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 숨, 쉼] 시간 들여 서로를 알아가는 것

부엌살림을 좀 해본 사람은 다 안다. 스텐(Stainless) 프라이팬이 얼마나 다루기 힘든가를. 옷 가방보다 주방 기기나 용품에 더 끌렸던 나는 이미 칠팔년 전에 스텐팬 하나를 사서 호기롭게 쓰기 시작했다. 시작만 했다. 설명서를 정독한 후 그대로 예열하고 해물파전을 시도했다. 기름이 작은 물방울이 되어 날아다닐 만큼 충분히 예열되었을 때 불을 줄여 반죽을 넣으면 맛있게 익는 소리가 부엌을 떠돌아다닌다는 내 생각이었고 실상은 달랐다. 팬 바닥에 악착같이 눌어붙은 재료들이 내게 ‘메롱, 나 떼어봐라’하고 있었다. 뒤집개로 가뿐하게 뒤집혀야 할 재료들이 팬에서 떨어지지를 않으니 정나미가 딱 떨어져 그릇장의 가장 높은 선반으로 보내버렸다.  

높은 선반에서 나름 장작위에 누워 쓸개를 맛보는 마음가짐으로 나를 기다렸을 스텐팬을 다시 꺼내든 것은 지난해 여름 어느 날이었다. 코팅팬에 대한 우려가 갑자기 커져서도 아니고 스텐팬에 대한 애정이 샘솟아서도 아니었다. 그냥 쓰고 있던 팬이 너무 오래 됐고 새 프라이팬을 사자니 아까워서 있는 걸 쓰자는 마음에 스텐팬을 다시 꺼냈다. 이미 한 번 당했던 경험이 있는지라 이번에는 팬을 충분히 달구고 날아다니는 기름방울도 구경한 다음 불을 끄고 마른 행주로 팬을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 그리고 다시 팬을 예열해서 멸치 볶음을 했다. 예열된 팬에 마늘과 청양고추를 먼저 볶고 불을 줄여 멸치를 넣고 꿀 설탕 등을 적당히 넣어 볶다가 멸치다시마육수를 조금 넣어 자작하게 익혔더니 먹을 만 했다.

그 후 스텐팬은 부엌에서 아옹다옹 나와 잘 지내고 있다. 스텐팬을 잘 쓰는 기본은 충분한 예열과 불 조절이다. 이런 기본을 잘 안다는 것이 바로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 이것이 삶의 무늬들을 만들어낸다. 시간이 충분하고 마음의 여유가 있으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한 끼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을 때 먼저 팬을 올려놓고 딴 일하다 조리대에서 뭉게뭉게 연기가 솟아오른 경우는 놀랄 일도 아니다. 반대로 급한 마음에 얼른 재료를 넣었는데 바닥에 눌어붙는 일도 여전히 비일비재하다. 그래도 이제는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순간을 넘긴다. 그러다보면 뜻밖에 멋진 순간을 만난다.

스텐 프라이팬에서 맛있게 익어가는 오징어파전. 오징어는 부침가루에 몸을 숨겼고 색깔 있는 야채들만 존재감을 드러냈다. 제공=홍경희. ⓒ제주의소리
스텐 프라이팬에서 맛있게 익어가는 오징어파전. 오징어는 부침가루에 몸을 숨겼고 색깔 있는 야채들만 존재감을 드러냈다. 제공=홍경희. ⓒ제주의소리

엄청나게 비가 왔던 지난 주말 스텐팬에서 오징어파전을 해먹었다. 시간은 많았고 주말이라 마음의 여유도 있었다. 오징어를 썰고 냉장고 안에 있는 야채들을 죄다 꺼내 썰고 쪽파를 듬성듬성 썰어 반죽을 한 뒤 잘 예열 된 스텐팬에 넣었다. 뒤집기 좋은 적당한 크기의 반죽을 넣었더니 자글자글 맛있는 소리가 부엌 여기저기를 날아다닌다. 뒤집개로 가뿐하게 뒤집어가며 앞 뒤 노릇하게 익힌 오징어파전은 비 오는 주말 저녁 우리 가족들에게 소소한 삶의 행복을 안겨주었다. 그럭저럭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스텐팬과 나는 적당히 서로에게 길들여져 있었다.

그리고 뜬금없이 이런 생각도 들었다. 삶이란 참 여러 가지에게 익숙해지고 길들여지는 거구나. 그러면서 친구가 되어가는 거구나. 좋은 친구가 되려면 어느 정도는 시간이 필요하구나. 만족한 결과를 얻으려면 절대 서두르지 말고 여유를 가져야겠구나. 서로 좋아지려면 먼저 서로를 잘 알아야하는구나. 잘 알았으면 그에 맞게 행동을 해야 하는구나. 타인에 대한 이해 없이 무조건 나에게만 맞추라는 것은 잘 못된 거구나. 서로에게 잘 길들여지면 어느 순간 절정의 순간을 같이 맞이할 수 있겠구나.

고작 스텐팬에 오징어파전 하면서 거창하게 이러쿵저러쿵 삶을 얘기하다니, 참 웃긴 일이기는 하다. 그런데 그런 생각들이 막 떠올랐다. 이것도 병인가, 생각 병. 하하하. / 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http://jejubook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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