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김영범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

숨죽인 채 4.3평화기념관에 누워있는 ‘백비’(白碑). 아직까지 제 이름을 얻지 못한 제주4.3의 현주소다. 지난 9월 27일 제주4.3연구소 30주년을 맞아 열린 세미나에서 대구대학교 사회학과 김영범 교수는 ‘4.3의 정명’에 대해 토종 제주인의 시선에서 바라보자고 제안했다. 그것은 ‘변방의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 속에 형성된 강고한 자아의식, 저항 정신, 그리고 독립 정신이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는 김영범 교수의 발표문(기억과 비원 속의 ‘4.3’,  정명(正名)은 가능한가 ― 짚어보는 몇 가지 문제들)을 네 차례로 나눠 소개한다. 2만8000자가 넘는 원고 속에 담긴 4.3의 정명에 대한 필자의 고민을 함께 공유해보기 바란다. [편집자 주]

Ⅰ. ‘4.3’이여, 뒤엉킨 기억이여, 잃어버린 비원(悲願)이여
① 한시 2편과 4.3 연구 / 4.3의 진실은 어디에? / 발포사건과 총파업
② 4.3 봉기와 미국의 이해관심 / 원죄 아닌 원죄

Ⅱ. 항쟁이여, 비극 너머의 자랑됨이여, 제 이름 찾아냄이여
③ 사회주의와 좌우대립 문제 / 4.3의 의미 규정들 / 땅의 독립만큼 인식도
④ 정명에 대하여 / 백비(白碑)에 대하여 / ‘4.3’을 떠나는 재정명(再定名)으로

 

Ⅱ. 항쟁이여, 비극 너머의 자랑됨이여, 제 이름 찾아냄이여

6. 사회주의와 좌우대립 문제

남로당 계열의 좌익 급진파가 계급해방보다 민족해방을 선결과제로 삼고 반제·반봉건의 민주주의독립국가 건설을 역설했다지만, 그렇다고 하여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것은 아니다. 단계론적 혁명전략 속의 당면과제가 그렇게 표현되고 있었을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제주도 좌파세력의 사회주의 이념은 “대중 조직화에 활용된 사상적 외피에 불과”했다는 견해가 있다. 과연 그랬을까?

4.3봉기를 추동한 초기 무장대 지도부 내의 몇몇 인원은 일제 시기 조선공산당 이래의 국제공산주의 이념과 전략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었을 것으로 봐야 한다. 하지만 다른 일부와 거의 모든 제주도민은 공산주의와 구별되는 사회주의, 좀 더 분명히 말하면 일제 강점기의 제주사회에서도 소개되고 실험된 바 있는 아나키즘으로 버무려진 사회주의, 즉 자유사회주의(anarcho-socialism)를 해방 후의 체제모형으로 상정하며 희구했다고 보인다. 1946년 8월 서울의 미 군정청이 일반시민 845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선호도 설문조사에서 자본주의, 공산주의와 함께 사회주의도 나란히 제시되었듯이 말이다(세 체제에 대해 각각 14%, 7%, 70%의 찬성이 나왔음).

