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간·소리 공동기획-포토파일] ⑤ 역사·경관·기억의 장소로 거듭나야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올해 2019년이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공동기획 <하간+소리: 포토파일>을 마련했다. 과거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년)을 계기로 다른 모든 아시아 나라보다 앞장서서 서구의 제도와 학문을 도입하며, 세계를 향한 정복의 야욕을 품게 된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일본의 시선은 자신과 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들에게 향한다. 그 세력들 중 일부 일본인 학자들은 다양한 민족들이 사는 나라 및 지역으로 가서 그들이 원하는 학문이론(지리학, 인류학, 고고학, 민족학, 민속학, 언어학 등) 정립과 유포에 공을 들이기도 했다. 당시 이들 분야에 뛰어든 일본인 학자들은 군사력까지 동원하며 현지 조사를 단행했고, 필요에 따라서는 탈맥락적·탈역사적인 연출·분장을 요구하며 해당 민족의 지리, 관습, 민속, 제도, 일상생활 등을 조사·촬영했다. 이처럼 20세기 전후 일본의 아시아 침략·수탈 정책은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 민족 현지 학술조사를 토대로 그 수법이 날로 고도화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조사 대상지에는 제주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제주기록문화연구소-하간(대표 고영자) + 제주의소리 공동기획 <하간+소리: 포토파일>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조사·촬영된 당시 제주도 사진들 중 시사성이 짙고, 기록적 가치가 있는 것들을 추려 당대 제주도를 다각적으로 접근, 재조명할 목적으로 마련됐다. [필자·편집자 공동 주]

제주시 산지천 일대는 제주 역사에서 오랜 세월 동안 회자되어 온 역사의 현장이다. 특히 산지천 동쪽 금산(禁山: 나라에서 관리하며 출입을 금하고 벌목을 금했던 곳) 기슭에는 조선시대 구축된 방어진지(성담)를 비롯하여 풍부한 용천수, 울창한 수림, 그와 어우러진 정자(공신정)와 배움터(삼천서당) 등이 들어섰던 터였다. 그야말로 자연경관과 문화경관이 어우러졌던 제주의 대표적인 명소다. 

이를 증명하듯 이 일대는 20세기 초반부터 사진과 엽서, 글, 기록화 형태로 전해지고 있어, 제주의 다른 어떤 곳과 비교해도 이곳 장소성(제주성내 유일의 절경지)의 상징과 울림은 남다르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읍성철폐령과 함께 그곳을 두르고 있던 성담이 헐리거나 용도 폐기된다. 또한 그 자리엔 종래 금산(禁山)이라는 의미가 무색할 정도로 전통경관이 사라지고 측후소 및 관사 건물, 공장부지, 제주신사 등 신식 구축물들이 들어서게 된다. 시대적 요구에 따른 나름의 새로운 ‘이념의 구축물=문화경관’이 탄생한 셈이다. 

# 제주도사(島司) 마에다젠지(前田善次)

일제는 1915년 5월 1일 칙령 제66호로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를 개정, 동 일자 총독부령 제44호로 ‘도(島)의 명칭·위치·관할구역’을 발포하였다. 제주도(島)와 울릉도(島)에 도제(島制)가 새로이 실시되었다. 이로써 1915년에 군수를 폐하고 지금의 도지사 격인 도사(島司)의 관제가 시작되었다. 도사는 제주군 행정과 경찰행정, 제주도 농회장, 해녀조합장, 산림회, 수산회, 농회지부장까지도 겸직하여 전권을 행사하는 지위였다. 도제(島制)가 실시된 이래 일본이 패망한 1945년까지 30년 동안 제주도사를 역임한 자는 총 10인으로 모두 일본인이었고, 평균 재임기간은 3년 정도였다.

이들 도사 10인 중 제3대 제주도사 마에다젠지(前田善次, 재임기간:1923년 5월~1928년 7월)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도사 재임기간은 총 5년 2개월. 제주도사로서 최장기간 재임했고, 당시 제주도 행정과 도시설계에 지대한 영향은 끼쳤던 인물이다.

