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제주시 구좌읍 당근 재배 정혜숙 씨 "30년 농사 지으면서 올해 같은 날씨는 처음"

쑥대밭으로 변한 정혜숙 씨의 당근밭(아래)과 더덕밭(위).
지난 밤 제주시 구좌읍 일대에 내린 우박과 강풍, 폭우로 인해 쓸려 내려온 흙더미가 차단막에 걸려 있다.

제주시 구좌읍에 사는 정혜숙(60.여)씨 지난 밤 오후 9시쯤 갑자기 하늘에서 우박이 쏟아지자 밤잠을 설쳤다. 난생처음 보는 500원짜리 동전만한 우박에 그간 공들여 농사지은 당근밭 걱정에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이튿날 날이밝자 마자 당근밭으로 한걸음에 달려간 그는 허탈감에 한숨만 내쉬어야 했다. 간밤에 내린 우박과 강풍으로 인해 애지중지 키웠던 농작물이 쑥대밭으로 변해버렸기 때문. 올 가을 지긋지긋한 늦장마와 두번의 가을태풍도 우여곡절로 지켜온 당근밭이 아니었던가. 
 
기자가 1일 오전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에 위치한 3000평 규모의 당근밭을 찾았을때는 이미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멀리서 볼때는 마치 예초 작업을 막 끝낸 풀들이 가지런히 밭 고랑에 잘려있는 것 같았지만, 가까이서 보니 당근 이파리들이 밤새 내린 우박과 호우·돌풍에 죄다 꺾여 쓰러져 있었다. 
 
제주지방기상청 등에 따르면 지난 30일 오후 9시께 제주시 구좌읍과 우도면 일부 지역에 10여분간 지름 2cm 정도의 우박이 쏟아졌다. 이 시간을 비롯해 밤새 제주 곳곳에서는 천둥번개를 동반한 돌풍과 호우가 내리쳤다. 
 
쑥대밭으로 변해버린 당근밭. 드문드문 붉은 당근이 땅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쑥대밭으로 변해버린 당근밭. 처참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검붉은 당근밭에 어지럽게 당근 이파리가 널브러져 있다. 

아수라장이 된 당근밭 곳곳에서 흙이 씻겨져 나가 붉은 몸덩어리를 내보인 어린 당근들도 처량하게 서 있었다. 말 못하는 작물이지만 힘겨워 보이기까지 했다. 

바로 옆에 위치한 3000평 규모의 더덕 밭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파리는 전부 꺾여버렸고, 일부 더덕들은 이미 뿌리를 드러내 처참했다. 
 
밭 반대편에는 배수로를 보니 상황은 더 심각했다. 우박과 강풍, 빗물에 당근들이 휩쓸려 배수로에 널브러져 있었다.
 
밭과 배수로 사이에 있는 3m 정도의 농로를 가로질러 떠내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일년농사로 애지중지 밭을 일궈온 정씨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참동안을 말끝을 잇지 못했다.
 
폐허로 변한 당근밭을 돌아보고 있는 정혜숙씨. 정 씨는 30여년 농사 짓는 동안 올해처럼 장마와 태풍, 우박까지 이어지는 이상기후는 처음이라며 울상을 지었다. 

정씨는 “어제(30일) 집에서 TV를 보다가 갑자기 우박이 쏟아졌다. 당근밭이 걱정됐지만 늦은 시간이라 어찌하지 못하다가, 오늘(1일) 날이 밝자마자 찾은 내 밭이 쑥대밭으로 변한 것을 보니 그저 허탈감만 든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씨는 올해 당근 파종을 두 번했다. 지난 여름에 파종을 했지만, 올 여름 너무 가물어 밭을 갈아엎고 재파종 했다. 이후에도 어려움은 이어졌다. 가을들어 지겹게 이어진 늦장마와 두번의 태풍에도 어떻게든 어린 싹을 지켜보겠다고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그는 “3만평 정도 농사를 짓는데, 올 가을에 태풍과 가을장마가 계속되면서 병해충 예방을 위해 농약값 등 비용이 평년보다 더 들었다. 정말 애지중지 키워왔다. 하지만, 이번 우박으로 인해 3만평 규모의 밭 대부분이 피해를 입었다. 당근과 더덕 등 농작물들이 모두 죽어버렸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정씨는 “진짜 망했다. 대체할 작물도 없다. 태풍 링링, 가을장마, 태풍 타파까지 견뎌냈는데, 갑자기 쏟아진 우박에 농사를 망쳤다. 빚을 내면서 지은 농사인데, 이제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농사를 30년 가까이 지으면서 올해처럼 태풍과 가을장마, 거기에다 우박까지 내리는 것은 난생 처음”이라며 하늘을 원망했다. 
 
제주도 농업기술원에 따르면 지난달 19일부터 25일까지 제주시에 282.2mm의 비가 쏟아졌다. 이는 지난해 14.5mm보다 20배 가까이 많은 것으로, 평년(36.7mm)보다도 8배 정도 많은 비가 내렸다. 
 
연이은 태풍 피해와 가을장마, 우박까지 내리면서 농작물 뿐만 아니라 제주 농민들의 마음도 쑥대밭으로 변하고 있다. 풍요로워야 할 제주의 가을 들녘이 잇단 자연재해로 농민들 시름만 쌓여가고 있다. 
 
지난 밤 제주에 내린 우박. 500원짜리 동전만 하다.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거주하는 [제주의소리] 독자 정의준씨 제공.
간밤에 내린 동전 크기의 우박과 호우로 줄기가 꺾여 드러누워 버린 더덕밭 피해 현장.
이파리가 죄다 꺽여 뿌리까지 드러내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든 더덕밭.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