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사를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있다. ‘제주무불시대 200년’이 그것이다. 무불(無佛), 즉 불교가 없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조선후기 이형상(1653~1733, 1701년 제주도 들어옴) 목사의 극단적 벽불(闢佛) 사건 이래 근대불교가 태동하기까지의 시기인 200여 년간을 이르는 말이다.

제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과연 제주에 무불시대가 있었는가?'라는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제주 200년 무불시대라?

왜 무불시대란 말이 등장했을까? 1925년 4월 19일자 매일신보의 <제주불교의 흥륭>이라는 기사에 ‘무불국(無佛國)’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조선 성리학자에 의한 탄압을 부각시키고 사라졌던 불교를 재건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무불시대라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이 표현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

그럼 실제로 1702년, 즉 18세기 훼불 사건 이후 불교가 사라진 무불시대였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는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주 불교에 대한 문헌, 유적, 유물을 포함한 사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비단 불교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조선시대 이전 역사의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이런 실정이다. 물론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지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시기에 사료나 유물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 시기를 그 문화가 없었던 시기라고 하지 않는다. 불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제주불교사에서 벽불(闢佛)은 이형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은 그보다 300여 년 앞선 조선초기 태종 8년(1408) 비보사찰인 법화사와 수정사의 경제력을 축소하면서 시작되었다. 그후 150여년 지나 목사 변협(1528~1590)과 곽흘에 의해 불상이 바다에 버려지고 사찰이 헐린다. 목사 변협은 1565년(명종20) 10월부터 12월까지 제주목사를 지냈으며, 부친상으로 12월 9일 사임한 인물이다. 그런데 12월 9일 제주에 유배 온 나암보우(1506~1565) 대사를 때려 죽였다. 후임 목사 곽흘은 1565년(선조1) 12월부터 1568년까지 제주목사를 지내는 동안, 절과 불상을 없앴다.

그 이후 한동안 훼불에 대한 기사가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목사 이형상에 의해 다시 등장한다. 이형상은 1701년 겨울에 부임하여 1703년 6월까지 머물게 된다. 《병와집》에 수록된 행장에는 “신당 129곳과 절 두 곳(해륜사와 만수사)를 일시에 불태우고 불상을 바다에 던졌으며, 천 명에 가까운 무당들은 모두 그들의 안적을 불사르고 귀농시켰다”고 하고 있다. 《탐라순력도》의 건포배은에도 부수어 헐어버린 사찰이 5곳이고 귀농시킨 무격(무당)이 285명이라고 하였다. 이전의 기록이 구체적이지 않아 훼불의 정도가 파악되지 않지만, 이형상은 비교적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때 이후를 일반적으로 지금까지도 제주도에는 사찰이 없는 무불시대로 일컫고 있다.

그렇다면, 1700년대 이후 제주에는 불교가 없어졌을까? 

1702년 이후부터 1900년 이전의 제주불교사와 관련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환성지안, 초의의순, 쌍월스님, 응월스님, 강창규스님, 김윤식 등을 들 수 있다. 환성지안(1664~1729)은 직지사에 모운스님의 뒤를 이어 학인을 지도했으며, 1725년(영조1)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었을 때 학인 1400명이 모여 강의를 들었다. 1729년에도 법회를 열었는데 반역죄라는 무고를 쓰고 호남의 옥에 갇혔다가 풀려났으나 반대 의견에 부딪혀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제주에 유배된 지 일주일 만에 병을 얻었으나 가부좌를 한 채 입적했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하던 시절(1840~1848), 초의스님(1786~1866)은 1843년에 6개월간 제주에서 머무른다. 이 때 산방굴사에서 수도하였다. 《원대정읍지》에 “초의 스님은 산방굴사에서 수도하였고, 추사에게 <밀다경(密多經)> 쓰기를 권하여 세상에 전하였다”고 한다. 당시 목사 이원조(1792~1871)의 부탁을 받고 시를 지어 주기도 하였다.

선덕사의 기록에 따르면, 1870년 무렵에는 쌍월·응월 두 스님이 이곳에 토굴을 짓고 수행을 했다고 한다. 강창규(1878~1963) 스님은 제주 오등동 출생이다. 16세가 되던 1892년 4월 8일 전북 임실 죽림사로 출가하여 제주로 다시 돌아와 관음사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18년 제주 최초이자 최대의 무장항일운동인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갑오개혁의 주축이었던 김윤식(1835~1922)은 을미사변 때 황후 폐위 조칙에 서명한 일로 1897년 12월 제주도로 유배가게 된다. 그 해 12월 21일부터 1901년 7월 16일까지의 4년 반 남짓한 기간 동안 일기 형식으로 <속음청사>를 썼다. 여기에는 사월초파일 불탄일을 기념하여 등을 달았고, 제주 유림들은 《전등록》을 읽기도 하고 나한상을 봉안했다고 한다. 또한 해인사와 전남 강진 스님이 찾아온 이야기 등을 기록하고 있다. 유불(儒佛)의 교류가 활발했으며, 특히 유학자들의 불교 신행이 이루어지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이형상 이후 200년 동안 매 시기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여러 스님과 김윤식의 기록을 통해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형상이 벽이단(闢異端)의 성리학적 사상과 공권력으로 불상을 파괴한 이후, 활동이 위축되었거나 불교를 숨기고 비밀스럽게 신행하는 은불(隱佛)의 시기였을 것이다. 겉으로는 성리학을 숭상하는 듯 보이면서도 안으로는 불교를 믿는 외유내불(外儒內佛)의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이렇듯이 불교는 제주민들의 삶에 녹아 면면히 이어졌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제주민들의 기록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탄압한 당사자는 분명 외지인이었다. 하지만 탄압 당하고 고통 받은 당사자들은 제주민이었다. 조선시대 기록의 한계를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

험난한 섬 생활에서 정신적 안정과 의지처가 된 불교와 무속은 면면히 제주민들과 함께 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상기하건데, 제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은불의 시기는 있었을지라도 무불시대는 없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제주불교는 근대불교 재흥을 강조하기 위해 쓴 무불시대라는 말은 이제 쓰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히려 제주의 각종 문화유산, 특히 무형문화유산의 단절을 공공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여 천여 년의 제주문화사, 그 가운데 불교문화를 단절시키는 일을 조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고상현 문화예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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