전해 내려온 마을공동체적 생활풍속과 농림·어업 쪽의 경제생활 양식이 해방공간의 제주도민들에게서도 계속 소중히 여겨지며 지켜지고 있었다시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1941)부터가 삼균주의에 기초한 민족사회주의 체제 건설을 천명했다시피, 넓은 의미의 사회주의는 해방 전후의 한국인과 제주인에게 있어서 단순한 사상적 외피가 아니라 실제적인 체제비전으로 삼아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4.3항쟁/제주항쟁의 사상적 기초는 일체의 제국주의·식민주의 배격과 함께 자유사회주의적 공동체 건설이었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앞의 ‘외피론’이 정작 강조해 말하고 싶었던 바는 손쉽게 설정해 아무데나 갖다 대기 쉬운 ‘좌우대립’ 도식의 적용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취지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렇다. 해방공간의 제주도 내부에도 이념적 대립이 있었다고 보아 굳이 찾으려만 들거나 부각시킬 바는 아니다. 일제 강점기의 ‘친일 대 민족’ 구도의 연장선에서 해방 후의 제주사회에도 소수 기득권층의 친미-반공 노선과 다수 도민의 민족-통일 노선 간에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그렇지만 미군정과 응원경찰과 서청 등 외부세력의 개입과 책동이 있기 전에는 양자 사이의 ‘대립·대결’ 형세가 불거져있진 않았다. 전자를 포괄하는 개념일 ‘우익’ 세력이 그럴 엄두를 감히 내지 못할 상황인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구도와 형세는 정말이지 외부세력이 들어오면서 만들어져 강제되고 심어져간 것이다. 미군이 진주해오고부터 강권질서주의와 공동체 자연주의가 나뉘어 대립이 생겨간 것이고, 3.1사건 이후로 물리적 폭력이 자아내는 백의의 희생으로 신음케 되었다. 새나라 건설의 꿈과 새 세상 만들기의 상상이 미국의 군정통치 개시와 더불어 제약받기 시작했고 극우세력의 내도와 발호에 의해 무참히도 짓밟혀간 것이다. 요컨대 이념전쟁 식의 대결구도는 태평양과 제주해협을 건너온 자들이 억지로 만들어내 심어간 것이다. 그 점을 간파했기에 김익렬과 9연대 장병들이 4.3을 ‘제주 대 육지의 대결’로 보고 개입을 회피했던 것이 아닌가.

7. 4.3의 의미 규정들

4.3 당시의 제주도민들의 생각은 간단했다고 어떤 이는 잘라 말한다. 친일분자는 물러나고 자주독립정부를 세워 자유·평등의 잘사는 국가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고. 이념투쟁은 의도도 역량도 없었다면서.

하지만 이것은 문제와 실상을 너무 간단히 추상화시켜버린 인식이고 말이다. 후자의 열망과 요구는 전국적 현상이었다고 하겠는데 왜 하필 제주도에서(만) ‘현대사 최대의 비극’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답이 그로부터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항쟁’이란 명명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무언가를/누군가를 거부하고 미워하는 느낌을 주며, 반공주의 반발을 야기하고, 학살에 정당성을 부여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란다.

솔직한 심경 토로였는지 모르나, 부정적 느낌과 어떤 현실주의적 고려만으로 역사적 사실의 진상과 진실을 부인하고 외면할 수야 없지 않은가? 거부할 이유가 있는 대상을 거부함이 왜 안 되는 것이며, 탄압에 맞서 저항한 것이지 그저 미워했기 때문에 항쟁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무장항쟁이 있다 하여 주민학살을 범하는 것이 용인되고 정당화도 될 수 있을까? 반공주의자의 반발을 우려함은 제주항쟁이 순전히 공산주의자들의 작란(作亂)이었다는 낡은 인식에 사로잡힌 소치는 아닌가? 설령 그랬다 치더라도, 이제는 시대변화에 한참 뒤쳐진 이념이 되었고 국제정치에서도 약발이 다된 반공주의를 매카시즘적 무기 삼아 휘두르려는 게 오히려 시대착오적 행태일 것이다.

4.3을 ‘통일지향의 저항사’라고 보는 데는 동의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점도 있다. 47년 3.1 기념식의 슬로건, 3.10 총파업 때의 삐라, 6.10 기념투쟁의 슬로건, 48년 2.7 구국투쟁의 기본 슬로건, 4.3 무장대의 호소문 등이 근거로 삼아지는데, 여기까지는 남·북의 분단정부 수립 전이니 명분 있는 통일독립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후로 가면 앞의 슬로건들 이면에 숨어있던 남로당 급진파의 포석이 표면화한 일들이 몇 번 있었다. 항쟁대오의 지도자이던 김달삼 외 5인이 몰래 해주로 가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한 것은 그런대로 이해된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오지 않고 북행하여 끝내 북한정권 수립에 가담한 것; 48년 10월 7일 도내 대부분의 마을에 반정부 전단과 함께 종이제 인공기가 살포된 것; 그달 중순에 유엔의 대한민국정부 승인에 반대하는 진정서에 붙일 백지 서명지가 돌려진 것 등은 남로당의 속내를 드러내면서 통일의 의미도 반감(半減) 내지 변질시켜버린 처사였다. 시종여일 민족자주의 통일독립론을 지켜간 김규식(金奎植)과 정권욕을 버리고 개심한 김구(金九)가 더불어 충심으로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남북협상 방식의 통일운동과도 지향점 및 성질이 많이 다른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제주민의 그런 행동이 분단국가로일망정 헌법 제정, 국호 확정, 정부 수립이라는 절차를 거쳐 이미 출범한 신생 대한민국을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48년 8월 15일 이후에는 재산유격대의 행동도 일찍이 메릴(J. Merill)이 명명했던 바와 같이 ‘반란’으로 규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제주는 ‘반란의 섬’으로 확실히 낙인찍혀,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과 주민학살이 날개를 단 것처럼 가속화해갔다.