그의 재임기야말로 제주성내 생태 전통경관이 사라지고 철제 콘크리트 도시경관이 탄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관덕정 수리(1924년, 신작도 개설 차 도로에 저촉된다하여 관덕정 처마를 줄이고 건물의 사면에 문을 달고 도색)를 비롯하여, 제주성 정비도 동시에 있었다. 또 성담을 헐어서 나온 돌로 바다를 매립하면서 산지항 확장공사가 이루어졌다(1925년~1928년). 1924년에는 제주~일본 항로(시모노세키~오사카)가 개설되기도 하였다. 

[사진1] 1930년대 제주시 산지천과 산지교 주변 풍경. 제공=고영자. ⓒ제주도 발행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2≫(2009년)
[사진1] 1930년대 제주시 산지천과 산지교 주변 풍경. 제공=고영자. ⓒ제주도 발행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2≫(2009년)

뿐만 아니라 [사진1](빨간색 □ 구역)에서 보는 것처럼, 산지천변 금산을 에워싼 제주성 동북치성 위로는 제주측후소가 건립(1923년, 현 기상청)되고, 남쪽으로는 관사 2동 들어선다. 바로 옆으로 제주신사(파란색○) 건물도 보인다. 이 모두가 마에다 도사 재임기에 벌어진 일이다. 이번 글에서는 이 제주신사를 둘러싼 의문을 조금 풀어볼까 한다.

# 제주신사(神社/神祠)

[사진1] 제주신사 건물은 1929년에 완공되었다. 스즈끼·효사쿠(鈴木兵作) 제4대 도사가 막 부임한 후였다. 그런데 1928년 마에다젠지 도사 재임 때 제주신사 부지를 선정하여 공사에 착수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28년 제주신사 공사 착수 시기를 알 수 있는 단서로 총독부 기수(技手) 겸 토목기사 가지야마·아사지로(梶山浅次郎)의 <제주도기행>(≪조선≫, 1928년 9월호, 조선총독부 발행)을 들 수 있다. 이 기행문은 마에다 도사 재임 끝 무렵에 가지야마가 제주도를 방문(1928년 5월24일~28일), 산지천 일대를 비롯하여 산지항 공사 현장 및 한라산 중턱 표고버섯 재배장 등 시찰한 내용을 실은 것이다.

기행문에는 특히 [사진1] 현장 방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고 있다.

"산지천 동쪽 용천수가 솟는 산 위의 측후소를 향하였다. 측후소가 있는 곳을 보니 적백(赤白)색의 신호대와 안테나 등이 꽂혀있었다. 절경이 펼쳐질 듯하여 산을 오르니 측후소 정원에 다다랐다. 서측으로 '대신궁(大神宮)이 들어설 것이라 하며 땅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보니 성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우선 대신궁(大神宮)이라는 표현이 흥미롭다. 어떤 종교나 마찬가지로 일본 신도(神道)에도 신의 성격이나 관리 주체에 따라 그 서열이 다르고, 그 다름을 명칭으로 엄격하게 차별화하고 있다. 다양한 명칭을 대략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는 시설은 신궁(神宮), 조선총독부가 직접 관리 감독을 맡은 시설은 신사(神社), 읍·면 단위 관리 봉행시설은 신사(神祠) 등이다. 이들 명칭은 총독부가 공표한 ‘신사사원(神社寺院)규칙’(1915년)과 ‘신사(神祠)에 관한 건’(1917년)에 따라 정해졌다. 신궁(神宮)과 신사(神社)의 경우는 신의 성격이나 건물 규모, 배치까지 엄격한 기준에 맞아야 그 지위를 부여받는 반면, 신사(神祠)의 경우는 제사와 의식을 하는 상징공간이기는 하지만 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엄격한 규정은 없었다. 이 외에 더 작은 단위인 학교 등에 마련된 봉안전(奉安殿), 각 가정에 가미다나(神棚)라는 신단으로 이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산지천 금산 기슭에 대신궁(大神宮)이라는 표현은 방문자 아사지로의 과장된 수사인지, 아니면 당시 마에다 도사의 원대한 포부였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제주신사(神社/神祠)의 설립배경과 허가 과정이 궁금한 이유다.

