 연구는 연구자 개개인의 몫으로 남아 있다. 

《제주100년》에 소개된 [사진1]과 [사진2]의 제목과 해석을 보면, 과거 관덕정 마당에서 입춘날 입춘굿을 성대하게 열고 있는 장면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사진의 반전은 왼쪽 상단 끝(빨간색□―필자가 표시)에 세로로 '大正三, 六, 六, 濟州'라고 표기된 부분이다. 말하자면 이 사진은 대정 3년(1914년) 6월 6일 제주에서 촬영했다는 표시다. 6월이면 입춘이 훌쩍 지나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시기이지 않는가?

도리이 류조의 필드 노트를 보면 그는 제주도에 1914년 5월 17일 도착한다. 그리고 이 사진은 그가 제주에 도착해서 20일째 되는 날 관덕정 광장에 관·민과 남녀노소들을 모이게 한 가운데 열린 제주도 입춘풍속 재연(再演) 장면이다. 이에 대해 도리이 류조는 다음과 회상한다.

“제주도의 경우, 남해안 다른 지방과 다른 독특한 풍습이 있다. 예를 들어, (중략) 남녀가 가면을 쓰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제의를 행하는 풍습 또한 매우 흥미롭다. 이 제의는 나를 위해 개최하여 보여주기도 했다.”

- 鳥居龍藏, 《ある老学徒の手記》(1953년)

당시 도리이 류조의 동아시아권 현지조사는 해당 식민지 지(知)를 확립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1895년 요동반도 현지 조사를 시작으로, 1896년에는 대만 선주민 조사, 이후 쿠릴열도, 중국 서남부, 몽고, 한반도, 시베리아, 나아가 중남미까지 폭넓게 현지조사를 벌이게 된다.

그의 한반도 현지조사는 1911년~1915년까지 6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한일병합 후, 조선총독부는 교과서 편수를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차, 도리이 류조를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선발, 그에게 체질인류학·민속학·고고학 등 여러 방면에 걸친 한반도 조사를 의뢰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제주도 현지조사는 한반도 제4차 조사에 해당하는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는 대만 선주민 조사 때(1896년)부터 사진기를 지참했다고 전해진다. 도리이 류조는 해외 현지조사에 처음으로 사진촬영 수법을 도입한 연구자라고 전해진다.
 
1914년 도리이 류조가 내도했던 해에는 제주 목관아 내 망경루를 비롯하여 동성문, 서성문, 중인문이 헐리고 관덕정 앞으로 동서대로(신작로)가 한창 개설되던 때였다. 외세와 근대문명의 바람이 이미 섬에 상륙하여 섬 사방을 한창 휩쓸고 있었다. 

1914년 6월 6일 시점에서 기왓장이 날아가고 처마가 금방 내려앉을듯한 관덕정만 해도 그렇다([사진1]).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이 땅의 랜드마크는 세월의 무게를 버티고 버틴 흔적과 더불어 최후의 위엄을 잃지 않으려는 결연한 의지가 읽혀질 정도다. 그로부터 꼭 10년 후, 1924년 일제는 이곳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15자(尺) 정도 나왔던 처마를 2자 이상 잘라 버린다. 세월의 무게를 감량시키고 기억도 비워버리고, 과거의 위용도 도려내고, 장소의 용도도 폐기하고…….

[사진2]에 담긴 외대문(일명 종루, 진해루, 탐라포정사)은 어떠한가? 이는 조선시대 제주목사의 관아 건물로 통하는 영문(營門)의 큰 문에 해당한다. 1435년 건립된 이래 몇 차례 중수되어 왔다는 곳. 이 관아의 상징물도 1914년에 이르렀을 땐 이미 개화의 물결에 내몰리고, 영문도 모르고 동원된 군중들에 의해 점령당하고 카메라 시선에도 고스란히 노출되고 만다. 이 기념비적 사진을 최후로 이곳 또한 《탐라기년》(김석익)에 따르면, 1916년 10월에 헐리고 만다.

해방 후, 이 사진들은 1971년 故 심우성 선생님의 관심을 끌어 《서낭당》(한국민속극연구소 회지) 제1집에 <제주도탈놀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고, 1999년에는 문무병 박사에 의한 <탐라국입춘굿놀이>의 복원작업에서 중요한 단서로 주목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4년 6월 6일 도리이류조 조사단이 재현시킨 제주도 입춘제의 풍습은 당시 어느 시점의 것을 토대로 한 것인지, 나아가 이 입춘풍습은 적어도 1914년 시점까지는 전승되고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 제주기록문화연구소-하간 고영자(미학자·번역가)

“신구간, 풍속...제주 전통문화 지키는 입춘굿으로”
[인터뷰] 서순실 제주큰굿보존회 이사장

1999년 민속학자 문무병 박사를 중심으로 제주민예총이 복원을 시도하면서 올해까지 21년째를 맞는 탐라국 입춘굿. 전통문화와 각종 즐길 거리가 더해지면서 이제는 어엿한 제주를 대표하는 도시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12년부터 탐라국 입춘굿을 집전하는 서순실(59) 제주큰굿보존회 이사장은 “입춘굿을 통해 사라져가는 제주의 전통문화가 계속 보존되길 바란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다음은 서 이사장과의 1문 1답.

2015년 탐라국입춘굿을 진행하는 서순실 심방.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2015년 탐라국입춘굿을 진행하는 서순실 심방.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Q. 탐라국 입춘굿과의 인연은?
복원된 이후 구경하러 몇 번 방문했고 2012년부터 심방으로 참여했다. 심방 선생님들로부터 ‘예전 입춘굿에는 제주도 심방이 전부 참석했었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특히 신굿을 크게 한 심방만 입춘굿에 오를 자격이 주어졌다는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Q. 입춘굿을 맡은 2012년과 지금을 비교한다면?
그때만 해도 옛 것을 복원하려는 분위기였다면 3~4년 전부터는 입춘굿 행사가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한다. 사리살성을 비롯해서 탈굿 같은 내용은 예전 원형 입춘굿에 가깝게 가려는 노력들이다. 개인적으로도 입춘굿을 통해 자청비 같은 제주의 전통 설화를 알게 됐다는 반가운 의견들이 많다. 

Q. 기억나는 입춘굿 사연은?
언젠가 비 날씨를 걱정한 날이었는데 굿판에 세워진 큰 대가 휘어 부랴부랴 수습한 적이 있다. 지난해 20주년 때는 역대 최고로 눈이 많이 내렸는데 무사히 입춘굿을 치러 기억에 남는다. 개인적으로 자청비 여신과 입춘(立春)에 대한 의미를 부각하고자 씨나 묘종을 굿에 올리고 싶었는데 다행히 주최 측에서도 잘 이해줘 반영했다. 몇 년 전부터 칠성본풀이를 복원한 것도 의미가 깊다.

Q. 입춘굿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지길 바라나?
입춘굿은 신구간과 빼놓을 수 없다. 이제는 예전만큼 신구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신구간 자체도 사라지는 추세라 정말 아쉽다. 입춘굿을 통해 신구간 문화가 계속 이어졌으면 한다. 입춘굿을 일부러 휴일이나 주말에 맞추다보면 입춘 본연의 의미가 사라진다. 입춘굿은 새해를 맞아 몸과 마음을 단정한다는 의미다. 나아가 젊은이들이 문도령과 자청비를 모형이나 그림으로만 보는 게 아닌 입춘굿 현장에서 생생하게 알면 좋겠다.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이 무엇이겠나. 땅과 전통문화 아니겠나. / 인터뷰 = 한형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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