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김영범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

숨죽인 채 4.3평화기념관에 누워있는 ‘백비’(白碑). 아직까지 제 이름을 얻지 못한 제주4.3의 현주소다. 지난 9월 27일 제주4.3연구소 30주년을 맞아 열린 세미나에서 대구대학교 사회학과 김영범 교수는 ‘4.3의 정명’에 대해 토종 제주인의 시선에서 바라보자고 제안했다. 그것은 ‘변방의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 속에 형성된 강고한 자아의식, 저항 정신, 그리고 독립 정신이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는 김영범 교수의 발표문(기억과 비원 속의 ‘4.3’,  정명(正名)은 가능한가 ― 짚어보는 몇 가지 문제들)을 네 차례로 나눠 소개한다. 2만8000자가 넘는 원고 속에 담긴 4.3의 정명에 대한 필자의 고민을 함께 공유해보기 바란다. [편집자 주]

Ⅰ. ‘4.3’이여, 뒤엉킨 기억이여, 잃어버린 비원(悲願)이여 
① 한시 2편과 4.3 연구 / 4.3의 진실은 어디에? / 발포사건과 총파업 
② 4.3 봉기와 미국의 이해관심 / 원죄 아닌 원죄

Ⅱ. 항쟁이여, 비극 너머의 자랑됨이여, 제 이름 찾아냄이여 
③ 사회주의와 좌우대립 문제 / 4.3의 의미 규정들 / 땅의 독립만큼 인식도
④ 정명에 대하여 / 백비(白碑)에 대하여 / ‘4.3’을 떠나는 재정명(再定名)으로

 

Ⅰ. ‘4.3’이여, 뒤엉킨 기억이여, 잃어버린 비원(悲願)이여 

1. 한시 2편과 4.3연구

어김없이 올해도 가을은 온다. 떠올려지는 옛 시. 당나라 요절시인 이하(李賀)의 것이다. 

가을밤 무덤 옆을 지나노라니
귀신이 구슬피 노래하더라 
포씨 가문의 원통한 사연
흘린 피 한 맺혀 천년이 가니
흙 속에서 이리도 퍼래졌다고 
(秋墳鬼唱鮑家詩 恨血千年土中碧; 拙譯)

공적(公的) 역사가 되지 못하고 불행한 개인사로만 치부된 채 원혼의 목소리로나 겨우 읊어지던 비사. 그래도 아주 잊히진 않아 기억의 밑바닥에 침전되어 있다가 불쑥불쑥 떠올라 조각난 서사로만 발설되던 비극. 다랑쉬굴이, 빌레못굴이, 그 수많은 4.3의 유적들이 그대로 파묻혀 있었다면, 먼 훗날 이 섬의 어느 인총이 지나가다 듣게 되었을 비가. 

한말의 문인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자결절명 직전에 이렇게 읊었다. 

가을 등불 아래서 책 덮고 
옛날 일 하나씩 돌이켜보니
참으로 어려워라 글 안다며 사는 것이  
(秋燈掩券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拙譯)

비록 책상물림의 서생일지라도 명색이 ‘지식인’이면 어떠한 자의식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뼈아프게 일깨우던 시. 그리하여 ‘4.3’이라는 어둡고 긴 동굴을 탐사하는 ‘진실 찾기’가 왜 필요하고 어찌 시작될 수 있었는지를 함께 은유해줌과 같던 두 편의 시. 

우리에게 있어 4.3의 진실 탐색·확인·회복·전파란 그런 것이었다. 쉬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제주4.3연구소가 설립되고 4.3운동이 시작된 것. 

그러고 어언 30년. 반세기도 못되지만 그렇다고 짧은 것은 아니었던 시간. 많은 일과 변환도 있었던 시간. 

세찬 비바람과 뇌성벽력 속에서도 오히려 마음 벼리고 몸 곧추세우며 이만큼 커왔노라고 자부할 만한가. 그 성장을 자축함이 곧 나올 <제주4.3연구소 30년사>이련가. 공자님처럼 4.3연구소도 “나이 30 되니 홀로설 수 있더라”고 과언(誇言)할 만한가. 아니, 4.3연구 자체와 그 성과가 그럴 정도는 되었다고 우리 공언할 수 있는가. 

