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특별자치도 광역치매센터 '제2회 치매극복 수기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제주시 조천읍 어느 해안가 마을. 땅은 좁고 해안가 따라 길게 뻗어 있는 반농‧반어촌의 이 마을은 해산물과 일반 밭작물, 감귤이 주 소득 작물이다. 최근에는 굽이굽이 바다를 끼고 해안도로가 시원스레 열려 관광명소로 자리 잡고 있는 곳. 인정 많고 물 좋은 마을, 장모님은 생전에 그곳에 터를 잡고 사셨다.

해가 넘어가도 장모님이 돌아오지 않으시면 나는 마을 밖까지 마중 나가곤 했다. 몇 가구 안 되는 해안가 마을이라 동네를 벗어나면 밭이고 그 너머로 바닷가로 이어져 어둠과 함께 밤 그늘을 만들었다. 마을의 안온함과 마을 밖의 불안함 사이, 그 경계에서 나는 언제나 장모님을 기다렸다. 

일찍이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후 산수(傘壽)에 이른 연치에도 불구하고 물질('해녀일'의 제주방언) 하러 바다로 간 장모님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때가 가끔 있곤 했다. 어둠을 바라보는 불안한 시선 저편으로 희미한 달빛 머금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면 나는 큰 소리로 장모님을 불러댔다. "장모님~" 그럴 때면 장모님은 얼른 나를 알아차리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걸음을 재촉하셨다. "아이고, 무사 나와시게? 또신디 있지랑 아니행이네. 확 글라~"(아이고, 왜 나왔냐? 따뜻한 데 있지 않고 어서 가자.)

매번 이렇게 볼멘소리로 사위를 나무라는 듯 했지만, 살포시 장모님 입가에 살포시 번지곤 하던 그 은근한 미소가 보고 싶어 나는 시간 맞춰 자꾸만 마중을 나갔던 것 같다. 그렇게 장모님이 바다 속 깊은 데서 잡은 해산물이 든 망사리를 건네받고 자박자박 함께 집에 들어오면, 지친 몸에, 숨 돌릴 틈도 없이 저녁상을 차리시던 당신이었다. 

마디 굵은 당신의 손길이 어느새 저녁상을 내오시곤 했다. 찬거리가 별 것 없는 처지라 준비할 것이 적은 탓인지도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장모님과 저녁을 먹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고 마음 넉넉했다. 지금 생각하면 사위가 왔다고 어디서 구해 왔는지 생멸치 조림과 마늘지, 직접 바다에서 잡아 온 해산물과 문어 삶아 건져놓은 밥상이 그렇게 평화를 만들어 냈으니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동안 아이들 커 가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며 일상의 행복들로 알알이 엮어갈 무렵, 치매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진행되어, 장모님의 몸과 마음을 기억 저편 어지러운 혼미 속으로 몰고 갔다. 

치매가 발병하기 전에는 자가용으로 모시려는 딸과 사위를 뿌리쳐 가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50여 분 거리의 시골집과 딸의 집을 오갈 만큼 건강하셨는데….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시골집 이웃들이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할머니께서 가끔씩 식사를 하시다 밥을 벽에다 뿌리신다고.. 이상하게 생각한 내가 장모님께 이 일에 대해 여쭈면 심드렁하게 대답하시곤 하여 그냥 아무렇지도 않으신가 보다 하고 그렇게 꽤 시간이 흘렀다. 

그 행동이 바로 치매의 시초였다는 것도 모른 채로…. 그렇게 시작된 장모님의 기이한 행동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갑자기 나가셔서 동네를 배회하는 횟수가 많아지셨지 않던가.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알게 되었다. 

항상 곁에 있을 수 없어 잠깐 사이에 나가셔서 길을 잃고 헤매시는 걸 파출소 경찰관으로부터 연락을 받고서야 찾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일이 그렇게 되다 보니 집에서 시중드는 게 힘들게 되므로 자연이 몇 번씩 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해야만 했다. 마음만큼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진심을 다하여 극진히 요양을 했건만 장모님의 증세는 차도가 있기는커녕 점점 악화의 길로 치달았다. 시간이 지나면서부터는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니….

처음에야 무작정 장모님을 잘 모시기 위해 결코 병원 신세는 지지 않게 하리라 다짐했지만 병이 깊어질수록 당신의 딸도, 이 사위도 힘에 겨웠음을 실토한다. 그렇게 잠시 병원에 의지하려 할 때면 금세 알아차리시고는 어서 집에 가자고 안달하셨던 당신. 어린아이 달래듯 어르고 달래면서 입원했다가, 호전의 낌새가 있다 싶어 퇴원하면 다시금 방안에서 대소변을 누어 버리기도 하고, 나중에는 배설물을 벽에다 바르기까지….

