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식 제주해녀 발전포럼 기조연설 “고순효, 김계석 독립유공자 선정돼야”

20일 열린 제주어업 보존·발전 포럼 및 전국해녀 교류행사 모습. ⓒ제주의소리
20일 열린 제주어업 보존·발전 포럼 및 전국해녀 교류행사 모습. ⓒ제주의소리

해방 전까지 근대 제주사회의 실질적인 경제를 책임지고 일제강점기 항일 투쟁에 발 벗고 나선 존재. 바로 해녀다.

제주학연구센터는 20일 메종글래드 제주호텔에서 ‘제주어업 보존·발전 포럼 및 전국해녀 교류행사’를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제주에서 활동하는 해녀뿐만 아니라 부산, 거제·통영, 울산 등 출가 해녀 47명도 참석해 친교를 나누는 시간이 됐다. 제12회 제주해녀축제의 일환이기도 하다.

기조연설(제주근대사를 통해 바라본 제주해녀의 위상)에 나선 박찬식 전 제주학연구센터장은 “제주 해녀가 근대 시기 제주사회의 생계와 경제를 책임졌다”고 강조했다.

박 전 센터장은 19세기 말 제주 해녀들이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제주 안팎에 존재한다고 봤다. 일단 제주 안에서는 일본 어민들이 제주도 연안으로 본격 진출하면서 어장이 황폐화됐고, 밖으로는 한반도 남해안에서 제주 해녀들의 수요가 늘어났다. 이는 우뭇가사리의 가치가 점차 커지는 산업 구조와 밀접하다.

우뭇가사리는 공업화 과정에서 식품, 공업, 의약, 학술연구 등 다방면에 쓰였다. 식품은 양갱, 젤리, 크림 등을 만드는데 사용했다. 공업은 활용 분야가 더 넓은데 견직물의 풀, 의류 마감, 천·종이 등 방수, 양조, 인쇄 등에 쓰였다. 여기에 건축용 자재로 활용한 가사리, 화약과 요오드의 재료인 감태까지 포함해 여러 해조류가 일본으로 수출됐다.

박 전 센터장은 “일본의 해녀 ‘아마’도 있었지만 일본보다 낮은 남해안 수온, 조업 시간의 차이, 체재비 등을 고려할 때 상인들은 제주해녀를 선호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이유로 1910년 이전 500명에 불과했던 제주 출가 해녀는 1915년 2500명, 1932년 5078명, 1937년 4402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송금액은 1915년 5만~8만원에서 1932년 110만원으로 증가폭이 더욱 컸다.

박 전 센터장은 “당시는 제주 여성 인구 10%이 해녀가 되는 사회구조였다. 덕분에 제주지역 현금 보유량이 증가했고 소비 규모도 증대했다. 제주 해녀가 제주 사회의 생계와 경제를 담당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강조했다.

20일 열린 제주어업 보존·발전 포럼 및 전국해녀 교류행사 모습. ⓒ제주의소리
기조 연설하는 박찬식 전 센터장. ⓒ제주의소리

그러나 출가 해녀들의 삶은 고단했다. 현지 어업인과의 입어권 분쟁, 해녀들의 채취량과 가격을 속인 객주(客主) 등 때문이다. 1920년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이 탄생한 이유가 바로 해녀들의 권익 보호와 신장을 위해서다. 다만, 1925년 해녀입어협정 체결로 제주 출가 해녀들은 제주해녀조합 뿐만 아니라 지역의 어업조합에도 의무적으로 가입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출가 해녀들이 고향을 떠나 타 지역에 정착해야만 했다.

박 전 센터장은 “1920년대 후반 이후 해녀조합은 조합장인 일본인 제주도사(濟州島司)가 해조회사와 일본인 상인에게 유리하게 운영하며 어용화돼 갔다”면서 “해녀조합은 소수의 일본인 상인이나 조선인 중간상인과 결탁해 생산자의 자유 판매를 금지하고 생산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정가격을 매겨서 수탈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해녀들의 불만은 고조돼 해녀조합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고, 결국 1932년 구좌·성산 지역을 중심으로 해녀투쟁이 발발하게 됐다”면서 “지난해 광복절에 문재인 대통령이 해녀항일운동의 주역 5명 해녀들의 이름을 직접 부르면서 전국적으로 화제가 됐다. 그러나 아직도 고순효(차동)・김계석 등 해녀운동 주역의 독립유공자 선정, 추가적인 해녀투쟁 사료 수집 등 다양한 기념사업은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고 피력했다.

20일 열린 제주어업 보존·발전 포럼 및 전국해녀 교류행사 모습. ⓒ제주의소리
20일 열린 제주어업 보존·발전 포럼 및 전국해녀 교류행사 모습.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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