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제주도 문화예술진흥원 기획공연 오페라 ‘춘향전’

제주도 문화예술진흥원(원장 현행복)이 야심차게 준비한 기획공연 <현제명 오페라 춘향전>(춘향전)이 19일부터 20일까지 열렸다. 

제주에서 오페라를 만나는 일이 그리 낯설지 않은 요즘이지만 <춘향전>은 여러모로 의미를 지닌다. 먼저 1950년 5월 초연하면서 한국 창작오페라의 효시 격으로 평가받는 고전임에도 이번이 제주에서 처음 소개되는 자리다. 또, 이틀 동안 총 세 번 공연이 열렸는데 두 번째(20일 오후 3시)는 주·조연에 제주 성악가들이 출연했다. 원래 계획에는 없었지만 주최 기관인 문화예술진흥원과 현행복 원장이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주관사인 (사)강화자베세토오페라단(단장 강화자)이 수락했다 전해진다.

제주 관객과 처음 조우한 <춘향전>은 원작 줄거리를 충실하게 재현한다. 그네 타는 춘향에 반한 사또 아들 이도령, 그러나 두 사람은 이도령이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떠나면서 백년가약을 잠시 미룬다. 새로운 부임한 사또는 권력놀음에 푹 빠져있다. 춘향이 수청을 끝까지 거절하자 옥에 가둬버린다. 춘향에 대한 사형 집행을 앞둔 순간, 과거시험에 합격해 암행어사로 찾아온 이도령이 사또를 엄벌하고 춘향과 영원한 사랑을 재확인한다.

작품은 친숙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음악적 매력을 더한다. 춘향과 이도령의 독창·중창, 여기에 향단과 방자를 더한 4중창, 30~40명 인원이 함께 부르는 합창까지 무대 위에 울려 퍼진다.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으로 불리는 사랑가는 지금 들어도 큰 무리가 없을 만큼 세련된 선율을 자랑한다. 지금은 널리 쓰이지 않는 옛말 대사에서는 시대 차이를 느꼈다. <춘향전> 음악은 만들어진 지 69년이 지났어도 흥미롭게 귓가에 다가온다. 지역을 달리하면서 꾸준히 공연되는 이유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유인택 예술의전당 사장도 제주 공연을 관람하고 본인의 SNS에 "잘 알려진 이야기에 음악도 좋아 즐겁게 관람했다. 자막 서비스를 해서 가사 전달이 잘 됐다. 제주 성악가들도 출연해 지역과 함께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며 주최 측에게 박수를 보냈다.

강화자 단장은 공연을 앞두고 ‘춘향전만큼은 자신있다’고 말했다. 연출자로서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공연을 선보였으며 현역 시절에도 직접 ‘월매’ 역을 맡은 바 있다. 자신감에서 잘 드러나 듯 이번 <춘향전>은 안정적인 매력이 돋보인 무대였다. 

사선 방향으로 배치해 수줍은 감정을 표현하는 춘향과 이도령의 첫 만남, 춘향과 이도령의 이별 장면에서 추임새를 넣는 조연들, 사또의 과장된 동작과 그에 반응하는 부하들의 호흡 등은 마치 잘 닦인 길을 매끄럽게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여기에 박미자(춘향), 이정원(이도령) 같은 중견급 배우들의 무게감은 힘을 더했다. 향단(김문희·한은주)과 방자(김성진·김신규)의 활력 넘치는 주고받음, 기생으로 분장한 남자 배우의 깜짝 등장, 과장스러운 몸짓의 기생은 웃음을 선사하며 극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다만, 전체로 보면 충실하게 원작 느낌을 재현하는데 초점이 맞춰졌기에, 눈에 띄는 시도 대신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다. 특히 갈등이 정점으로 향하는 이도령의 암행어사 등장은 동선이나 진행에 있어 명확한 연출 방향 없이 서두른다는 인상을 줬다. “암행어사 출두야”라는 외침에 몇 가지 색이 교차하는 조명 아래서 이리저리 배우들이 오가고, 이내 배우들이 서서 "위대한 암행어사"를 찬양하는 모습은 앞선 안정적인 진행과 달리 어수선했다. 

세트는 천으로 대체한 광한루에서 단출한 사또 관청까지 전반적으로 약식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에 반해 배우들의 복장은 작품에 몰입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제주도립무용단(상임안무자 김혜림)은 춘향과 이도령의 핑크빛 전개를 암시하는 군무, 두 사람의 그림자 연기, 사또 잔치에서 화려한 전통무용 등 분위기를 주도하는 역할을 잘 소화했다. 

'춘향전' 출연진들이 19일 공연을 마치고 무대 인사를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춘향전' 출연진들이 19일 공연을 마치고 무대 인사를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이번 <춘향전>은 한국 오페라 역사에서 중요한 작품을 제주에서 처음 선보인다는 취지뿐만 아니라 제주 공연예술계의 변화 흐름 안에서 읽혀진다.

올해로 4년째 이어오는 서귀포예술의전당의 <서귀포오페라페스티벌>, 지난해 제주아트센터와 한국오페라70주년기념사업회가 손잡은 <라 트라비아타>, 그리고 이번 제주도 문화예술진흥원의 <춘향전>까지. 모두 제주 예술인들이 공연 준비·결과에 있어 나름의 역할을 맡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행정 기획자는 무대가 완성될 때까지 과정마다 '그림'을 그리고 지역 예술인들은 도민 앞에서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잡았다. 여기에 최근 지역 음악 예술인들과 기업인이 손잡고 발족한 오페라 전문 민간 단체 ‘오페라 인 제주’까지 더하면 큰 틀에서 보다 분명한 흐름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엿보인다.

가능성이 '가능성'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선결 과제들이 있다.

공립 예술 공간(제주아트센터, 서귀포예술의공간, 제주문예회관)과 공립 예술단의 일체된 운영은 지역 예술계가 꾸준히 강조하는 숙원 가운데 하나다. 현재 제주도 문화예술진흥원과 제주도립무용단 관계가 그나마 비슷한 예시다. 위에서 언급한 변화들이 행정 속으로 들어간 예술 기획자들 손에서 빚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획자들이 예술 행정을 보다 책임 있고 주도적으로 도맡는 원칙(지원은 하되 간섭은 없다)과 시스템은 장르 가릴 것 없이 지켜지고 갖춰져야 한다.

<춘향전> 같은 시도가 계속해서 이뤄지고 또 의미있는 결과까지 나아가기를 바란다.

PS. 일제강점기 전범 기업들의 강제 징용에 대해 최근 사법부가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로 인해 일본 정부가 한국에 수출 규제(라고 쓰고 보복으로 읽는)를 가하면서 어느 때보다 한일 관계가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춘향전>의 원작자 현제명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반민족행위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현제명은 일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가요를 작곡하고 친일단체에 가입했다. 세세한 친일 행적이 한 두 개가 아니다. 

그가 만든 음악 <춘향전>은 시대를 지나 여전히 높이 평가 받을 만한 음악적 가치를 지녔다. 기자를 포함 여러 도민이 제주 공연을 통해 몸소 확인했다. 하지만 선조들의 피와 눈물을 외면하면서 탄생한 유려한 음악을 과연 진정으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지, 최근 시국에 비춰 곱씹으며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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