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제주 개인전 여는 오키나와 사진작가 히가 토요미츠

ⓒ제주의소리
14일 '제주의소리'와 인터뷰를 가진 오키나와 사진작가 히가 토요미츠. ⓒ제주의소리

눈썹까지 하얀 눈이 내려앉고 세월의 흐름이 겹겹이 쌓인 주름진 눈가. 그러나 확신에 가득 찬 한 마디에 공동이 또렷해졌다. 

“오키나와는 일본이 아니다.”

사진가 ‘히가 토요미츠’(70, 比嘉豊光)가 제주에 들고 온 사진은 정확히 49년 전 고향 오키나와에서 벌어졌던 격렬한 투쟁의 기록이다. 제주에서 새로 생긴 갤러리 ‘포지션 민 제주’는 15일부터 28일까지 히가 토요미츠 초대전 <아 임 낫 야마톤추, 아임 우치난추>를 진행한다. 전시 제목은 ‘난 일본인이 아니다. 난 오키나와인’이라는 뜻이다. 전시장에는 1970년부터 다음해까지 오키나와에서 벌어졌던 ‘코자폭동(コザ暴動)’, ‘전군노(全軍労) 투쟁’을 담은 사진들이 걸려있다. 

코자 폭동은 오키나와 미군 병사가 일으킨 자동차 사고를 두고, 미군정의 처분에 분노한 주민 수천 명이 미군 차량 80대를 전복시키고 불태운 사건이다. 전군노 투쟁은 미군기지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졸지에 해고당할 위기에 처하자, 전오키나와군노동조합(全沖縄軍労働組合)이 나서서 싸운 일이다. 

남쪽 섬 오키나와의 역사는 오랜 시간 고난과 투쟁이 뒤엉켜 있다. 

독립국 ‘류큐 왕국’에서 1868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려 10만명 넘는 주민이 목숨을 잃는다. 전쟁은 끝났지만 미군정 통치는 끝나지 않았고 삶의 터전이 하나 둘 군사기지로 바뀌었다. 1972년 일본 영토로 돌아갔지만 2019년 지금까지 미군의 전략적인 군사기지로서 계속 점령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내 미군기지의 무려 70.6%가 오키나와에 몰려있다. 오키나와는 일본 전 국토의 0.6%에 불과하다.

전쟁 때는 강제 동원과 학살, 전쟁 뒤에는 폭행, 강간 등 군인 범죄. 모두 오키나와 주민들이 원하지도 선택하지도 않았다. 결국 생존을 위협받는 현실에 끊임없이 저항해야 했다. 지방의원, 국회의원, 지사 선거 마다 미군기지와 자민당에 반대하는 세력이 주민들의 선택을 받았다. 지금은 새로운 미군기지(헤노코) 건설을 둘러싸고 갈등이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히가 토요미츠는 14일 <제주의소리>와 가진 인터뷰에서 “겉으로 평온해 보여도 우리 오키나와는 49년 전 사진 속 같은 상황이 지금도 지속된다고 생각한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오키나와의 현실과 다큐멘터리 사진의 힘을 도민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 통역은 강숙영 경기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교수가 도움을 줬다.

다음은 히가 토요미츠와의 1문 1답 전문.

Q. 이번 전시 작품을 소개해달라.
A. 1972년은 오키나와가 미군정에서 본토(일본)으로 복귀될지 말지 결정나는 시점이었다. 내가 찍었던 이 사진들은 당시 오키나와가 겪었던 노동 문제, 시대 상황 등을 담고 있다. 오키나와 미군정은 27년 정도 지속됐다. 이에 따른 불만이 꾸준히 있었고 한편으로는 본토에 반환되면 어떻게 될지 불안함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코자폭동과 전군노 투쟁도 이런 배경에서 나타났다. 그 당시 투쟁은 노동 뿐만 아니라 미군의 독가스 논란 은폐(시내 근처에 독가스를 보관했다가 밝혀진 사건)까지 더해 총체적인 불만을 담고 있었다.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Q. 젊은 나이에 현장에서 사진을 찍었던 당신도 이제 70대가 됐다. 현재 오키나와는 어떤가. 지금 젊은 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A. 50년 가까이 흐르면서 오키나와는 본토와 많이 비슷해졌다. 일본 정부가 문화·경제적으로 동화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지금 20~30대에서 예전 같은 저항 의식은 희미해졌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럼에도 헤노코 기지(미군이 오키나와에 추진 중인 새 군사기지) 건설에 대해서 현민의 60% 가량은 반대하고 있다. 오키나와 민의(民意)는 더 이상 미군기지를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사진가로서 투쟁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헤노코 기지의 문제점을 자료집으로 만들어 배포한다. 1997년부터 시작한 ‘섬 언어 방언 프로젝트’도 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오키나와 전투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류큐어(오키나와어)로 당시 기억을 말하게 했다. 만들어진 영상을 미래 후손들에게 보여주는 사업이다. 제주 마찬가지로 여러 아픔이 있다. 제주어로 역사를 말하게 하고 영상을 제작해 함께 교류하는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 기억은 그 지역의 언어로 이야기할 때 남는다.

Q. 오키나와 주민들의 열망이 실현되려면 보다 많은 일본인들이 힘을 합쳐야 할 것 같은데?
A. 난 일본인을 믿지 않는다. (냉소적인 웃음)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다. 류큐는 애초 독립 국가였다. 일본에게 식민화된 것이다. 본토 사람들에게 기대를 걸기보다는 제주나 아시아의 섬들과 평화를 추구하는 활동에 무게를 두고 있다. 다른 섬들과의 연대 활동으로 투쟁에 도움을 얻기도 한다. 이번 전시도 연대의 연장선상이다.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히가 토요미츠의 사진 작품.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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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전시를 앞두고 정리 중인 히가 토요미츠. ⓒ제주의소리

Q. 오키나와와 일본은 정서, 문화 등이 정말 다른가?
A. 언어도 다르고 전통문화도 다르다. 오키나와는 일본이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동화교육에 의해 현실은 점점 바뀌고 있다. 그래서 섬 언어 방언 프로젝트를 일찌감치 시작한 것이다. 제주도는 다른 한국 지역과 달리 행정적으로나 여러 가지가 독립적인 것 같다. 제주 사례에서 무엇을 오키나와에 접목할 수 있는지 배우고 싶다. 

Q. 49년 전에도 싸우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당신들은 언제까지 싸울 것 같나?
A. 이런 상황이 빨리 끝나면 좋겠다. 내년이면 코자폭동이 50주년을 맞는다. 역사적인 투쟁은 사진으로만 남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렇게 전시를 하고 열심히 다니고 있다. 시대가 달라졌지만 예전 ‘형님들’이 보여줬던 적극적인 투쟁심이 계속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Q. 당신 사진이 어떤 의미로 현재 제주도민들에게 다가가길 바라는가?
: 우리 오키나와는 예전 같은 상황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고 여긴다. 겉으로 평온해 보여도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사진은 시간이 지나도 과거 현장과 기억을 기억하게 만드는 기제다. 제주에서도 여러 갈등으로 싸우는 분들이 있다고 알고 있다. 내 사진을 통해 그분들을 응원해주고 싶다. 더불어 다큐멘터리 사진의 힘도 느껴보길 바란다.

Q. 오키나와 정서를 대표하는 오키나와어 하나를 알려달라.
A. 이차리바 초오데. 직역하면 '만나면 형제'인데, 인연이 맺어지면 형제처럼 지낸다는 뜻이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타인과 늘 우호적으로 지내왔다. 그런 가치관과 정신이 담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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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하게 미소 짓는 히가 토요미츠.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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