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교육 칼럼](2) 비인가대안학교에 대한 삐딱한 시선 유감…“교육은 권리”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다. '학교밖청소년'에 대한 우리사회의 시선은 여전히 비뚤어졌다. 패배자, 문제아, 혹은 낙오자…. 그들에게 붙는 왜곡된 꼬리표다. 제도권 학교를 떠났어도 학교밖청소년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꿈을 찾아 끊임없이 날개를 펴려 한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대안교육 현장 전문가의 목소리를 통해 학교밖청소년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글] 

교육은 권리다. 그것을 선택할 권리도 국민에게 있다. 제도권 교육만이 정답이 아니기에 교육의 다양성 보장 측면에서 비인가 대안학교에 대한 제도적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때다.  ⓒ제주의소리
교육은 권리다. 그것을 선택할 권리도 국민에게 있다. 제도권 교육만이 정답이 아니기에 교육의 다양성 보장 측면에서 비인가 대안학교에 대한 제도적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때다. ⓒ제주의소리

종교는 곧 믿음이다. 그렇다면 여기 대단한 종교가 하나있다. 우리나라에서만 신도가 5000만 명에 달하니 웬만해선 그 믿음을 능히 이길 자가 없으리라. 이것이 곧 길이요 진리이니, 신실하게 이 믿음을 감당하는 자에게는 입신양명은 물론 공명부귀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리 아니 될지라도 최소한 남들만큼의 삶은 유지할 수 있으리라. 

기독교 이야기가 아니다. 불교, 천주교 이야기도 아니다. ‘학교’이야기다. 우리 오천년 역사 중에 근대 학교의 틀이 생긴 지는 겨우 백년 조금 넘었을 뿐인데, 그나마 공교육이 제도화된 것은 채 백년에도 훨씬 못 미치는데, 역사에 비해 이 신앙의 뿌리는 너무나도 깊다.

학교에서 지내는 것이 좋은 아이들도 있다. 그 생활이 익숙해 큰 불만이 없는 아이들은 거기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꼭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있다. 우리가 학교생활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아이들의 뜻을 존중하듯 그렇지 않은 아이들의 뜻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그들은 결코 ‘문제아’가 아니다. 단지 나와 네가 다르듯이 그저 다른 것일 뿐.

배움은 꼭 학교 안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학교 밖에도 배움은 얼마든지 있다. 세상은 이미 다원화된 지 오래다. 그런데 아직도 제도권 학교만을 획일적으로 강요한다는 것은 얼마나 그릇된 신앙인가. 이제 지긋지긋한 전체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

배움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시각각 일어난다. 제도권 학교의 틀 안에 이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다. 그러니 배움터의 형태도 여러 가지가 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의 굳은 신앙을 되돌아볼 때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제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학교를 학교라 부르지 못하는 학교’가 있다. 비인가 대안학교 이야기다. ‘학교’라는 용어는 보통명사여서 웬만해선 문제가 되지 않지만 비인가 대안학교에 ‘학교’라는 명칭을 갖다 붙이면 단속의 대상이 된다. 아직도 제도는 20여 년 전 그대로 멈춰서있다. 

세상은 정(正)-반(反)-합(合)의 변증법적 원리에 기반을 두어 진보해왔다. 지난 1997년 경남 산청에 간디학교가 처음 세워진 이래 대안교육은 제도권 교육(正)에 끝없는 자극(反)을 가하면서 우리 교육을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내딛게 해왔다(合). 혁신학교는 이 같은 과정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그런데 여전히 대안학교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한다. 이른바 ‘문제아학교’라는 시선과 반대로 ‘귀족학교’라는 지적이다. 둘 차이의 간극만큼 대안학교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학교들이 있다. 그럼에도 오로지 단 두 가지 시각만으로 대안학교를 일컫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교실 붕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미 90년대 김영삼 정부 때부터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은 그 이전부터 등장했다. 당시 교육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한 부모들과 시민운동가들이 근대교육의 틀에 근본적 회의를 품고 전혀 새로운 교육의 틀거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안교육 운동은 그렇게 태동이 됐다.

