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25. 될성부른 종자는 귀귀쪽박으로 알아본다

* 뒐쳇종저 : 될성부른 종자(種子)
* 귀귀작빡 : 귀 모양으로 생긴 쪽박, 여기서는 씨를 뿌려 떡잎이 될 새싹의 모양

6월 초에 보리를 거둬들이고 나면 곧바로 조 농사를 한다. 조 씨를 뿌려 돋아난 새싹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외잎으로 움튼 모양이 마치 사람의 귀같이 생겼다. 크기야 작디작은 것이지만 귀 바퀴를 닮은 데서 ‘귀모양의 쪽박’이라 묘사한 것이다. 농작물의 싹을 자세히도 관찰했다. 그리고 재미있게 비유다.

보리는 싸 뿌려 흙을 사람의 발로 대충 덮어주면 싹이 잘 튼다. 파릇파릇 돋아나 한창 자랄 시기(겨울)에 밟아주기만 하면 잘 큰다. 
  
한데 조 농사는 보리처럼 쉽지 않았다. 파종 뒤 씨를 묻어 주는 정도로는 안된다. 싹이 나질 않거나 나더라도 부실하기 때문이다. 가족을 동원해 사람이 밟아주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어떻게든 조 씨를 뿌린 밭을 다져 주어야만 한다. 종자가 새싹을 내지 않으면 망치고 마는 것이 농사다. 바로 조 농사가 그랬다.

새싹이 쪽박 모양새로 넓죽하고 튼튼해 잘 자라야 애초 기대한 만큼 수확을 올릴 수 있음은 말할 게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씨를 뿌리고 나서 밭의 흙을 잘 다져야 한다. 조 농사에 있어 선택이 아닌, 필수다.
  
어릴 적, 밭에 조를 가는 날엔 활극을 연상케 하는 아주 역동적 희한한 장면이 벌어졌다. 지금은 조 농사를 별로 하지 않아 이런 풍경을 보려야 볼 수가 없다. 조 씨를 뿌린 직후 100마리에 가까운 조랑말 떼를 밭에 들여 놓아 흙을 다지던 장면. 이만한 수의 말을 아무나 소유했겠는가. 한 마을에 한 집이 채 되지 않아, 이웃마을 부자(마주)에게 큰 삯을 주고 빌리는데도 차례에 올까말까 말 떼를 끌어들이기가 그렇게 힘들었다.

어허어 어럴럴 어허이 어럴럴~

밭에서 나는 말 모는 소리가 가까운 산을 몇 차례 돌아오곤 했다. 말 떼를 부리는 솜씨가 놀라웠다. 앞에서 이끌고 뒤에서 몰아대고. 그렇게 몇 번인가 휩쓸고 지나는 새 밭이 단단히 다져졌다.

1970년대 제주 지역에서 말을 이용해 밭을 다지는 모습. 출처=서재철, 제주학아카이브.
1970년대 제주 지역에서 말을 이용해 밭을 다지는 모습. 출처=서재철, 제주학아카이브.

말을 빌리지 못하면 사람의 힘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남태와 끄슬퀴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남태는 엄청나게 컸다. 둥근 통나무에 한 뼘이 더 되는 나무토막을 둘러 박은 것으로, 굵은 줄을 묶어 어깨에 메고 끌면 흙 위를 탈탈탈 구르며 밭을 다졌다. 남태도 귀해 마을에 고작 몇 개였을 것이다. 차례에 오지 않으면 끄슬퀴를 썼다. 사람 힘에 의존하던 가장 원시적인 방식이었다.

나뭇가지를 겹겹이 엮은 위에다 날 솔가지 같은 것을 묵직이 얹어놓아 끌던 방식이었다. 둘 다 새싹이 나는 정도에 큰 차이가 났지만, 사정이 고르지 않아 갖고 있지 않으면 못 썼다.

‘뒐쳇종저는 귀귀작빡으로 안다.’

이 속담은 조 농사를 함에 새싹이 좋아야 풍작을 기대하게 된다는 것, 그래서 파종해 밭을 잘 다져야 싹이 튼실하게 된다는 것인데, 사람에 비유했다. 될성부른 사람은 아잇적부터 알아본다는 빗댐이다. 사람의 장래성을 이미 아이 때 감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장차 큰 인물이 될 사람은 어릴 때부터 뭔가 다르다 함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 때부터 알아본다’와 같은 맥락이다.

옛 조상들이 조 농사를 지으며 새싹에서 귀 모양의 쪽박을 발견하고, 이런 건강한 싹에서 풍성한 수확을 바라보던 지혜가 번득인다. 그래서 싹이 튼튼히 솟아나도록 조를 볼리는(밟는) 날이면 밭을 다지려 말 떼까지 동원했던 것이다. 원시적이라 할 것이 아니다. 놀라운 영농이었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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