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연구소 30주년 기념 세미나...김영범 “미국의 군사기지 시도, 도민 힘으로 저지”

“항쟁의 열화 같은 기세, 놀라울 만큼의 도민 결속력, 고립무원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끈질기게 이어가는 저항의 지속성...미국으로서는 질리고 무섭기도 했을 것이다. ‘빨갱이 섬’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무수한 희생을 치르긴 했지만, 제주도와 제주민은 스스로를 지켜내는 데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참담한 희생, 패배감, 열등의식으로 오랫동안 기억된 섬의 역사 4.3. 하지만 시각을 달리하면 무자비한 냉전 형국에서 제주를 아시아-태평양의 전략 군사기지로 만들려는 미국 의도를 막아낸 ‘승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런 인식으로 4.3 정명을 무겁게 여기지 말고 ‘제주 독립항쟁’으로 삼자는 주장이다.

제주4.3연구소는 27일 4.3평화기념관 1층 대강당에서 ‘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 4.3도민 공감대 확산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세미나 제목은 ‘제주4.3 연구 30주년, 성과와 과제’이다.

4.3이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기까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4.3연구소의 3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현장에는 많은 인사들이 참여했다. 고희범 제주시장, 양조훈 4.3평화재단 이사장, 오경수 제주도개발공사 사장, 강요배 화가, 4.3유족회 인사 등 여러 인연들이 자리를 채웠다.

세미나는 김영범 대구대 교수의 기조 발표를 시작으로 ▲허호준 한겨레 선임기자(제주4.3 진상규명 30년의 성과와 과제-미국 문헌자료 발굴 경험을 중심으로) ▲김은희 4.3연구소 연구실장(4.3진상조사와 구술 채록) ▲오승국 4.3평화재단 사무처장(외로운 대지에 새겨진 참혹한 길) ▲강남규 제주민주화운동사료연구소 이사장(운동으로서의 제주4.3-4.3연구소 활동을 중심으로)이 각자 준비한 내용을 풀어내면서 토론으로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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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열린 제주4.3연구소 창립 30주년 세미나 현장. ⓒ제주의소리

# 뿌리 깊은 섬것 멸시...터져 나온 울분

김영범 교수는 4.3을 희생, 항쟁으로 구분해 바라보는 시선을 뛰어넘어 “제3자나 외부인의 관점이 아니라 내부인, 토종 제주인, 변방의 관점에 먼저 서볼 필요가 절실하다”고 제시했다.

김 교수는 4.3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인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집회’ 발포 사건의 배경에 주목했다.

그는 “말발굽으로 어린이를 격상시키고 그냥 가버리는 경찰에게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고 노호하며 쫓아갔다’는 것. 그러자 돌연 총격이 가해졌고 도피 은신하는 주민에게 무릎쏴 자세와 망루 위에서의 협공 조준사격이 있었다는 것. 이 두 개의 사실에 다시금 유념해보기를 권한다”면서 “중요한 것은 그 상황에서 육지 응원경찰의 ‘섬것 멸시’ 사고와 심리가 무의식 중에라도 표출됐다는 것이다. 그 직후 도립병원에서 벌어진 충남경찰 이문규의 난동 역시 그와 같다. 앞서 군중이 내보인 항의도 실은 기마경찰이 제주 출신 아닌 육지 경찰임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격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당시 제주도민들 입장에 서서 “이것이 단지 일반적인 배타성의 표출이었다고만 해석될 수 없다. 왜냐고? 현장에 있던 도민들은 순간 떠올렸을 것이니 말이다. 오랜 세월 제주도민이 육지로부터 당해온 핍박과 멸시와 그로 인한 설움을. 그래서 민족독립에 대한 희구 이상의 절절한 원초적 분노가 그때 터져나온 것이라 여겨진다”고 덧붙였다.

# 학살로 이어진 패배? 군사기지화 막아낸 승리!

3.1절 기념집회 이후 벌어진 관공서, 업체, 공장 등 무려 166개 기관·단체 종사자 4만 여명이 동조한 유례없는 3.10 총파업. 김 교수는 “총파업을 겪고부터 미군정과 경찰당국의 눈에는 남로당만 아니라 제주도민 전체가 불온하다 보이고 도전자로 여겨졌다”고 설명했다.