비교적 긍정적인 시각을 담아내면서 설득력도 있는 견해로 최근에 제출된 것이 4.3은 ‘진정한 의미의 독립운동’ 즉 ‘제2의 독립운동’이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남한 주민 전체가 신제국 미국에 의해 친미반공국가로의 순종적 통합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형식적 독립’ 상태를 거부하고 자주권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렇다 한다. 그래서 4.3은 “신제국주의적 통치에 맞서는 탈제국·탈식민의 저항운동”으로 성격이 새롭게 규정된다. 그와 더불어, 차별과 배제를 당해온 제주인의 고유성과 주체의식이 고창되는 ‘인정투쟁’의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4.3은 좌익 게릴라 폭동이 아니라 제주인의 자발적 항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당 정도 동의할 수 있는 사회과학적 관점이고 평소의 내 우견(愚見)과도 상통하는 생각을 만나니 반갑다. 그러면서도 조금은 부족해 보이는 점이 남아있다. 4.3의 시·공간적 특수성이랄까 심층적 의미를 정확히 짚어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좀 더 정곡을 찌르는 설명이려면, ‘신제국주의적 통치’는 ‘약육강식의 침탈’로, ‘탈제국’은 ‘반강권(反强權)’으로 바꾸고 ‘저항운동’에 ‘자존적’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까 4.3의 근본 성격은 침탈외세배격운동,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제주해방·자결투쟁으로 규정함이 맞지 않느냐는 얘기인 것이다.

3.1 시위, 3.10 총파업, 4.3 봉기, 이 세 개의 계기마다 불변으로 현지 미군정 당국과 중앙의 경무부가 노골적인 강경책으로만 대응했는데, 그들의 친일 본색 때문에만 그랬을까? 그런 조치를 뒤에서 부추기고 조종하며 마침내는 군·경과 우익청년단의 인간사냥을 조장하고 직접 작전지휘도 한 미국의 본의는 무엇이었을까? 강경 반공노선 때문만이었을까?

거듭 말하거니와 그 핵심은 제주도의 전략적 가치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상 제주 섬이 실제로 필요해져 완전히 장악하려 할 때 나올지 모를 주민저항의 싹을 미리 그리고 완전히 잘라버리고 말려버릴 속셈이 있었다고 봐야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런 의도의 완전실현을 제주항쟁이 저지해냈다. 탐욕이 발현되고 이승만도 선선히 넘겨줄 의사를 내보였지만, 미국의 군사기지화 기도는 결국 좌절된 것이다. 항쟁의 열화 같은 기세, 놀라울 만큼의 도민 결속력, 고립무원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끈질기게 이어가는 저항의 지속성... 미국으로서는 질리고 무섭기도 했을 것이다. ‘빨갱이 섬’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무수한 희생을 치르긴 했지만, 제주도와 제주민은 스스로를 지켜내는 데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강요배의 작품 '한라산 자락 백성'.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탐욕이 발현되고 이승만도 선선히 넘겨줄 의사를 내보였지만, 미국의 군사기지화 기도는 결국 좌절된 것이다. 강요배의 작품 '한라산 자락 백성'.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그 점을 수십 년 동안 제주인들은 미처 깨닫지 못해왔다. 그러다보니 4.3에 대한 제주인의 기억은 크나큰 정세반전이 가져온 종국의 패배와 참담한 희생이라는 어두운 내용의 것으로만 남게 되었다. 승자가 된 반공국가(국민)의 독한 질타와 유세떠는 손가락질에 몰리면서 끝 모를 패배감과 허무감, 바닥없는 자기모멸과 열등의식에 갇힌 채 어디서도 발설 못하고 내색조차 금기여서 가슴속 깊이 담아만 놓은 ‘로컬기억’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로컬기억이어서 제주인 사이에는 비장 전수될 수 있는 기억이 또 하나 있었다. 대동항쟁의 기억이 그것이고, 그 저변에 제주인만의 오래된 비원이 깔려있었다.

