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32. 는 밸딱, 고 씨는 고집

* 양 : 제주 梁 씨
* 고 : 제주 高 씨
* 밸딱(또는 밸착) : 조금만 비위에 거슬려도 발딱하는 모습. 짓시늉말(의태어)

재미있는 속설이다.

제주에는 삼성신화(三姓神話)가 전해 온다.
 
지금으로부터 약 4300년 전, 제주도의 개벽시조인 삼을나(三乙那) 삼신인(三神人) 곧 高을나, 梁을나, 夫을나가 삼성혈(三姓穴)에서 태어나 수렵 생활을 하다가 우마와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온 벽랑국(碧浪國) 삼 공주를 맞아 혼인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농경 생활이 이뤄졌으며, 마침내 탐라 왕국으로 발전하게 됐다는 탐라개국신화다.
 
이 탐라개국신화는 다른 대륙계의 건국신화에서 볼 수 있는 천손강림(天孫降臨)과는 달리, 삼성혈이라는 대지에서 탄생하신 신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이들이 제주도를 다스리면서 고 씨, 양 씨, 부 씨 국성(國城)의 탐라국이 건국됐다 한다.

신화 혹은 전설이라 하나, 탐라국 개국 성씨 곧 국성(國姓)인 고‧양‧부 삼성에는 독특한 성품이 있는 것처럼 회자돼 오는 점이 눈에 띈다. 물론 구전(口傳)이고 근거 없는 항간의 추측이나 짐작에 지나지 않을는지 모르나 딴은 그렇지만도 않으니 제법 흥미롭다.

양 씨 성을 가진 이들은 조금만 건드리면 참지 못해 ‘밸딱’ 하며 성질을 낸다는 것인데, 이 ‘밸딱’이 제주방언으로 매우 감각적인 표현이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그 자리에서 느끼는 그대로 곧바로 드러내 버린다 함이다.

“무사 경 고람수과? 나 무스 거 잘못해연 마씸(왜 그렇게 말하십니까?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데요)” 하는 식이다. 이게 ‘밸딱’ 하는 것이다. 다분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때 쓰는 말이 ‘밸딱’ 또는 ‘밸착’이다. 아주 민감한 성깔의 예민한 표출이다. 순진하기도 하고 그렇다. 어쨌든 그런 속내를 말로도 잘 나타내고 있어 몇 번 읽으면서 음미할수록 실실 웃음도 나오고 한편 놀랍기도 하다.

고 씨 성을 가진 이들은 고집이 세다는 지적을 세인들이 하고 있다. 외고집에 왕고집이라는 소리로 들린다. 자기주장을 내세워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다는 임전무퇴의 자세로 일관하는 게 고 씨 성 가진 사람들이라 함이다.

이 ‘고 고집’은 오랜 옛날부터 제주지역 주민들 입에 오르내려 거의 정설화(?)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 씨 성을 가진 독자들께서는 아량으로 받아들이시리라 굳게 믿는다. (내 경험이지만) 실제 친구 간 혹은 동료 간의 인간관계에서 유난히 고 씨가 완강한 고집을 가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왕왕 있는 게 사실이다. 선입견일지 모르지만.

신화 혹은 전설이라 하나, 탐라국 개국 성씨 곧 국성(國姓)인 고‧양‧부 삼성에는 독특한 성품이 있는 것처럼 회자돼 오는 점이 눈에 띈다. 사진은 삼성혈.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신화 혹은 전설이라 하나, 탐라국 개국 성씨 곧 국성(國姓)인 고‧양‧부 삼성에는 독특한 성품이 있는 것처럼 회자돼 오는 점이 눈에 띈다. 사진은 삼성혈.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호쏠만 허민(조금만 하면) ’밸딱’ 잘 하는 부 씨 성도 그렇거니와, 자그마치 한 왕조의 시조였던 조상으로서 국성이라 DNA가 분명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건 혼자의 편견일지 모르긴 하다. 양 씨 성 가진 이들 밸딱, 고 씨 성 가진 이들에게 ‘고집’이 세다 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삼성 중 ‘부’ 씨 성이 빠졌다. 고 씨와 양 씨에 비해 부 씨는 특별히 끄집어낼 성향이 없었던 모양이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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