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행불인유족회 영‧호남 순례] 목포-광주-전주 형무소 터에 잠긴 4.3 혼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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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옛 목포형무소 터인 아파트 단지 내에서 제주4.3유족회 상임부회장 김춘보 씨가 목포형무소가 있던 자리를 설명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 주택...차가운 아스팔트 도로... 그 아래 누운 유해들의 울음이 소리없이 메아리치는 듯하다. 결코 잊히지 않은 혼령들이 아직 4.3유적지 터에 남아 유족들을 맞이했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불인유족협의회의 2박 3일 영호남 4.3유적지 순례 이튿날인 27일. 서울까지 올라가는 빠듯한 일정으로 순례지에서 뺐던 옛 목포 형무소 터 방문을, 유족회의 의지에 따라 다시 추가했다.

1949년 9월 14일 목포형무소 탈옥사건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당시 수감됐던 재소자 약 400명이 무기고를 습격한 뒤 집단 탈주한 사건이다. 

당시 죄목도 모른 채 목포형무소에 끌려간 제주도민이 600여명. 4.3도민연대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탈옥 사건 과정에서 희생됐다고 전한다.

왜 수감이 됐는지, 어떻게, 언제 외로운 넋으로 묻히게 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공식적 자료를 통한 정부‧제주도의 진상규명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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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아파트로 단지로 변해버린 옛 목포형무소 터를 찾고 있는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불인협의회.  ⓒ제주의소리

제주4.3유족회 상임부회장 김춘보(73) 씨는 “외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곳(목포형무소)에 수감되셨었다. 제주에서 육지로 나오면 대개 이곳을 거쳐갔을 것”이라며 아파트 단지를 가리켰다.

그는 “선조들이 고생하시다가 어디 간 줄 모르고, 지금도 돌아오지 않고 행방불명 돼 있단 것을 하나의 교훈 삼아, 후세에 이런 아픔을 전해 반복되는 역사를 막자”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유해를 인도하려 해도 몇 분이 되는지도, 나무 비석의 훼손으로 제 가족을 찾기도 어려웠던 상황.

수십 년이 지난 오늘, 개발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혼령을 위로하는 것조차 더 어려워졌다.

유족 사이에선 ‘(제를 지내면) 주민들이 싫어할 수 있어’, ’허락해 주시면 하는 거지만 안된다면 어쩔 수 없지’, ’우리 유족들을 이해해주시면 고맙지’ ’주민들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말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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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목포형무소 터에서 제를 올리고 있는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불인협의회 소속 유족들. 과거 형무소가 있던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제주의소리

순례단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양해를 구하고 아파트 내 작은 정자에서 서둘러 혼령들을 위로한 뒤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왕복 약 3시간을 더 들여 얻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4.3유적지인 전국 형무소 터 대개가 온전히 보존도, 기억되지도 못하고 변화해 왔다. 하지만 변치않은 마음의 유족들을 실은 전세버스는 쉴 새 없이 전국 곳곳의 형무소 터로 달려가야만 했다.
 
곧이어 도착한 곳은 광주형무소 터. 2009년 발견된 재판 기록에 따르면 4.3당시 200명 안팎의 도민들이 이곳에서 옥살이를 했다. 

광주형무소의 철창 뿌리가 옛 터임을 증명했다. ‘광주형무소 터’라는 표지판은 누군가의 반감으로 훼손돼 있는 상태였다. 한쪽에서는 ‘제주4.3옛터’로 표지판을 새로 바꾸자는 의견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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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형무소옛터'라고 쓰인 표지판이 스프레이 등으로 훼손된 모습. ⓒ제주의소리

순례단은 주택가로 변한 좁은 골목에서 간단히 넋을 기리고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전주형무소 옛 터. 상대적으로 개발이 되지 않은 모습에 한 유족의 눈에선 유해 발굴에 대한 희망이 솟았다. 

1950년 6월 말부터 전주 지역이 인민군에 점령당하기 직전, 퇴각하던 군경은 전주형무소 수형인 약 1400명을 4차례에 거쳐 학살했다. 학살된 피해자 대부분은 ‘좌익사상범’으로, 이른바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전한다. 

황방산 기슭에는 아직도 수많은 유골이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불법 재판으로 형무소로 끌려간 제주 4.3 피해자도 상당수 이곳에 잠들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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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북유족연합회 사무국장 최정근(왼쪽) 씨와 김춘보 유족회원이 옛 전주형무소 터에서 4.3행불인유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제주의소리

한국전쟁 전북유족연합회 사무국장 최정근 씨도 행불인유족회의 일정에 맞춰 전주형무소 옛 터를 찾았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전주서 학살된 민간인 유해발굴이 7월부터 본격화된다는 사실을 순례단에 전했다.

민간인 학살 69년만에 전주시는 1억3343만원을 들여 효자동 황방산과 산정동 소리개재 주변의 유해를 발굴, 수습하고 감식할 예정이다. 이후 유해는 세종시 추모의 집에 안치할 예정이다.

그는 "학살된 전주형무소 재소자 약 1400명 중 유해는 몇 구나 수습될지 모르나 유가족을 찾고 피해자를 확실하게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강조했다.

외삼촌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행불인유족회 진덕문 사무국장은 항상 어머니로부터 그의 얘기를 전해 들어 왔다. 외할아버지가 그를 보기 위해 밭을 판 돈을 가지고 전주형무소에 찾아갔지만 벌써 싸늘한 시신이 된 이후였다.

아들(외삼촌)을 찾으러 간 황방산에는 아들의 시신 뿐만 아니라 무정하게도 버려둔 시체들이 묻혀 있었다. 학살 후엔 30cm 깊이도 안되는 흙만 덮어 시신들을 묻어뒀다. 묻었다기 보단 숨기고 버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그는 “외할아버지가 돌아온 뒤 딸들 앞에서, 너무 늦어 시신을 못 찾아왔다고 전했다 하더라. 그 전주형무소 터에 오니 지금도 감회가 깊다”고 전하며 유골이 수습되길 간절히 바랐다. 

야속하게 쉼없이 흘러가는 세월과 방치된 공간들 속에서, 추모의 마음을 내는 것 마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도 순례단은 그저 묵묵히 찾아가 넋을 기린다. 4.3 옛 터가 변해가고 사라질수록 유족들의 기억은 더 선명해진다. 기억의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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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불인유족협의회 회원들이 옛 전주형무소 터에서 일동 묵념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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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전주형무소 터. 아직 수많은 유골이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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