8. 땅의 독립만큼 인식도 

‘탐라’가 고대 독립국에서 변방 ‘제주’로 바뀌면서 한반도 중앙의 왕조에 귀속시켜진 후에도 외부/육지 세력의 침탈에 대해 예민한 경계심과 저항이 이어져왔다. 양수의 난, 삼별초군 영입, 목호란 동참, 소덕유·길운절 반란에의 토호 가담, 양제해 모변사건 등이 그러했다. 그 전통은 한말의 방성칠 난을 거쳐 1901년의 항쟁(‘이재수의 난’)으로 계승되었다.

이에 대한 인식은 이미 1940년대 말에 언표된 바 있다. 제주 출신 중앙지 기자인 홍한표(洪漢杓)가 “그[4.3 발발] 원인을 조성한 것이 외부(육지)에서 들어온 자들에 의한 것이 분명”하다면서, 외세의 폭력에 대한 공동체적 항쟁이라는 4.3의 성격을 과거의 제주 민란 전통에 비견한 것이다. 제주민전 간부였고 후일 언론인이 된 고창무(高昌茂)는 4.3을 항일운동 전통과 연결시켜 보았는데, 지금은 그 관점이 일반화되었다. 4.3을 ‘자치지향의 저항사’로 볼 수 있다면 조정의 권력까지도 외세로 간주했던 제주민의 도저한 자주·자결 정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남로당 제주도당의 조직부 책임자이던 김양근은 1949년 6월의 법정 최후진술에서, “이번의 반란 동기는 작년 4월 3일경 민간의 충돌을 발단으로 자연발생적으로 봉기제주도 인민의 항쟁이다. 이러한 인민항쟁은 외래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고 있는 세계 약소민족국가 전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고 그 현상의 하나가 바로 이번의 제주도 인민항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조직적·계획적 항쟁이 아니었다”(밑줄은 인용자)고 말했다. 다소 의외의 얘기고 정돈되지 못한 변설로 들릴 수도 있었겠지만, 4.3 봉기와 그 후의 항쟁이 정치적 목적으로 기획된 것이었기보다 도민 일반의 집합적 정념이 분출·폭발한 것임을 무지한 외지인들에게 애써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박찬식·이영권·홍기돈 등이 릴레이의 교대주자처럼 천착하고 일구어가는 제주중심 사관에서는 제주인들이 독특한 해양문화에 기하여 육지부와는 구별되는 특유의 공동체 경험 및 정신을 가졌음이 강조된다. 조선왕조가 ‘출륙금지령’ 등으로 제주민에게 고립과 소외됨, 그리고 그 파생물로서 배타를 강박했지만, 제주민은 자기들만의 생활·신앙 공동체 형성과 유지로 대응했음이 설파되고 있다. 게다가 탐라국 재건의 꿈이 고려시대 이래로 19세기 말까지 단속적으로나마 있어왔음이 재조명되니 의미 깊다. 일견 복고적이고 분리주의적이며 과거에만 집착하는 태도 같지만, 실은 지혜 깃든 선견으로 미래를 내다보며 준비하려는 자세이다.

그런 제주도를 19세기 말의 일본 및 미국의 언론과 태평양전쟁기의 일제 군부에서, 뒤이어 8.15 해방 직후의 미국·소련·중국, 게다가 대통령 이승만까지 최량의 군사기지 감으로 점찍고 눈독 들이고 실제로 그렇게 만들려 했다.

