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추념사와 약산, 제주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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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시선] 4.3은 일종의 ‘커트라인’...독립유공자 발굴 속도 내야

꼬박 16년이 걸렸다. 도대체 몇 번을 좌절했는지 모른다. 그동안 국가보훈처에서 받은 서류는 한 무더기였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방증이었다. 번번이 4.3이 발목을 잡았다. 무고한 양민들을 구하려다 토벌대에 총살된 게 죄라면 죄였다. 그래도 세상이 달라지긴 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비로소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 지난해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은 고(故) 한백흥(韓伯興, 1897~1948) 선생의 이야기다.  

선생은 제주지역 대표적인 항일운동인 조천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조천항일기념관 전시관에는 ‘주역 10명’ 중 하나로 사진이 걸려있다. 해방 후엔 초대 이장을 맡을 만큼 덕망이 높았다. 4.3의 광풍이 그의 운명을 갈라놓고 말았다. 1948년 11월, 사지에 몰린 동네 청년들을 살려보려고 토벌대를 막아섰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주민들은 선생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자 2010년 기념비도 세웠으나 독립유공자 추서까지는 험난했다. 세상이 다 아는데도 “공적이 없다”는 이유로 매번 반려됐다. 말만 안했지, 실은 ‘사상 검증’이라는 견고한 덫에 걸려든 것이었다. 독립유공자 선정은 손자 한형범 씨가 2002년부터 백방으로 뛰어다닌 결과였다. 공교롭게도 선생이 생을 마감한 해에 손자 한씨는 세상에 태어났다. 

한백흥 선생의 경우는 그마나 나은 편이었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끈질지게 달라붙은 ‘열혈 손자’라도 있는 게 다행이었다. 

동갑내기 문형순(文亨淳, 1897~1966) 전 모슬포경찰서장은 극명하게 대비되는 사례다. 후손이 없는 게 결과적으로 그의 죽음을 더욱 쓸쓸하게 했다. 

꽤 알려졌듯이 그는 현직 서장 시절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량한 도민들의 목숨을 살린 ‘한국판 쉰들러’이자 경찰 영웅이었다. 기지를 발휘하거나 총살 명령을 어김으로써 두차례나 대량학살을 막았다.  

일제강점기 문형순은 만주에서 무장 독립투쟁을 펼쳤다. 국민부(國民府) 중앙호위대장에까지 올랐다. 국가보훈처가 2005년 공개한 독립운동 참여자 명단에서도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경찰청은 2018년 문 선생을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했다. 그해 11월에는 제주경찰청 청사 입구에 추모 흉상을 세웠다.

거기까지였다. 2010년 이후 독립유공자 선정 심사에서 네 번이나 고배를 마셨다. 이유는 ‘입증자료 부족’, ‘사후행적 불분명’. 그럼 경찰은 실체도 모르면서 영웅이니 흉상이니 호들갑을 떨었던가. 올해 심사에서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시도는 그 전에도 있었다. 2006년 동향(평안도) 사람이 자료를 수집해 신청에 나섰으나 허사였다. 4.3 이후 경남 함안경찰서장을 지낸 그는 제주로 돌아와 쌀 배급소를 운영하며 가난과 싸우다 홀로 생을 마감했다. 제주시 오등동 ‘제주 평안도 공동묘지’에 쓸쓸히 잠들어있다.   

왼쪽부터 한백흥, 문형순, 배두봉, 김원봉. ⓒ제주의소리
왼쪽부터 한백흥, 문형순, 배두봉, 김원봉. ⓒ제주의소리

올해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를 놓고 보수언론과 자유한국당 등이 일제히 반발했다. 독립운동 활약상이 눈부신 약산 김원봉을 언급한게 그들을 자극했다. 문 대통령은 “광복군에는…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고 팩트를 언급했으나, 보수언론 등은 약산의 월북 이후 행적을 물고 늘어졌다.  

추념사는 애국 앞에서 이념과 정파의 구분을 뛰어넘자는 메시지였지만, 논란은 약산의 서훈 문제로 옮겨붙었다. 청와대 관계자가 “서훈은 별개의 문제”라고 선을 그었은데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사실 약산의 독립운동 행적은 자유한국당이 과거 새누리당 시절에 기관지를 통해서도 조명한 바 있다. 특히 한국당 소속 인사가 시장으로 있는 경남 밀양시는 지난해 3월 김원봉 생가터를 매입해 의열기념관을 조성했다. 기념관은 해방 후 김원봉의 행적에 대해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진력하다 미군정의 탄압이 심해지자 1948년경 북으로 갔다”고 월북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독립영웅에게 수모를 안긴 악명높은 친일경찰 노덕술이 국가유공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독립유공자 서훈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여부로만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해방 이후 행적’이 시빗거리가 되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제주에서는 그 중심에 4.3이 놓여있다. 더구나 한국현대사의 최대 비극으로 일컬어지는 4.3은 제주도민에게서 거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수많은 도민이 목숨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대(代)가 끊긴 집안도 속출했다. 수십년간 4.3을 입에 올리는 것 조차 금기시됐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제시하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어렵사리 신청한다 해도 4.3에 연루됐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커트라인으로 작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적의 입증 책임을 유족에게 지우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도내 18개 시민사회단체가 지난 4월 ‘제주항일 독립운동가 발굴 및 서훈 추천위원회’를 띄운 것도 이러한 문제 의식의 발로로 보인다. 위원회에 따르면 당장 독립유공자로 추천해도 좋음직한 인사만 3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독립운동단체의 명부와 판결문, 기관지, 신문 기사, 정보기관의 보고서 등을 종합해볼 때 제주지역 독립투사가 500여명에 달할 것이라는 추정도 나왔다. 

올해 광복절 이전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도내 인사는 183명. 아직도 갈길이 멀다는 얘기다. 지난해 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일이 이름을 거명한 제주해녀항일운동의 주역 5명 중에서도 2명은 여태껏 애국지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먹먹하던 차에 제74주년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낭보 하나가 날아들었다. 제주 출신 6명이 새롭게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것이다. 이 중엔 1930년대 식민지 수탈의 실상을 학생들에게 일깨운 이른바 ‘하귀야학회 사건’의 주역 배두봉(裵斗奉 , 1914~1948, 호적명 裵昌兒) 선생도 포함됐다. 사건은 당시 동아일보에도 실렸지만, 그 놈의 4.3으로 인해 1994년, 1998년, 2007년 독립유공자 심사에서 연거푸 탈락했다.   

4.3의 도화선이 된 1947년 ‘3.1 발포사건’ 당시 경찰에 항의한 혐의로 옥고를 치른게 이듬해 12월 검거선풍 때 체포로 이어졌고, 다른 지식인 5명과 함께 집단 총살당했다. 말이 되는가. 이게 그동안 독립유공자에서 배제된 이유의 전부였다.  

요즘 부쩍 새롭게 다가오는 문 대통령의 1년전 광복절 경축사. 

“아직도 발굴하지 못하고 찾아내지 못한 독립운동의 역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광복을 위한 모든 노력에 반드시 정당한 평가와 합당한 예우를 받게 하겠습니다”

격동의 현대사를 겪은 제주에는, 정부가 독립운동가 발굴에 속도를 내야 하는 이유가 차고도 넘친다. <논설주간/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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