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30. 선묘 이장 잘못하면 집안 망한다

* 뻬장 : 뼈장(~葬), 이장(移葬) 또는 이묘(移墓)

뻬장(뼈장)이란 시신을 매장한 무덤에서 다른 곳으로 새로 묻는 장례다.

이장(移葬)하는 것인데, 우리 조상들은 선묘 이장 등에 이만저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풍수에 정통한 정시(地官)을 찾아가 새로 옮길 묘지를 정한 뒤 택일을 해야 한다. 지관이 상제(後孫)를 대동하고 다니면서 명당지지를 찾느라 몇 날 며칠 산속을 헤매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게 선묘에 공들이고 정성을 기울였다.
  
행여 그렇지 않고 장지와 날을 성의 없이 아무 곳에나 또 아무 날에나 일을 치렀다가는 상주의 가문에 화(禍)를 입어 망하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전에는 이묘 시, 하나에서 열까지 처음 장례를 지낼 때와 똑같은 절차에 따라 신중하게 일을 치렀다. 그게 후손으로서 효를 실천하는 당연한 도리이며, 그래야 조상 음덕으로 가운이 펴질 것이란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흔히 말하는 ‘산 잘못 쓴 집 망헌다’라거나, 이를 뒤집어 ‘산 잘 쓴 집 흥헌다’고 했다. 한 맥락이다.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장묘문화의 비중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행간에서 읽는다. 유교적 영향에서 조상의 묘를 매우 중시해 왔던 오랜 전통적 관습에 뿌리박고 있는 터라 갑자기 고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말 그대로 관혼상제 가운데 하나인 상례(喪禮) 소관이라 그렇다.

한마디로 말해, 시신 매장 풍습이 장묘문화다.

우리 국민이 워낙 매장을 선호하다 보니, 결국 전 국토를 묘지로 만들어 가는 작금의 추세다. 개선책이 활발히 논의되면서 화장 쪽으로 급속하게 바뀌고 있다. 십중팔구가 화장이라 말할 정도다.

옛날 풍속이라고 나무라선 안된다. 이왕 이장하기로 정한 것이면, 있는 성의를 다하는 게 자손의 도리일 터이니.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옛날 풍속이라고 나무라선 안된다. 이왕 이장하기로 정한 것이면, 있는 성의를 다하는 게 자손의 도리일 터이니.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화장이 정착되려면 화장장을 쾌적하고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접근성이 좋아야 함은 물론, 납골당도 역시 교통이 편리하고 환경이 좋은 곳에 설치돼야 한다.

최근 서울시의 경우, ‘지역적 이지주의’로 화장‧납골장 설치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비단 서울만이 아니다. 혐오시설을 거부하는 님비 현상이 심각하니 문제다.

십 수 년 전, 수목장(樹木葬)을 치르는 장면이 TV를 통해 전국에 중개된 적이 있었다. 고려대 임학과 故 김장수 교수님의 장례식. 검정색 양복을 입고 흰 조의완장을 찬 상제 몇이 유골항아리를 들고 와 미리 파둔 나무 둘레에다 골고루 뿌리는 것이다. 그 나무는 다름 아닌 고인이 생전에 사랑하던 ‘참나무’라 했다. 말없이 엄숙하게 진행된 장례의식은 나무에다 표찰을 거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마치 사람의 목에 걸 듯 나무에다 걸어 놓은 표찰에 적혀 있는 글자는 모두 7음절이었다. ‘김장수 할아버지.’ 

우리나라에선 최초로 치러진 수목장 제1호다.

한데 그 후로 이 수목장도 ‘유령의 숲’이다 뭐다 하며, 사람이 접근을 꺼려한다는 등 여러 문제점이 도출되는 모양새인 것 같다. 결국 가장 보편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이 납골당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인 얘기지만 곁들인다. 지난해 일본에 살다 돌아가신 장모님 납골묘에 참배하기 위해 오사카에 갔다 온 적이 있다.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사찰 너른 마당에 300기 가까운 납골묘를 탑으로 세워 놓고 절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결코 외진 곳이 아닌데도 주민들 인식이 우라와는 사뭇 달랐다. 사자(死者)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문화의 차이를 실감했다.

우리 사회엔 또 꼴불견인 장례문화가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대권을 꿈꾸는 지도층 인물들이 선묘를 이장하는 것. 그냥 옮기는 게 아닌, 호화분묘로…. 어떻게 보아야 하나. 세상은 공평하지 못하다지만 이건 아무래도 지나친 게 아닌가. 서민 쪽에선 그만한 것을 살피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런 분들 쪽에서 그런 걸 헤아릴 마음의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욕망 앞에 무엇이 보일 것인가.

‘뻬장 잘못허민 집안 망헌다.’

옛날 풍속이라고 나무라선 안된다. 이왕 이장하기로 정한 것이면, 있는 성의를 다하는 게 자손의 도리일 터이니.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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