[사진2] 1929년 제주삼림(森林)조합 및 총독부 발행 책자에는 ‘濟州神社’라고 표기된 것이 보인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1928년 5월에 대신궁(大神宮) 건립을 위해 땅고르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 ‘濟州神社’라는 명칭으로 첫 선을 보이게 된 셈이다. 이 과정에서 이 터의 원주인, 전통 조선식 문화경관을 대표해 오던 공신정은 헐려 주춧돌만 남게 된다.

[사진2] 제주삼림조합 발행 ≪제주도사진첩≫(1929년4월) 및 조선총독부 발행 ≪생활상태조사(其二): 제주도≫(1929년12월). 제공=고영자. ⓒ제주의소리
[사진2] 제주삼림조합 발행 ≪제주도사진첩≫(1929년4월) 및 조선총독부 발행 ≪생활상태조사(其二): 제주도≫(1929년12월). 제공=고영자. ⓒ제주의소리

한편, 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1931년 스즈끼(鈴木) 도사 외 93명은 제주읍 신명신사(神明神祠) 설립의 건을 출원하여, 그 허가가 동년 12월 1일 내려졌다는 기록이 있다(<조선총독부 관보>, 1931년 12월 7일, 제1476호).

말하자면, 1928년 5월 즈음 대신궁(大神宮) 창립이라는 마에다 도사의 원대한 야망(?) 속에 공사에 착수, 이듬해 건립되어 사진으로 ‘濟州神社’로 소개되었던 것이 1931년 12월 1일 제주읍 신명신사(神明神祠)로 결국 설립 허가가 난 것으로 보인다. 총독부가 정한 신사(神社) 기준에 미치지 못하였는지 당시 읍·면 단위 1 신사(神祠) 원칙에 따라 결국 ‘제주읍 신명신사’로 등록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진2] 속 ‘제주읍 신명신사’가 1930년도 중반에 제주신사(濟州神社)로 격상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단서가 없지 않지만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 총독부 산하 조선 땅에 설립 허가된 신사의 수는 총 1049곳으로 알려져 있다(신궁2곳, 神社가 82곳, 전국 읍·면단위 神祠가 967곳). 대부분 태평양전쟁과 맞물린 시기인 1939년~1940년경 황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설립된 것들이다. 

이중 전라남도에 속했던 제주도는 1읍 12면 체제로 적어도 14개의 신명신사(神明神祠)가 건립되었음이 지금까지 확인된다(이 중 구좌면의 경우는 2곳(세화·김녕)에 설립됨). 제주읍 신명신사를 제외한 제주도 12면 소재지 13곳 또한 태평양전쟁과 맞물린 시기에 설립된 것들이다. 

그런데 산지천 변 금산 기슭 제주신사는 전국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10년 빠른 시기에 설립·허가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20년대~1930년대 초반, 제주성내엔 일본인 마을이 이미 형성되어 등록된 일본인 거류민만 해도 700여명에 달했다. 정치·행정·교육제도는 물론 종교문화 마저도 일본식으로 장악되고 주입되면서 제주성안의 도시경관은 일본인들에게 편리하고 익숙한 그것으로 한창 개조되던 ‘전성기’였다. 

[사진1] 속 콘크리트로 개수한 산지교 등장 자체도 그렇고, 그 위를 자동차 및 자전거가 달리고, 기모노 입은 여인들이 걸어 다니는 모습들. 그뿐인가? 금산 기슭에 보란 듯이 자리 잡은 견고하고 야릇한 구조물들은 천변 일대를 호령하며 일본인들에게는 우월감과 안도감을 주고, 도민들에게는 낯섦과 박탈감을 안겨주던 부와 권력의 상징물로 작용했을 것이다.

# 해방 직후 신사 건물 파괴, 그 이후……

해방을 맞자마자 제주읍 산지 청년들이 제주신사를 파괴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한라연감>154/≪제주실록≫).

[사진3] 1950년대 산지교와 산지천의 항아리 장사배. 제공=고영자. ⓒ제주시 발행 ≪제주성총서 濟州城≫(2015년).
[사진3] 1950년대 산지교와 산지천의 항아리 장사배. 제공=고영자. ⓒ제주시 발행 ≪제주성총서 濟州城≫(2015년).

