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35. 외바늘귀 떨어져 나가기 쉽다

* 웨바농코 : 외바늘귀
* 톧아지기 : 떨어지기, 떨어져 나가기

운명은 반드시 필연인가, 아니면 우연이기도 한가. 인과율에서 어떻게 보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선 깊이 들어가지 않기로 한다.

한데 필연, 우연을 떠나 단 하나뿐이라 더욱 애지중지 아끼던 것이 상하는 수가 적지 않다. 귀한 연장이 못 쓰게 돼 버린다든지, 한순간에 아끼던 그릇을 깨뜨린다든지 하는 예가 좀 많은가. 더욱이 금쪽같던 아이를 잃거나 함에 이르기도 한다. 

옛날 아낙들 손에 드는 것 가운데 제일 귀하던 것이 바늘이다. 못 살던 시절엔 바늘 여러 개를 가진 여인이 별로 없었다. 오직 하나, 그것도 어찌어찌 이런저런 경로를 거치면서 수중에 넣게 된다.
  
그 소중한 것으로 이불을 호고, 남정네 두루마기와 바지저고리를 만들었다. 해진 양말을 깁고 뜯어진 앞섶을 꿰맨다. 재봉틀이 없던 시절에 바늘은 옷을 만들고 수선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여인의 도구였다.

바늘의 생명은 귀(코)다. 위 끝 부분에 보일 듯 말 듯 뚫려 있는 작은 구멍. 거기에 실을 꿰어야 비로소 바느질을 할 수 있다. 그래야 한 땀 한 땀 떠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한데 어쩌다 그만 바늘귀가 떨어져 나가 버렸다. 각별히 주의해 다루다가도 그렇게 된다. 아뿔싸, 바늘이 쓸모없게 돼 버렸지 않은가. 귀 떨어진 바늘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다. 공교롭게도 무엇에 부딪히거나 하면 부지불식중 바늘귀가 걸려들어 떨어지고 마니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외바늘’ 자체 개념으로도 쓰였기도 하지만, 실은 외바늘을 인간사에 빗댔다. 그럴싸한 비유다. 외바늘은 단 하나뿐인 바늘, 사람으로 치면 곧 외동아들이다.

단 하나뿐인 아들, 독자인 사람, 애칭으로 ‘외동아들’이라 한다. 독자보다 이 말이 더 많이 쓰인다. 일반적으로는 무녀독남(無女獨男)이란 의미로 사용되며, 실제로도 그런 예를 떠올리게 되지만 부차적 의미가 있다. 딸자식이 여럿이되 아들이 한 명만 있는 경우도 외아들에 해당된다.

‘외바늘’ 자체 개념으로도 쓰였기도 하지만, 실은 외바늘을 인간사에 빗댔다. 그럴싸한 비유다. 외바늘은 단 하나뿐인 바늘, 사람으로 치면 곧 외동아들이다. 출처=pxhere.
‘외바늘’ 자체 개념으로도 쓰였기도 하지만, 실은 외바늘을 인간사에 빗댔다. 그럴싸한 비유다. 외바늘은 단 하나뿐인 바늘, 사람으로 치면 곧 외동아들이다. 출처=pxhere.

부부의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기 위해, 혹은 맞벌이 등의 이유로 자식을 하나만 낳는 경우가 늘고 있다. 따라서 외아들 역시 늘어나는 추세다. 이것은 이웃 일본도 마찬가지라 한다.

잘못된 일반화의 오류가 있다.

주변에서 오냐오냐 해 주며 온실 안의 화초로 자라났기 때문에 어리광쟁이에 버르장머리가 없다느니, 형제자매 없이 혼자 자라 이기적이라느니….
  
이런저런 근거 없는 편견의 대상이기도 하나, 절대로 무근거한 그릇된 생각에 불과하다. 당사자에게 굉장히 실례가 될 수 있다. 어떤 성격으로, 어떤 인품으로 자라느냐는 부모가 어떻게 양육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부모가 두드러지게 조악한 교육을 시키지 않는 이상 그렇게 무례하거나 모난 인간이 되지 않는다. 똑같이 이기적으로 보이는 언행을 해도 형제자매가 있는 사람에게는 ‘못됐다’라 하는 데 그치는 반면, 외동아들에게는 ‘외아들이라 저런다’라 하기 일쑤다.

그보다 더 슬프고 안타까운 예를 많이 본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외동아들이 불행한 일을 당하는 수가 많지 않은가. 물놀이 갔다 익사한다든지, 중고교 생으로 성장한 아이가 단체 활동을 하다가 잘못되는 경우 등등.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외동아들, 이런 참척(慘慽, 부모보다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남)의 슬픔이 어디 있을까. 외동아들이라 더 드러나는 건지 모르나 아들 하나 두었다 참혹한 슬픔에 잠기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적어도 둘은 두라고 해서, 며느리에게 신신당부하곤 했다. 

“낳는 짐에 벗 호나만 더 붙이라.”

선견지명이 아닌가. 
 
‘웨바농코 톧아지기 쉽다.’ 

하나만 가졌다 귀 떨어지면 못 쓰게 되니 조심히 다루라. 이왕 가질 바엔 둘은 가져야 안심 된다 한 것이다. 수긍이 간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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