4.3연구소만 4.3연구를 해온 것은 아니다. 그 울 밖에서도 많은 이들이 홀로 또는 여럿이 분발 전심했다. 그래도 그 중심에 늘 4.3연구소가 있어온 게 아니던가. 역량 가닿지 않아 직접 수행 못하는 과업일지라도, 이루어지게끔 견인은 했다. 주최·주관한 수많은 학술회의와 토론회가 다 그런 구실 해냈고, 자료집으로든 <4.3과 역사>로든 꼬박꼬박 기록 남겨 비축해왔다. 

연구소는 4.3연구만 아니라 4.3운동의 암암리 기획처였다. 횃불 올린 등대 됨도 자임해왔다. 연구와 운동이 함께 감을 처음부터 꾀해서였을 것이다. 증언 채록과 생존자 증언마당 마련, 자료 및 유적 발굴과 그것들의 의미독해·정리집성에 언제든 앞장서기, 무시로 터져 나오는 관련 사건·사안들에 신속·단호히 입장 표명하여 여론을 선도하는 이슈 파이팅... 역대든 현임이든, 소장, 운영위원, 편집위원, 연구원, 조사원, 사무국 요원, 그리고 열성회원 모두의 용기와 정성과 노고 덕분이었다. 경의를 표해 마지않는다. 아차, 빠뜨렸구나. 큰 우산이요 철벽방패 같아주던 이사장님들.   

4.3연구소의 그동안의 연구사업이 장기 기획에 의해 계획적·순차적으로 수행되어온 것은 아니다. 치밀한 짜임새와 일관된 행보로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때그때의 정치적 환경과 사회적 분위기에서 요청되거나 학계 동향에 따라 제기되는 과제들에 즉응함이 주된 사업양식이었다. 연구팀이 따로 구성되는 집체적 방식이었음도 아니고, 개별 연구자의 자유주제 선택과 문제설정에 맡겨지는 식으로 행해져왔다. 

1989년 제주4.3연구소 개소식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989년 제주4.3연구소 개소식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야만 할 이유도 있었다. 4.3이라는 사건·사실 자체가 하나의 얼굴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돌아보고 되짚어봐야 할 여러 면이 있었다. 그러니 제기되는 요구도 다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여러 목소리에 귀 기울여 ‘응답’하고 유의미한 실천에도 부합할 연구이려니 그래야만 했는지 모른다. 그런 중에도 일정한 흐름이 형성되고 주조음도 조발되곤 했다. 신기하고도 다행스런 바였다. 백조(百祖) 영혼들이 도우신 것이려니.

제주 현지의 문화예술계 작가 및 활동가들과 정론 논객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그들은 원심력에 휘둘리지도 중심에 붙잡히지도 않고, 스스로 구심점이 되어갔다. 무턱대고 ‘세계화’에 급급하거나 충실한 ‘국민’으로 복속되기보다, 오연한 도민으로 남으려는 자세였다. ‘제사협’과 같은 출향 제주인의 결집체도 호흡을 같이하며 4.3운동에 힘을 보태왔다. 

그렇다. 제3자나 외부인의 관점이 아니라, 내부인, 토종 제주인, ‘변방’의 관점에 먼저 서볼 필요가 절실하다. 폐쇄적이라 해도 좋다. 한번이라도 그래보고 그 다음에 ‘개방적’이든 말든 하자.

2. 4.3의 진실은 어디에?

제주4.3의 진실은 무엇인가? 무엇이 4.3의 본모습이고 그 핵심이었던가?

40년 가까이 독재·군사 정권의 공식규정은 ‘4.3사건’이 남로당 중심의 폭동(riot)과 반란(rebellion)이었다고 했다. 선진대중의 인식이 그것을 거부하며 옭아맴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들어서였다. 일제 강점통치로부터 해방된 우리 민족의 완전 통일독립을 지향하고 그 실행도 요구하는 무장봉기(armed uprising)요 민중항쟁(people’s protestant struggle)이었다는 것으로 인식의 반전이 기해진 것이다. 

그러나 왜 하필 고립된 섬 제주도에서 그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그래야 했는지가 제대로 설명된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의 실정(失政) 등 1947년까지의 여러 정황들이 그 배경과 원인으로 꼽혔지만, 이것만으로 설명이 다 되었다고는 볼 수 없었다. 항쟁론도 무언가 미진하고 공소(空疏)하게 들릴 구석이 있다고 할 소이였다.   

