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적 인간] 27. 파리의 딜릴리(Dilili in Paris), 미셸 오슬로, 2019

'영화적 인간'은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 질 들뢰즈의 말처럼 결국 영화가 될(이미 영화가 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글이다. 가급적 스포일러 없는 영화평을 쓰려고 하며, 영화를 통해 생각할 수 있는 삶의 이야기들이다. [편집자 주]

그때는 좋았다
모두가 가난하게 태어났으나
사람들의 말 하나하나가
풍요로운 국부(國富)를 이루었다

시인 심보선의 시 <호시절>의 일부다. 시인은 언어로 말미암아 무언가 나타낼 수 있던 때가 좋은 시절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말의 힘마저 발휘되지 못하는 시대는 암담한 시절로 불리게 된다. 언어의 주술성에 기댈 수 있다면 아직 끝장은 아니다.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절’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프랑스의 벨 에포크는 혁명 이후 1차 세계대전이 발발되기 전 시대를 일컫는다. 모네, 세잔, 드가, 르누아르, 피사로 등 인상주의 화가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파리 세계박람회, 에펠탑, 알렉상드르 3세 다리, 그랑 팔레․프티 팔레 궁, 프랑스 지하철 개통 등. 그 시대를 살았다면 행운이다.

애니메이션 ‘파리의 딜릴리’ 포스터. 출처=네이버 영화.

그러나 그러한 좋은 시절에도 인종 차별은 여전했다. 어쩌면 드레퓌스 사건은 양대 세계대전의 복선이었다. 훗날 프랑스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알제리 출신의 지단을 앞세워 우승을 차지했지만, 프랑스는 알제리부터 마다가스카르까지 침략으로 지배를 했던 제국주의 국가였다. 파리의 상류층에게는 호시절이었으나 카나키(뉴칼레도니아)에서 온 딜릴리는 언제나 이방인이다. 드뷔시, 피카소, 까미유 끌로델, 뤼미에르 형제, 퀴리 부인, 파스퇴르 등이 있어서 아름다운 시절이 되려면 딜릴리는 프랑스인이어야 한다. 명사를 만나면 수첩에 이름을 적으면서 암기를 하고, 국적 취득 시험을 보듯 프랑스 노래를 부르고.

나의 호시절은 언제일까.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협재 바닷가에서 외삼촌과 함께 별자리를 보던 여름밤. 잘 익은 수박 같던 시절. 외숙모가 만들어준 미역무침은 미끄러운 맛이었다. 나는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의 밤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해 가을에 외삼촌은 오토바이 사고로 별이 되었다. 호시절은 다시 돌아갈 수 없어서 호시절인가. 산울림과 해바라기의 노래를 듣던 날들.

1960년 영국 리버풀에서 비틀즈가 결성된 해에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다. 비틀즈가 해체되고 베트남 전쟁도 끝났다. 프랑스 벨 에포크 시기에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로 지배했다. 그리고 딜릴리의 고향 뉴칼레도니아는 여전히 프랑스령이다.

현택훈
시인. 시집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산문집 《기억에서 들리는 소리는 녹슬지 않는다》 발간. 영화 잡지 <키노>를 애독했으며, 영화 <스쿨 오브 락>의 잭 블랙처럼 뚱뚱하고, 영화 <해피 투게더>의 장국영처럼 이기적인 사랑을 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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