[사진1]의 경관은 불과 20~30년 사이에 [사진3] 경관으로 변모했다. 빨간색 사각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좌측 측후소와 관사 건물 2동은 그대로이지만, 신사 건물 자리엔 첨탑이 솟은 교회 건물(제주 최초의 감리교 교회, 제주중앙교회)이 들어선 것을 볼 수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로 피난 왔던 도인권 목사와 교인들이 신사 자리에 임시 피난민 교회인 제주읍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다가 그곳 부지를 정부 부처로부터 사들여 교회 건물을 신축한 것이다. 1950년대 중반 풍경이다. 항아리 장사배가 정박해 있는 산지교 아래 풍경도 이색적이다.

일제강점기 산지천 일대의 개발 붐은 해방 후, 더욱 속도를 내어 다양한 얼굴을 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진4] 어느새 부터인가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산지천 아래서 금산 기슭의 풍경을 관망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또한 시대적 요구에 따른 새로운 ‘이념의 구축물=문화경관’의 탄생이런가, 하면 그만일까?

[사진4] 2019년 9월 4일 산지천 풍경 ⓒ제주의소리
[사진4] 2019년 9월 4일 산지천 풍경. 건축물 등 주변 풍경은 옛 사진 속 모습과 확연히 달라졌지만 산지천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제주의소리

하지만 돌이켜보면, 얼마 전 제주지방기상청 신청사 준공(2015년)을 앞두고, 옛 공신정 터에 신청사 건립 계획을 발표하자, 도내 학술단체 및 문화계 인사들이 극심하게 반발하여, 결국 기상청 측은 공신정 터에서 벗어나 청사를 신축, 그 결과 공신정 터는 살아남아 있음은 새겨볼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후 이 터(옛 공신정 터→제주신사→감리교회→?)에 어울리는 활용 방안과 실천은 제자리걸음 수준이다.

비록 과거 산지천변 금산 기슭 공간의 경관적 조망은 불가능해졌지만, 그럼에도 ‘장소성’에 방점을 찍어 제주시 '역사·경관·기억'의 장으로 보존하고 활용하는 방안은 계속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조선시대 전통경관으로의 막연한 회귀가 아니라, 근현대사도 아우르며 그곳의 장소성을 이야기로 엮고, 전하고, 걸음으로 느끼면서 말이다……. / 제주기록문화연구소-하간 고영자(미학자·번역가)

"무서웠던 일본군 위문 공연...일본 선생과 신사 갔던 기억도"
[인터뷰] 제주향토음식 명인 김지순(84) 선생

제주 음식을 알리는데 앞장선 인물을 꼽자면 김지순(84)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2010년 제주도 지정 초대 ‘제주향토음식 명인’으로 이름을 올렸는데, 그의 아들 양용진 씨(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장) 역시 요리사의 길을 걸으며 제주 음식 문화를 앞장서서 알리고 있다. 

가을 장마비가 세찬 비를 흩뿌리던 4일 오전, <제주의소리>는 제주시 노형동에 있는 ‘김지순 요리제과직업전문학원’에서 선생을 만났다. 고풍스러운 서체로 빛바랜 채 걸린 ‘김지순 요리학원’ 간판과 그 보다 더 오랜 목재 한문 간판은 지난 역사를 실감케 했다. 비 날씨에도 불구하고 학원 실습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강사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기였던 1936년 제주에서 태어나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제주북국민학교(현 제주북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앞선 유년 시절에는 무근성 ‘글청’(서당)과 서부교회 유치원을 다니며 글과 말을 익혔다. 이후 제주여자중학교(6회), 제주여자고등학교(3회)를 차례로 거친다.

선생은 “예전만 해도 결혼해서 잘 만 살면 된다고 알았다. 요리학원은 생각도 못했다. 돌이켜보니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것 같다”고 소박하게 밝혔다.

일본을 오가며 생활했던 할머니·어머니와의 추억, 해방 전 제주에 주둔했던 일본군 대상 위문 공연과 지금도 생생한 ‘별사탕’의 맛, 그리고 일본인 교사 손에 이끌려 산지천 인근 신사에 방문했던 기억까지. 지금은 까마득한 옛 일이 돼 버린 ‘제주성안’에서의 추억을 생생하게 들려줬다. 