그러다 현기영의 <순이 삼촌>을 필두로 양조훈이 이끄는 취재팀의 <4.3은 말한다> 연재를 통해 대학살(massacre)과 민간의 수난·희생이 부각되었다. 2000년의 ‘4.3 특별법’ 제정 이후로는 그 측면에 초점을 맞춘 진상규명 작업과 담론 활성화가 기해졌고, 공식 보고서를 비롯한 여러 형태의 보고가 나왔다. 하지만 아직도 해명되지 않은 문제들이 여럿 있어서, 더 많은 진상의 규명, ‘추가 진상규명’이 요구되는 실정이다. 

이렇듯 상이한 시각과 해석들 속에서도 4.3 인식은 대구 10월 사건이나 여순사건과는 달리 상당한 진전을 보았음이 인정된다. 하지만 진전도 때로 파행적이고 완급과 기복이 있는 것임은 뉴라이트 등장 이후로 남로당 음모설과 폭동론이 되살아나 고개 쳐들고 목소리를 높이는 데서도 볼 수 있다. ‘인권과 평화’ 정신으로 학살론이 한동안 큰 지지를 받고 논의의 중심축으로 부상했으나, 학살당함이 4.3의 본질은 아니었지 않느냐는 회의와 일부의 반론도 감지된다. 4.3은 어디까지나 항쟁이었다는 것인데, 그 주장 자체로 폭동론에 대한 방어 또는 반격의 보루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항쟁의 대상이 정확히 무엇 또는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견해의 엇갈림이 있다. 미군정인지, 당시의 우익진영인지, 아니면 기세를 다시 올려가던 친일파였는지, 잔악한 테러집단으로 등장한 서청 등이었는지, 애매해진 것이다. 그 모두였다고 답하면 간단히 해결될지 모르지만, 그러면 항쟁의 이유 파악과 성격 규정에서 혼선을 면치 못하게 된다.  

어느 모로 보면 ‘항쟁으로서의 4.3’에 대해 우리는 영웅화·신화화를 통해 일종의 ‘기념비적 역사’를 쓰려만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과 자기비판이 가능하다. 그 점에서 우리에게는 제주인의 견지에서 쓰는 ‘비판적 역사’도 필요하다. 지나친 낙관과 자초한 패배와 어떤 유의 자기배반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다 들여다보고 엄중히 평가하는 선의 것이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 전시된 백비. 언젠가 이름이 새겨져 세워질까.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4.3평화기념관에 전시된 백비. 4.3의 정명(正名)은 언제 어떻게 새겨져 세워질까.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면서 4.3의 원인과 경과와 결과를 나름 간략히 정리해보는 것으로 이야기의 서두를 잡겠다.  

15년 전의 한 논문(<4.3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제주4.3과 평화인권운동 소고>)에서 나는 말하고 주장했었다. 4.3의 의미가 제주도민의 일대 수난이요 참극의 역사로만 묶여버릴 수 없고, 자기 삶의 터전과 생존의 자연권을 지켜내려는 적극적 항의와 집단방위적 투쟁으로서 거도적 민중항쟁의 역사이기도 했다고. 또한 그 정신적 기초는 수탈과 모멸의 대상이 되기 쉬운 변방의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을 배경으로 형성·침착되어 있던 바 제주인의 강고한 자아의식, 주인의식, 운명공동체 의식, 불의에의 저항 정신, 독립정신이었다고. 

아울러 도민저항운동의 측면에 외세의 주민학살 및 각종 인권침해의 측면이 맞물려 있었으니만큼, 두 측면을 다 아우를 수 있도록 4.3이 올바른 이름을 얻어야 하고 그 역사적 의미가 바르게 확정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런 견지에서 ‘4.3사건’이라는 이름은 잘못 붙여진 것임을 지적해 말했다. 그 이유는 48년 4월 3일에 소수 무장대가 감행한 봉기가 제주도민들이 겪게 된 비극적 사태의 원인 및 책임소재의 처음이자 끝인 것처럼 보이게끔 하는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오늘 드리는 말씀의 요지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고 관점도 거의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해묵은 얘기를 반복하려 함은 아니다. 논거를 대폭 보강하여 논지를 보강하면서 정명의 문제로 접근해가려는 것이다. 