이는 ▲경무부장 조병옥(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 건국에 저해가 되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 ▲경무부 차장 최경진(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 색채를 가지고 있다) ▲주한미군 정보보고서(제주도 인구의 60~80%가 좌익이라고 한다 등) 등의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김 교수는 “독특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 제주도민의 행동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는 전혀 없이 사상과 정치적 문제로 곧장 몰아가버린 것”이라고 문제 삼았다. 역사적 배경은 양수의 난, 삼별초군 영입, 목호난 동참, 소덕유·길운절 반란에의 토호 가담, 양제해 모변사건, 방성칠의 난, 그리고 1901년 항쟁(이재수의 난) 등이 해당한다.

김 교수는 “제주에 대한 미국의 특별한 관심이 전부터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언론(제주도는 1급의 전략적 위치) ▲미 24군단 기록(제주도는 지극히 전략적인 위치의 요충지) ▲UN 소련대표 그로미코(A. Gromyko, 미국이 제주도에 기지 건설을 희망하고 있다) ▲UN 조선임시위원단 필리핀 대표(제주도의 전략적 가치가 소련에 의해 주목받고 있다. 강점 의도도 있다) ▲주한 미국대사 무초(J. J. Muccio, 전략상 매우 중요한 섬인 제주도의 토벌작전이 놀라우리만큼 성공을 거둬서 공산폭도들이 어떤식으로도 되돌아올 수 없게 됐다) ▲통위부 고문관 로버츠(W. L. Roberts, 미국은 제주도가 필요하지 제주도민은 필요치 않다) 등의 발언이 이를 뒷받침 한다.

김 교수는 “제주인민위원회의 강력 반발에도 불구하고 1947년 8월 1일부로 미군정이 일방적으로 결정 강행한 도(道) 승격도 행정편의 훨씬 이상의 정치적·군사적 의미가 담긴 결정”이라며 “도로 승격시켜야 경찰기구 강화와 경비대 신설로써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물리력 증강이 가능했기에 그랬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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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범 대구대 교수. ⓒ제주의소리

김 교수는 “3.1시위, 3.10총파업, 4.3봉기. 이 세 개의 계기마다 불변으로 현지 미군정 당국과 중앙의 경무부가 노골적인 강경책으로만 대응했다. 그들의 친일 본색 때문에만 그랬을까? 그런 조치를 뒤에서 부추기고 조종하며 마침내는 군·경과 우익청년단의 인간사냥을 조장하고 직접 작전 지휘도 한 미국의 본의는 무엇이었을까? 강경 반공노선 때문이었을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이어 “거듭 말하거니와 그 핵심은 제주도의 전략적인 가치 때문이 아니었겠나?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 상 제주섬이 실제로 필요해져 완전히 장악하려 할 때 나올지 모를 주민 저항의 싹을 미리 그리고 완전히 잘라버리고 말려버릴 속셈이 있었다고 봐야하지 않겠는가”라고 피력했다.

김 교수는 “하지만 그런 의도의 완전실현을 제주항쟁이 저지해냈다”며 “그 점을 수십년 동안 제주인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4.3에 대한 제주인의 기억은 크나큰 정세반전이 가져온 종국의 패배와 참담한 희생이라는 어두운 내용의 것으로만 남게 됐다”고 인식 전환을 촉구했다.

# 끝까지 당당하지 못한 남로당 봉기 세력

김 교수는 봉기를 주도한 세력에 대한 냉정한 평가도 잊지 않았다.

그는 “봉기 첫날 새벽의 무장대 행동에는 지나친 점이 있었다. 하기는 집합감정이란 일단 분출하기 시작하면 억눌러 제어되기 힘든 것”이라며 “봉기 지도부의 분별없는 모험주의와 생각 얕은 과격성을 나무랄 수 있겠다. 허나 그런 식이면 동학농민전쟁도 의병항일투쟁도 모험주의의 소치였다고 폄하될 수 있다. 4.3봉기의 결정의 진짜 문제는 섬이라는 공간적 제약을 경시했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항쟁대오의 지도자이던 김달삼 외 5인이 몰래 해주로 가서 돌아오지 않고 끝내 북한정권 수립에 가담한 것 ▲1948년 10월 7일 도내 대부분의 마을에 반정부 전단과 함께 종이제 인공기가 살포된 것 ▲그달 중순에 유엔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에 반대하는 진정서에 붙일 백지 서명서가 돌려진 것 등을 두고서도 “남로당의 속내를 드러내면서 통일의 의미도 반감 내지 변질시켜버린 처사”라고 꼬집었다.

