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숙 시인, 등단 12년 만에 《발가락 낙관》 발간

제주 시조시인 김영숙은 최근 첫 시조집 《발가락 낙관》(글상걸상)을 펴냈다. 등단 12년 만에 내놓은 소중한 책이다.

김영숙은 스스로를 제주의 딸, 한라산의 여인이며 어머니, 며느리, 땅을 품고 사는 농부이자 시인으로 소개한다.

흡사 본인 아이처럼 느낄 첫 시집에는 60여편의 작품이 실렸다. 김영숙은 “햇빛도 느리고 바람도 느리고 사람도 느린 서귀포, 이곳에서 나고 자라고 아이 낳고 지금도 살고 있다. 사철 아웅다웅 실랑이하며 살아가는 귤나무들은 제게 숙제와 위안과 먹을 것을 안겨준다. 다붓다붓 제비꽃들을 차마 뽑지 못하고 못 본 척 돌아서는 얼치기 농부다. 일 년에 세 번쯤 제주 바람을 베고 누워 눈물을 찍는다. 그 때 가끔” 쓰는 작품들이라고 소개한다.

발가락 낙관
김영숙 

볕 좋은 주말 아침 운동화를 빠는데
물에 불린 깔창 두 장 비누칠 하다 보니
과묵한 열 개의 눈이 나를 빤히 보지 뭐야

아무 일, 아무 일, 없다고 모닝키스 해놓고선
구조조정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 믿지, 큰소리치며 출근 인사 해놓고선

몇 번이나 참을 忍자 마음에 새겼으면
이 깊은 동굴에 와 낙관을 찍었을까
지렁이 울음소리로 혼자 눈물 삼켰을까

제철 조기 찌개 끓여 한라산 올린 밥상
못하는 술이라도 한두 잔 부딪히자
낮술의 힘을 빌려서 고백할까 당신 최고!

승미야
김영숙

“먼저 가 기다릴게”
국화 향 같은 인사

아무 말도 못하고
잡은 손만 떨었지

한 뼘이
모자라 아린
바다에 내리는 눈,
승미야

김동윤 문학평론가(제주대 교수)는 책 소개에서 “함경도에서 온 새터민 리씨, 혼자된 영남이 어멍, 평화공원의 창천리 고씨 할머니, 씨 멜족 당한 임씨 일가, 캄보디아 착한 며느리, 눈 밑 멍이 든 친구, 혼자 눈물 떨구던 소녀가 ‘짭조름 사는 이야기’로 말을 걸어온다. 정갈한 정형의 맛깔을 김영숙 시인은 참으로 멋들어지게 읊조린다”고 호평했다.

시인은 소개의 글에서 “제 생의 시간표에는 없었던 시의 길로 들어서서 오늘 첫 시집을 엮는다. 처음 이 길에 들어섰을 때 사람 사는 이야기를 쓰겠노라 나에게 약속했다”며 “하루하루를 소금꽃 피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웃들의 눈물과 웃음이 꽃으로 피어날 때 그 꽃들을 슬쩍 훔쳤다. 제가 그랬듯 제 시 한 편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거나 용기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욕심일까?”라고 밝혔다.

《발가락 낙관》은 ‘글상걸상’의 모든 시집처럼 가내수공업(家內手工業)으로 만들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제주도, 제주문화예술재단의 기금을 지원 받아 발간됐다.

75쪽, 글상걸상,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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