3. 발포사건과 총파업

해방 직후 제주도내의 항일운동가 등 선진그룹은 인민위원회로 결속해 있었다. 그 노선은 비교적 온건하여 중도좌파적 성격을 띠었고, 좌고우면하지 않는 독자행보를 보였다. 일례로 ‘반탁 지지’를 표명했음은 조선공산당의 입장과 상반되었다.

육지부에서 10월 항쟁이 발발했을 때도 제주 인민위의 적극 호응은 없었다. 오히려 중앙의 좌익 결집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이 반대하여 불참하는 과도입법의원 선거에 의연히 참여했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인민위 간부를 당선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 식으로 도내의 좌익세를 과시하며 확인시켰으니, 이때의 ‘좌익’이란 친일파 숙청과 반(反)외세의 자주독립 노선을 지켜가려 한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제주도의 좌파는 ‘중도적’이어 보일 만큼 스펙트럼이 넓었고 자신감에 차있었다. 

미군정의 실정도 겹치면서 제주의 사회경제적 상황이 여러모로 나빠진 후 도내의 좌익세는 남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제주도위원회(이하, ‘제주도당’[濟州島黨])로 결집되어갔다. 창립 직후인 1947년 1~2월의 남로당 제주도당의 동향과 영향력은 주목될 만했다. 제주민청 창립, 부녀동맹 결성, 제주민전 결성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 연장선에서 3.1절 기념대회도 군정당국의 불허 방침을 뚫고 강행하였다. 

제주북교에서 열린 3읍면 기념대회의 공식 슬로건은 ‘통일독립 전취’와 더불어 ‘모스크바 3상회의 절대지지’ 및 ‘미소공위 재개 촉구’였다. 그럼에도 일부 마을의 구호판에는 우익이 고창해온 ‘신탁통치 절대반대’가 적혀있었다. 한림면의 기념집회에서 터져 나온바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외침은 미군정을 종식시키라는 요구와 함께 신탁통치 아닌 즉시독립의 바램도 담아낸 것일 수 있었다.  

3.1절 기념집회는 전국에서 있었다. 그 중 서울·부산·정읍·순천·영암 등 여러 곳에서 좌·우익 시위대의 충돌로 또는 경찰 발포로 38명의 사상자(사망 16, 부상 22. 그 중 경찰 발포로는 부산에서 사망 5, 부상 6. 영암에서 사망 2, 부상 5)가 발생했다. 그러나 사태가 확대되지는 않았고, 미군이 개입하지도 않았다. 유독 제주에서만 주둔 59군정중대가 출동하여 집총자세로 기관총을 세워놓고 시위대와 대치하며 해산을 종용했다. 그리고 1주일 전에 파견 와 있던 육지경찰이 관덕정 앞의 시위관람 군중에게 발포한 것이 이후의 크나큰 비극의 단초가 되어버렸다.

이 발포사건의 경위와 정황은 잘 알려진 바이니 재언하지 않는다. 다만, 말발굽으로 어린이를 격상(擊傷)시키고 그냥 가버리는 경찰에게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고 노호하며 쫓아갔다”는 것, 그러자 돌연 총격이 가해졌고, 도피 은신하는 주민에게 무릎쏴 자세와 망루 위에서의 협공 조준사격이 있었다는 것, 이 두 개의 사실에 다시금 유념해보기를 권한다. 바로 그 상황이 충돌의 새로운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에서 육지 응원경찰의 ‘섬것 멸시’ 사고와 심리가 무의식중에라도 노정되었다는 것이다. 그 직후 도립병원에서 벌어진 충남경찰 이문규의 난동 역시 그와 같다. 앞서 군중이 내보인 항의도 실은 기마경관이 제주출신 아닌 육지경찰임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격해진 것일 테다. 

이것이 단지 일반적인 배타성의 표출이었다고만 해석될 수는 없다. 왜냐고? 현장에 있던 도민들은 순간 떠올렸을 것이어 보이니 말이다. 오랜 세월 제주도민이 육지로부터 당해온 핍박과 멸시와 그로 인한 설움을. 그래서 민족독립에 대한 희구 이상의 절절한 원초적 분노가 그때 터져 나온 것이라 여겨진다. 