이와 함께 “더 큰 문제는 제주민의 그런 행동이 분단국가로 일망정 헌법 제정, 국호 확정, 정부 수립이라는 절차를 거쳐 이미 출범한 신생 대한민국을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됐다”며 “그로 인해 제주는 ‘반란의 섬’으로 확실히 낙인찍혀,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과 주민 학살이 날개를 단 것처럼 가속화해갔다”고 판단했다.

김 교수는 미군정이 제주도를 군사기지로 눈독들인 해방 이후의 역사는 오늘날 강정 해군기지, 공군기지 의혹을 받는 성산 제2공항과 사실상 이어진다고 봤다.

그러면서 “국가안보를 빙자하고 내세우지 말라. 천혜의 자연 제주도와 제주민의 평화로운 삶을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바꿔놓을 재앙이 국가안보의 비책이라면, 제주민은 또다시 희생양만 되라는 말인가. 그런 국가라면 제주민이 불변으로 부여잡고 충성할 이유가 있다고 하겠는가”라고 일갈했다.

# 4.3은 제주 독립항쟁. 정명 두려워하지 말자

김 교수는 4.3 연구와 담론의 초점을 4.3봉기에서 3.10 총파업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고 제시하면서, 4.3의 정명 역시 ‘겁먹지 말자’고 강조했다.

그는 “문제는 4.3이라는 숫자 기호다. 그 기호는 늘 무장대를, 폭동을, 남로당을, 공산주의를, 그리고 우리 공동의 현실적 국체에 대한 ‘반란’을 먼저 떠올리게끔 했다. 항쟁의 정당성을 깎아내리고 그 역사적 의미를 뭉개버리며 우리의 기억마저 재점령하려는 자들에게 좋은 빌미도 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4.3이라는 기호를 이제는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으로부터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닐까. 악몽이어서가 아니다. 끈질기게 쫓아오고 달라붙는 유령이어서도 아니다. 그 기호와 명명 자체가 원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화두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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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현장 모습. ⓒ제주의소리

4.3의 정명은 “4.3연구소나 유관 단체 같은 데서의 공식적인 제안조차도 일절 없었다는 것이 문제다. 정명해야 한다는 당위론적 얘기만 수년 전부터 반복해서 나오곤 했지, 정작 실행에 나서야 할 이들은 무언가를 의식해 눈치 보거나 움츠려 망설였던 것은 아닌가도 싶다”고 미진한 정명 동력을 꼬집었다.

그러면서 “정명을 그다지도 신성하고 절대적인 과업으로 여기지 말자”며 “요컨대 형식론적 정명(正名)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만을 고집하기보다 실질적인 재정명(定名)의 논의를 시작해보자”고 제안했다.

“1947년 3.1기념집회 때까지 제주민이 내뿜고 있던 민족자결 독립의 숨결과 기운이 그날의 발포사건에서 비롯된 바, 미군정 통치 전면 거부의 총파업과 그것에 대한 전면 탄압이라는 대결구도의 성립을 계기로 해서 제주자위항쟁으로 급전했다는 것. 한국민족의 완전·절대·통일 독립이라는 염원, 그 열망을 외세가 짓누름에 대한 저항, 그러다 육지인이 하수인으로 동원된 그 억압이 제주민 말살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깨닫고 급기야 제주민의 자주·자결을 다시 꿈꾸며 제주 만의 자립·자존을 결사적으로 기해내려던 해방과 독립의 항쟁.”

김 교수는 “따라서 제주항쟁은 완전한 민족해방만 아니라 제주독립의 의미도 두텁게 내재시킨 것이었다. 그 이중적 내포가 다 포괄되게끔 재명명한다면 ‘제주 독립항쟁’이라고 해야 옳다고 본다”면서 “제주도라는 공간에서 벌어진 제2의 민족독립운동이 그 하나, 변방 제주섬이 육지부의 강권침탈자들에 대해 이제는 독립해야겠다고 외치면서 맞선 대(對) 중심부 항쟁이 그 둘, 그야말로 고립된 채 죽음을 무릅쓰고 독자적으로 벌여간 대미 항쟁이 그 셋”이라고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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