물론 당시에 전혀 다른 흐름도 있었다. 각종 개혁정책을 내세우던 정부가 교실붕괴현상에 직면하고는 상당히 당황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당시 정부는 학교를 이탈하는 아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보완 조치 성격의 학교 틀을 급조했다. 대안학교가 곧 ‘문제아 학교’라는 식의 오해는 바로 여기서 비롯됐다.

근대 학교교육의 보완재(補完財)로서의 대안학교와 근대 학교교육의 대체재(代替財)로서의 대안학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하나는 모더니즘에 머물러있고 다른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가있다. 그러니 족보부터가 다른 교육인 것이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만들어진 대안학교들은 정부로부터 단 한 푼의 지원은커녕 불법단체라는 삐딱한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불법(不法)과 법외(法外)의 차이를 설명하기엔 대안교육에 대한 이해도가 전반적으로 너무 낮았다. 그렇게 20여년을 부모들의 출자와 교육비로, 교사들은 도시빈민 수준의 최저임금으로 버텨왔다. 

아무리 대안학교지만 학교를 운영하는데 드는 비용은 실로 막대하다. 그래서 일반 사립학교들도 얼마 안 되는 재단 전입금보다는 국고보조금으로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다. 대안학교 부모들은 때로는 대출을 받기도 하고 맞벌이도 마다하지 않으며 안간힘으로 그 공백을 메워왔다. 그랬더니 이번엔 돈 있는 중산층 이상만 갈수 있는 ‘귀족학교’라는 굴레가 씌워졌다.  물론 대안학교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는 귀족학교도 실제 몇 군데 있다. 하지만 대안교육의 본류가 아니다. 있는 돈 없는 돈 투자해가면서 온갖 사회적 불이익을 감당하며 학력인정도 안 되는 학교를 20여 년 동안 지켜올 ‘귀족’은 적어도 필자 주변엔 없다.

‘자기들이 선택해 학교를 나갔으면 자기들이 알아서 하는 것은 당연지사’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내뱉는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들’이라 지칭된 이들도 똑같은 국민이며 똑같은 세금을 낸다. 그들은 국가나 지자체가 당연히 했어야 할 고민과 실천을 온전히 자기 몫으로 감당하며 여기까지 왔다. 이젠 국가와 지자체가 책임질 때도 됐다. 

우리나라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교육은 권리다. 그것을 선택할 권리도 국민에게 있다.
그리고 국가는 그 권리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

학교 밖에도 배움이 있다.
학교 밖에도 학교가 있다.

*<학교밖청소년>은 정규교육에 있지 않은 9~24세의 청소년을 가리킵니다. 과거(2002년~2014년)에는 학교밖청소년 대신 ‘학업중단청소년’ 이라는 부정적 의미의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일각에선 여전히 '학교밖청소년' 이라는 단어에도 부정적 의미가 묻어있어 더 긍정적이고 포용적 명칭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 유양희 보물섬교육공동체 간사, 제주대안교육협의회 간사 

 

유양희는?

유양희 보물섬교육공동체 간사, 제주대안교육협의회 간사 ⓒ제주의소리
유양희 보물섬교육공동체 간사, 제주대안교육협의회 간사 ⓒ제주의소리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했다. 평범한 목회자의 길을 택하기에는 공부가 체질이 아니란 자각을 거쳐 종교전문언론 기자로 바로 현장에 뛰어들었다. 언론 현장 역시 녹록치 않아 흘러 흘러 식품산업 전문지 <식품음료신문> 차장대우를 끝으로 짧은 기자 생활은 마무리 지었다.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어 간디학교에서 대안학교 교사양성과정을 거쳐 경기도 파주시와 고양시에서 대안학교 교사 생활을 10년 가까이 했다. 새로운 길을 간다는 건 그만큼 실패를 염두에 뒀어야 하는데, 10년 끝에 맛본 좌절로 훌쩍 떠나고 싶어 제주 이주 열풍에 슬쩍 몸을 실었다. 이제는 제주의 보물섬학교 부모 입장에 서서 대안교육운동을 복기하고 있다. 이와 함께 보물섬교육공동체의 간사 일과 제주대안교육협의회 간사를 맡아 학교밖청소년의 교육기본권 보장을 위한 생각들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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