강요배 화백의 4.3연작 '동백꽃 지다' 가운데 '3.1대시위'.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강요배 화백의 4.3연작 '동백꽃 지다' 가운데 '3.1대시위'.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강요배 화백의 4.3연작 '동백꽃 지다' 가운데 '발포'.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강요배 화백의 4.3연작 '동백꽃 지다' 가운데 '발포'.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대결의 시간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3.10 총파업은 결과적으로 그 기점이 되었다. 결정은 남로당 도당이 주도했지만, 실행과 참여는 온전히 도민들의 것이 되었다. 도지사 이하 도청 직원들이 전원일치로 가장 먼저 결행했고, 기타 관공서와 업체·공장 등에 이르기까지 무려 168개 기관·단체의 종사자 4만여 명이 동조 참여했다. 실로 거도적인 일치행보였다. 심지어 군정청 통역원과 제주출신 경찰관들도 동참하거나 집단사직원을 냈다.

여기서 우리는 관·민 공동의 총파업을 누가 주도했느냐만 아니라, 호응이 왜 그다지도 컸는지를 묻고 살펴봐야 한다. 참여 범위와 규모로 볼 때 총파업은 남로당을 지지해서거나 그 노선을 그대로 따라서인 것이 아니었다(남로당 중앙의 전국적 3.22 총파업 결정은 3월 10일에야 나왔음). 그보다는 관덕정 앞 무도한 행동의 당사자가 외지인 경찰이었다는 것이 도민 일반의 어떤 감정을 건드려 분출시킨 결과였다.   

이것은 4.3봉기로 이어지는 저항의 동력이 남로당 등 좌익세력만의 것이었다거나 그들 뜻대로만 발생했다고 보아서는 안 됨을 말해준다. ‘진정한 독립의 세상에 대한 일반 대중의 열망’이 컸다고 본다면, ‘진정한 독립’의 속 깊은 함의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그때의 제주민들에게는 제주도의 자주성 확립과 발양이 가장 큰 열망이 되고 있었다고 나는 본다. 

다시 묻거니와, 3.1 기념식 때 전국 곳곳에서 유혈사태가 있었으나 그냥 묻히거나 지나갔고 유독 제주도에서만 총파업으로 대응한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재빨리 결정해낸 강경대응책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면 도청이 앞장서 파업에 나섰음은 왜인가? 도청 내에도 남로당 지하조직이 강성했던가? 도지사 박경훈이 민전 결성식에 나가 축사했고 직원 총파업도 그대로 용인하고 동참까지 한데다 결국 사표까지 내고는 그 후 민전 의장이 된 것은 왜 그랬는가? 그 비밀은 과연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은 아직 나온 바 없고, 자료에서 보이지도 않는다. 추측컨대 해방과 더불어 드높아진 제주인의 자존심과, 비록 임명받은 자리일지라도 직무에서는 최대한 도민의 뜻을 따르고 그것을 대표해야 한다는 생각과 내심의 결의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제주도의 총파업은 중앙 군정청과 예하의 경찰 수뇌부를 무척 놀라게 하고 긴장시켰을 것임이 분명하다. 총파업이 없었다면 미군정과 경찰 당국도 사태를 그렇게 심각하게 보진 않았을 것이다. 발포도 ‘경찰의 정당방위’였다고 발표하면서 육지부의 다른 유혈사건과 같은 식으로 예사로이 처리하려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총파업을 겪고부터 그들의 눈에는 남로당만 아니라 제주도민 전체가 불온하다 보이고 도전자로 여겨졌다. 그런즉 대응책도 초강경 일변도였다. 그것은 단순 ‘실책’이 아니었다. 급거 내도한 경무부장 조병옥의 언행과 파업분쇄 지시들이 그것을 대변했다. 그는 말하기를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 건국에 저해가 되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제주도 사람들’을 지목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불난 데 기름 끼얹는 격의 폭언이었다. 하지만 조병옥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경무부 차장 최경진도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발언했다. 주한미군의 정보보고서에는 “제주도 인구의 60~80%가 좌익이라 한다. / 도민 70%가 좌익에 동조하는 듯하다. / 제주도는 좌익 본거지로 알려져 있다”고 기록되기 시작했다. 독특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 제주도민의 행동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는 전혀 없이 사상과 정치적 문제로 곧장 몰아가버린 것이다.  