4일 본인 학원에서 인터뷰 중인 김지순 선생. ⓒ제주의소리
4일 김지순 요리제과전문학원 집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김지순 선생. ⓒ제주의소리

Q. 제주북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이야기를 들려 달라.

당시만 해도 초등학교에 입학하려면 시험을 봐야 했다. 첫 시험을 떨어지고 두 번째 돼서야 합격해 입학했다. 기억하기에 입학시험 면접 당시 내가 어떤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 학교에 있는 교사 모두 일본인들이었고 당연히 면접시험도 일본어로 치렀다. 불합격하고 나서 어머니가 직접 1년 동안 내 일본어 과외를 도맡았다. 

어머니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셨다.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께서 일본으로 건너가 방직회사에서 일했다. 어머니는 일본 현지서 중학교까지 다니고 제주로 돌아왔다. 결혼해서 나를 포함해 자녀를 낳고 살다가 밀항해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어머니는 '기계 편물'(機械編物)을 배우고 제주로 가져왔는데 제주에서 1호 기계 편물이었다. 할머니도 오사카 방직회사에서 미싱(재봉틀) 기술을 익히시고 제주로 들여 왔었다. 두 분의 좋은 손 솜씨를 물려받은 것 같다. 두 번째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나서는 어머니가 일본 중학교 때 입었던 세라복을 줄여서 입고 갔다. 지금도 사진이 남아있다. 

Q. 학교 생활은 어땠나? 

북초등학교에서 다닐 때 ‘이라구치’라는 여자 일본 선생이 있었다. 어머니와 소통이 잘 됐는지, 선생 집에서 지내면서 공부도 했다. 학생들 가운데는 오라동인데 (학교 근처) 제주시에서 자취하면서 다닌 아이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학교가 ‘북교’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남초등학교는 주로 일본 사람들이 다녔다. 학생 수도 적었고 해방이 되니 쓱 가버렸다. 

기억에 남는 일은 위문 공연이다. 전쟁이 끝나기 전만 해도 일본군인들이 제주도에 있었다. 남초등학교 일본아이 몇 명에 나까지 포함해 5명 정도가 군인 위문 공연을 다녔다. 입학하자마자 1학년 때였는데 무용 공연을 했다. 선생이 가르쳐준 대로 배웠는데 잘 봐서 껴준 게 아닌가 싶다. 차를 타고 굴속에도 가고 그랬다. 한 학기에 8~9번은 다닌 것 같다. 군인들이 무섭기도 했지만 공연마다 주던 건빵 속 별사탕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어떤 음악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아도 별사탕은 잘 기억난다. (웃음)

Q. 신사에 가본 적이 있나?

한번 갔던 기억이 난다. 담임선생을 따라 나포함 5명 정도가 함께 갔다. 산지천 위에 있었는데 일본말로 ‘도리(鳥居)’라고 부른 기다란 문을 봤다. 신사 구조가 어땠는지, 절은 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신사 위로 쭉 올라가는 계단이 꽤 높아서 올라갈 때 무서웠다. 신사 옆에 일기 예보하는 측후소도 있었는데 우리는 ‘천기당’이라 불렀다.

Q. 요리 전문가로 활동하게 된 배경은 할머니, 어머니 집안 영향이 큰 것 같다?

어머니의 손재주가 참 좋았다. ‘간단후꾸’(원피스)도 직접 만들어 입혀줬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내가 중·고등학생 때만 해도 제주 여자들이 새 옷을 자랑하려면 관덕정에서 칠성통까지 걸어갔다. 대부분 새 옷은 어머니가 손수 해줬다. 일본산 식기도 집에 많이 남아있어서 자연스레 (요리를) 보고 자란 것 같다. 몇 년 전까지 오사카에 가서 재일제주인 1세대들에게 제주 음식을 해드렸다. 가족 중에 제주 사람, 한국 사람이 있는 일본인도 많이 배우러 온다. 내가 끓인 몸국을 먹고 고향이 생각난다며 울먹거리던 노인을 잊지 못한다. 일본에서 낸 제주 음식 책도 보람된 일 가운데 하나다.

Q. 옛날 제주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주로 먹었나?

간단하다. 밥과 국. 그리고 쌈이다. 제주사람들은 젓갈과 된장으로 쌈을 자주 먹었다. / 인터뷰 = 한형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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