오늘이라고 다를까? 강정 해군기지를 보라. 예정된 성산 제2공항이 공군기지로 전용될 가능성이나 막후의 모의는 정말 없는 것일까?

국가안보를 빙자하고 내세우지 말라. 천혜의 자연 제주도와 제주민의 평화로운 삶을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바꾸어놓을 재앙이 국가안보의 비책이라면, 제주민은 또다시 희생양만 되라는 말인가. 그런 국가라면 제주민이 불변으로 부여잡고 충성할 이유가 있다고 하겠는가? 지방분권과 주민자치가 제주에서 절실히 필요하고 더욱 강화되어야 함은 그래서다. 무엇보다도 제주민 자신의 생존이 지켜지고 유지되기 위해서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국가안보를 빙자하고 내세우지 말라. 천혜의 자연 제주도와 제주민의 평화로운 삶을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바꾸어놓을 재앙이 국가안보의 비책이라면, 제주민은 또다시 희생양만 되라는 말인가. 사진은 제주공군기지 추진 일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국민국가 체제로 편입되는 과정이 꽤 오래 그리고 깊숙이 진행되어버린 지금 와서 제주도가 국가로서의 독립을 꾀함은 난망이다. 여러 문제를 낳기도 할 것이다. 그 대신 ‘특별자치도’라는 지위가 주어졌다. 그렇다면 그 조건 내에서라도 가능한 최고치의 지방주권성·자율자치성을 확보하고 누려야만 할 것이다.

4.3을 보고 해석하는 시각도 그렇다. 어느 사이에 학계에서도 중앙/외지인들과 제주/토박이들의 시각·관점 차이가 나타나 조금씩 도드라지기 시작했는데, 오히려 바람직하다. 후자가 중앙의 시각을 압도하는 날이 오는 게 좋고, 와야 한다. 그럴 수 있도록 연구결과 자체로써 설득하고 지적 헤게모니를 잡아가야 한다.

“그러면 4.3의 전국화·세계화가 저해되지 않을까” 하는 기우는 접어도 좋다. 구걸하는 전국화·세계화가 아니라 찾아와서 배워가는 전국화·세계화를 기약하고 도모해야 한다. 어쩌면 전국화란 굳이 하려들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4.3은 국민국가의 틀 밖으로 감연히 탈주하려는 시도인바 컸는데, 특별법 제정 이후의 4.3운동은 어쩌다 그만 국가체제의 품속으로 자꾸만 파고들며 보채온 감이 있다. 4.3연구도 그러했으니, 제주 안의 소박하되 진솔한 목소리보다 제주 밖 명망가들의 권위에 더 의존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4.3의 세계화도 영문서적 간행이나 영어논문 발표, 외국인사 초빙으로 다 되는 게 아니다. 진정성 어린 정신의 나눔과 가치의 연대를 요하고, 그것이면 족하다. 흔히 운위되는 바의 거창 화려한 상층 ‘국제연대’보다 민초적 세계시민연대를 통해 그것은 더 잘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제 4.3 연구와 담론의 초점을 옮겨볼 필요가 있다. 48년에서 47년으로, 4월에서 3월로, 4.3에서 3.10으로!

# 김영범

김영범은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이다.
1955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귀포에서 자라면서 초·중·고를 제주에서 다녔다.
역사사회학과 기억사회학을 통해 사회사 및 독립운동사 분야를 주로 연구해왔다.
저서로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의열투쟁 Ⅰ―1920년대>, <혁명과 의열―한국독립운동의 내면>(독립기념관 학술상 수상작), <민중의 귀환, 기억의 호출>,  <의열단·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의 영혼, 윤세주>, <기억투쟁과 문화운동의 전개>(공저), <동아시아와 근대의 폭력> Ⅱ(공저), <3.1운동 100년, 5: 사상과 문화>(공저) 등이 있고, 최근의 <조선의용대의 항일전투(참가) 실적과 화북진출 문제> 외 다수의 논문을 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 보훈처 공적심사위원, 4·3평화재단 이사 등을 역임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