심지어 어느 날은 가족들이 한눈을 파는 사이 2층에서 추락하여 갈비뼈 다섯 개가 부러지는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로 인해 장모님은 일 년 넘게 입원 하시는 바람에, 사위와 딸이 직장에서 퇴근하면 번갈아 병원으로 출근하고 또 다시 다음 날 아침이면 사무실로 출근하는 날이 계속되면서, 심신의 한계를 느껴 갔다. 하지만 장모님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는 내 마음이 무척이나 불편했기에 되도록 병원보다는 집에 계실 수 있게 하려 하였고, 편하게 해드리고 싶어 무척이나 애썼다. 

당신이 칠해놓은 배설물을 앞에 놓고 방바닥에 물 뿌려 신문지로 닦으면서, '그래 이건 똥이 아니다.'라며 나에게 최면을 걸었던 지난 일들. 가사와 직장을 책임져야 하는 딸의 입장은 더욱 가엾게만 느껴졌었음을 오늘 다시금 뇌이게 된다. 그럼에도 사위의 입장에서는 평소 아들이 없어 서러워하시던 장모님을 생각하면 안쓰럽기 그지없다. 

장모님의 노환은 점점 깊어졌다. 사위와 아들 몫을 하느라 기나긴 시간을 기도로 자신을 위로하며 보낸 지난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데, 이렇게 숨죽여 외쳐 본다. 10여년 남짓 투병 속 기나긴 망각의 늪에서 사시다 사랑하는 딸과 사위가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나라로 가신 당신! 

정성껏 모신다고 했으나 힘이 미치지 않은 일이 어찌 한둘이었으랴. 지난 일들을 돌이키며, 한을 안고 생을 마감하신 장모님께, 사위로서 생전에 다 못해 드린 효도에 죄스러움 용서 받을 길이 없다. 

당신께서 하늘나라로 가시고 난 뒤, 집안이 너무 썰렁하다. 장모님은 치매가 있은 후 귀가 어두워, 얘기할 땐 항상 소리를 크게 지르곤 하셨는데. 그런 당신 덕분에 집안 식구들은 웃고, 소란스럽고, 시끄러워 사람 사는 것 같던 집이 지금은 너무나 썰렁하고 괴괴함을 넘어 숨 막힐 듯 적막하다.

어느덧 속절없는 세월이 그렇게 흘러, 지금도 문득 장모님이 “성선이 아방아~” 부르시는 것만 같다. 항상 하늘나라에서 우리 네 식구를 보고 계실 장모님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지난 기일 때는 처제네 가족들과 추모의 시간을 같이 하면서, 밤이 늦도록 살아생전 당신의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 가족은 울고 웃고 했다. 

나는 내 장모님에게 감사한다. 결혼을 통해 얻은 새로운 인생에서 나를 돌봐주신 고마운 어머니이시다. 밖으로 돌아다니는 딸과 사위가 항상 달갑기만 했는가, 그래도 어머니는 우리에게 한결같이 너그럽고 따듯하셨고 자신이 살림을 도맡으시면서 우리에게 일할 자유와 시간을 주셨다.

"장모님! 알고 계신가요? 시간이 얼마나 흘러도 장모님께서 제게 주신 넘치는 사랑과 손자 손녀들이 간직하는 할머니와 함께 한 고운 추억들... 빛 하나 바래지 않고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장모님! 우리 가족에게 퍼주고 또 퍼주셨음에도 못 다한 장모님의 사랑의 마음 다 알고 있습니다. 그 먼 하늘나라에서도 안타까워하시고 계실 것을 이 사위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답니다. 

허철훈 씨.
허철훈 씨.

자꾸만 사위를 대할 때마다 따뜻하게 웃어주시던 당신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부족한 이 사위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그나마 당신이 치매를 앓고 사셨던 지난 시간이 오히려 행복했습니다. 저에게 속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장모님과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도 더 이상 아픔도 없고, 고통도 없는 그 곳, 하늘나라에서 행복하셔야 합니다. 저도 이제 그만 소박한 마음으로 저희 네 식구를 그렇게 보듬어주셨던 장모님의 모습을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하렵니다. 이렇게 두 손 모아 기도하옵니다. 부디 영면(永眠)에 드소서." / 허철훈

* 이 기고는 제주특별자치도 광역치매센터가 올해 개최한 제2회 치매극복 수기 공모전에서 영예의 우수상을 차지한 글로, 지난 9월20일 제주대학교에서 열린 '제12회 치매극복의 날 기념식'에서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필자인 허철훈 씨가 보내와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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