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교사를 위한 놀이 수업] 9. 누가 내 머리에 책 쌓았어, 온몸이 스케치북

몰래 찍힌 사진 한 장을 보고 놀이를 떠올리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 있습니다. 놀이도 똑같은 것 같죠. 놀이가 놀이를 벌죠. 무슨 말일까요? 책이란 게 전염성이 강합니다. 독서방법론의 어록 중에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른다면 어떤 책이든 한 권 잡고 읽어보라. 자연스럽게 다음 책이 떠오를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가 한 말이죠. 어린이들과 책 놀이를 하다 보면 오고 가는 대화와 장난 속에서 책 놀이 힌트가 번쩍 뜨일 때가 많습니다. ‘누가 내 머리에 책 쌓았어’(그림책 젠가)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제가 놀이 수업 중에서 쉬고 있었는데 한 녀석이 제 휴대폰을 슬쩍 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다른 녀석은 제 머리 위에서 그림책을 쌓고 있었습니다. 일단 쌓기 시작했기 때문에 엎어지지 않게 집중을 했습니다. 그 장면이 찍힌 사진을 쳐다보며 한참 웃었습니다.

웃다 보니 놀이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젠가 게임은 쌓아놓은 나무 막대기를 하나씩 빼는 놀이입니다. 그림책 젠가는 거꾸로 머리 위에 책을 하나씩 쌓고 가장 많이 쌓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입니다. 팀별 놀이와 개인전 모두 할 수 있는데, 1명은 ‘빌레’ 역할을 하고 1명은 ‘선수’ 역할을 합니다. 빌레란 너럭바위의 제주어로 ‘지면 또는 땅에 넓적하고 평편하게 묻혀진 돌’을 뜻합니다. 넓적한 돌처럼 책을 잘 쌓을 수 있게 하는 역할이니 ‘그림책 젠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이 놀이는 쌓기 놀이 중에서도 두 개의 집중력이 한꺼번에 요구되므로 집중력 훈련으로 아주 좋습니다. 빌레 역할을 한 사람은 머리 위의 감각으로만 책이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고 웃어서도 안 됩니다. 빌레 역할을 제대로 못하면 교체할 수도 있습니다.

▲ 놀이 수업 중 쉬고 있는데 몰래 다가와 모자를 씌우는 어린이가 담긴 사진을 보고 만든 ‘그림책 젠가’에는 헨렌 옥슨버리의 '쾅글왕글의 모자'가 딱 어울립니다. 제공=오승주.

어린이들과 장난을 치다가 번쩍인 놀이

어린이들은 뭔가 화끈한 것을 좋아합니다. 아무래도 어른이 만든 놀이이기에 어린이 입장에서는 밋밋할 때가 있습니다. 그 중 몇몇은 양념을 묻히기도 하죠. 이 과정에서 신기한 놀이가 많이 만들어집니다. ‘온몸이 스케치북’ 놀이도 그때 만들었습니다. 온몸이 스케치북은 어른들에게는 당황스러움 그 자체일 테지만, 어린이들에게는 흥분 그 자체입니다. 온몸을 스케치북으로 사용하는 놀이입니다.

집에서 못 쓰는 옷을 입고 옵니다. 하얀 광목을 준비해도 좋습니다. 손에 물감을 발라 옷에다가도 그리고 광목에다가도 그립니다. 마치 행위예술처럼 스케치북이 아닌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립니다. 이 놀이를 만들면서 ‘디오니소스 축제’를 떠올렸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는 아기 때 사지가 갈기갈기 찢겼다가 기적적으로 부활했다고 합니다. 디오니소스는 주신(主神), 즉 ‘술의 신’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축제의 오리지널 버전은 잔인했습니다.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은 포도주를 진탕 마셔대면서 밤마다 들판을 헤집고 다닙니다. 흥에 겨워 쏘다니다가 염소나 황소, 또는 아기를 같은 디오니소스의 상징물을 만나면 그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렸죠. 하지만 너무나 무지막지한 의식이기에 반대가 많았습니다. 한 그리스인이 당시 문명국인 이집트를 여행하다가 오시리스 신의 수난극을 관람한 후 새로운 디오니소스 축제를 만들었는데 우리의 전통놀이인 ‘차전놀이’와 유사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부담스러운 축제를 왜, 그것도 세계 여러 곳에서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의 억압된 열광과 흥분을 분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흥분과 열광은 어린이에게도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놀이에서 흥분과 열광을 표현할 수 있다면 일상생활은 훨씬 차분해지기도 합니다.

온몸이 스케치북 놀이를 만든 배경은 이렇습니다. 물감결혼식 놀이( 세 번째 글 ‘색깔과 실컷 노는 어린이를 꿈꾸며 만든 놀이’, 7월 20일 기사 참조 )가 끝나고 뒷정리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한 어린이가 양손을 붓으로 만들었습니다. 물감을 잔뜩 묻혀서 색깔로 칠했습니다. 아래 깔린 하얀 광목은 물감 흘릴 것을 대비해서 깔아놓은 건데 아이의 눈에는 커다란 스케치북처럼 보였나 봅니다.

어린이들과 함께 큰맘 먹고 도전한다면, 흥분과 열광에 사로잡힌 어린이의 표정과 놀이 후에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승주는?

1978년 제주 성산포에서 나고 자랐다. 제주대에서 국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2003년부터 10여 년간 서울 강남에서 입시컨설팅, 논구술 특강 등의 일을 하다가 대한민국 입시구조와 사교육 시스템에 환멸감을 느꼈다.

이후 언론운동과 시민정치운동, 출판문화운동, 도서관 운동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변화의 힘은 가정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족의 끈이 이어지게 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 소홀했던 가정이 무너지기 직전, 아이의 간절한 외침 소리를 들었기 때문.

2013년 《책 놀이 책》을 써 아이와 부모를 놀이로 이어 주었고, 3년간의 공부방 운영 경험과 두 아들과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썼다. 아빠 육아, 인문고전으로 아이 깊이 읽기로 가족 소통을 꾀했다.

현재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공자의 논어》,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사마천의 사기》를 집필 중이며 아주머니와 청소년을 작가로 만드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글쓰기·책쓰기 강사로서 지역 도서관과 활발히 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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