이렇게 볼 때 3.1사건 자체는 경찰 발포로 인한 ‘주민희생의 기점’이었을지는 몰라도 이후의 대결국면의 기점이었다고까지 말하기가 어렵다. 후자의 자리에는 3.10 총파업이 놓이는 게 맞다. 3.1사건 때 육지인의 섬것 멸시가 은연중 재연되니 제주인의 집합적 정념과 행동의 축은 민족독립에서 제주자존으로 급변전한 것이 총파업의 진짜 이유였다고 볼 수 있다. 아니 급전이기보다, 자존의 정념이 독립의 열망에 더해지면서 오히려 앞서는 것도 되고 전면화하기 시작한 것인지 모른다. 

3월 15일에는 2월 23일의 충남경찰 100명에 더해 421명의 전남북 및 경기 경찰이 증파되어 입도하니, 제주경찰 330명을 훨씬 능가하는 숫자였다. 응원경찰은 곧바로 검거작전을 개시하여, 3일 만에 200명, 한 달 만에 500명을 붙잡아갔다. 연행되어간 파업가담자들에게 응원경찰은 “쥐새끼들, 잘 왔다!”면서 무조건 구타하고 고문부터 가했다. 제주도민을 사람 아닌 짐승취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감자 석방을 요구하는 군중에게 발포해 부상을 입히기도 했다. “미군정이 일제 때만도 못하다”는 개탄은 그저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강요배 화백의 4.3연작 '동백꽃 지다' 가운데 '넘치는 유치장'.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강요배 화백의 4.3연작 '동백꽃 지다' 가운데 '넘치는 유치장'.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경찰의 극심한 탄압과 횡포는 일반주민들의 반감을 키워갔다. 그런 상황에서 제주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떤 심리가 들어앉을지는 능히 짐작되는 바다. 외래인(미군과 육지경찰) 대 제주의 대립구도가 증폭 강화될 뿐이다. 그런 한편으로 서구 ‘문명’의 세례를 담뿍 받았다는 극단적 반공주의자 이승만과 친일의 연장에서 극우세력이 되고 있던 한민당계 및 그 충견들에게는 ‘미개한’ 제주도가 더없이 좋은 ‘좌익소탕’의 시범적 표적이 되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서청을 제주도로 들여보내고, 한독당원이라면서도 극우파 인물이던 유해진을 그 지원역인 듯 신임 도지사로 내려보냈다.

서청이 제주민에게 가한 야만적 폭행과 무도한 핍박은 이념 이전의 문제였다. 학살의 이유로 삼은 ‘건국 방해’란 기껏해야 결과론적 얘기이고 갖다 붙인 것일 따름이다. 북에서 자기들이 당했다는 박탈과 수모의 원시적 보복 대상을 정확히 제주에서 찾은 것이었다. 서북지방처럼 조선왕조 때 소외되고 차별받았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존재인 제주도와 제주사람들을 약육강식 먹이사슬의 최하단부 존재로 여겼다. 그랬기에 사냥감처럼 삼아 인간도살(slaughter)을 서슴지 않은 것이다. 

# 김영범

김영범은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이다. 
서귀포시 출신이고, 1955년 대구에서 태어나 초·중·고를 제주에서 다녔다.
역사사회학과 기억사회학을 통해 사회사 및 독립운동사 분야를 주로 연구해왔다.
저서로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의열투쟁 Ⅰ―1920년대>, <혁명과 의열―한국독립운동의 내면>(독립기념관 학술상 수상작), <민중의 귀환, 기억의 호출>,  <의열단·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의 영혼, 윤세주>, <기억투쟁과 문화운동의 전개>(공저), <동아시아와 근대의 폭력> Ⅱ(공저), <3.1운동 100년, 5: 사상과 문화>(공저) 등이 있고, 최근의 <조선의용대의 항일전투(참가) 실적과 화북진출 문제> 외 다수의 논문을 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 보훈처 공적심사위원, 4·3평화재단 이사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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