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희의 예술문화이야기] 42. 저지문화예술인마을 이야기

‘장소 만들기 (place making)'는 개발과 재생의 바람이 불 때 유행하던 용어였다. 제주도 서쪽 중산간 저지리에 들어선 저지문화예술인마을도 그런 장소 만들기의 차원에서 목적이 분명했던 대담한 프로젝트였다. IMF로 경제가 흔들리고 인구도 줄던 1990년 후반에 훌륭한 예술가들이 모여있는 마을이 생기면 일종의 문화지구로 사람들을 끌어올 수 있다는 꿈에서 시작된 것이다. 1998년 처음 파주의 헤이리가 예술마을로 구상되어 사업이 시작되자 제주도도 1999년 북제주군이 가지고 있던 군유지를 개발하는 사업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저지문화예술인마을 풍경.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장소 만들기 차원에서 본다면 헤이리는 연예인과 흥미로운 시설이 들어와 일찍부터 전성기를 누렸다. 화랑, 서점, 카페 등 다양한 시설로 주목을 받았고 최근에는 인근의 파주 출판단지의 문화시설이 인기를 얻자 함께 가볼 만한 관광지로 홍보되고 있다. 반면에 저지리는 아직 헤이리를 따라가기엔 역부족이다. 

보통 ‘저지예술인마을’로 불리는 이곳은 2001년경부터 48필지가 전국에서 온 예술가들에게 분양되었으나 아직 다 건물로 채우진 못하고 있다. 제주현대미술관이 2007년에,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2016년에 문을 열어 그나마 마을의 지지대 역할을 하자 인지도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문화지구로 지정되어 소유주들에게 세금 혜택이 주어진다고 한다. 최근의 제주도 이주 열풍과 더불어 중국작가의 입주, 그리고 공공수장고 개관으로 상황은 좋아지고 있다. 작년에는 남아있던 필지를 분양하고자 입주시설을 공모하였는데 11건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유명 건축가 이타미 준 기념관이 그중 하나라고 전해진다. 

저지예술인마을이 느리게 성장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입주한 작가들에 대한 정보가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았다는 측면이 있다. 약속해 놓고 건물을 늦게 짓는다, 사유재산이라 여기는 주인들이 폐쇄적으로 운영한다, 마을이 성공하면 부동산 가격만 오른다 등등 비판적인 여론이 더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대신에 이곳에 들어온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 분야 사람정도나 알 뿐 스토리텔링이 거의 없다. 저지예술인마을주민협의회가 주최하는 저지예술인마을축제가 초창기부터 15년 넘게 열리고 있는데 제주현대미술관,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과 더불어 예술인마을 다운 창의력을 발휘할 때인 것 같다.  

그래서 한 가지 이야기를 할 까 한다.
 
2007년 저지리에 작업실을 지은 박서보(1929- )는 한국추상미술 역사에서 독보적인 작가이다.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저지예술인마을의 박서보 작업실.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그는 1950년대 후반 국전(당시 국가에서 주최한 권위적인 미술전람회)에서 아카데믹한 구상미술이 주로 수상하던 시기에 드물게 외국의 추상미술(일본을 거쳐 들어온 프랑스의 앙포르멜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아 ‘한국 앙포르멜’을 시도했던 작가이다. 유교문화가 강한 한국에서 그의 도전적인 행보는 늘 가십거리가 되곤 했지만 패기만만했던 박서보는 구세대의 권위를 보란 듯이 무시했다. 파리, 상파울로 등 외국의 비엔날레와 전시에 초대를 받아 현지에서 좋은 결과를 얻으며 자신의 호언장담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미술협회 회장, 홍익대 교수 등 국내 미술계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수많은 후배와 제자를 길러내며 ‘박서보 군단’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피카소를 닮은 외모에 오랫동안 홍익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의 권위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이런 권위는 그가 치열하게 추상을 잡고 분투하며 서구의 모더니즘 미술을 한국적으로 소화한 결과 얻은 것이기도 했다. 앙포르멜 이후 만든 ‘묘법’ 시리즈는 단색의 바탕에 연필로 반복되는 선을 그리며 주목을 받았고 다른 추상작가들의 추상작업과 더불어 모노크롬 회화, 또는 단색화라고 불리며 197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이 되었다. 

단색화는 지난 10여 년간 세계 미술시장에 열풍을 일으키며 한국현대미술의 시장성이 높다는 기대를 갖게 했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단색화’ 전시 이후 박서보의 그림 값은 10년 전보다 10배 올랐다고 한다. 홍콩 바젤 등 유명 아트페어와 경매시장에서 그의 그림은 ‘없어서 못 팔정도이다.’ 올해 여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회고전 <박서보-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는 80대의 노화가가 평생 전투적으로 작업한 노정을 보여주었다.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박서보 회고전, 2019.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그는 서울에 집과 작업실을 겸한 공간을 가지고 있지만 저지예술인마을에도 작업실을 만들었다. 서울의 공간이 대작을 제작하고 중요한 손님을 맞는 곳이라면 저지리의 작업실은 스스로 ‘쉼터’라고 부른다. ‘복잡한 생각들을 다 버리고’ 쉬면서 작품을 구상하는 곳, 그래서 저지리에 오면 ‘에스키스’(스케치)를 많이 한다고 한다. 

박서보가 1950년대 말 앙포르멜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의 옆에서 같이 공감하며 추상을 실험했던 작가가 바로 김창열이다. 안국동 이봉상미술연구소 시절부터 단짝일 정도로 붙어 다녔고 김창열이 프랑스에 정착한 이후에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지속했다. 박서보는 김창열을 “내 평생에 은인같은 친구”라고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군대 기피자로 수배되어 다니는 동안 박서보는 미술연구소의 제자와 눈이 맞아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경찰이었던 김창열을 신혼여행에 데리고 가 위기의 순간을 모면했다고 한다. 

김창열과 박서보는 1960년대 초부터 외국의 전시에 관심이 많았고, 외국작가들과 겨루어 인정을 받고 싶어 했다. 그만큼 한국미술계가 젊은 작가들에게 자유를 주기에 척박한 시절이었다는 걸 말해준다. 파리비엔날레에 한국작가들이 처음 참가하게 된 것도 김창열의 노력 덕분이었다. 이북 출신으로 한때 서북청년단의 숙소에서 기거했던 그는 비록 경찰의 길을 갔지만 밤에는 꼭 이봉상미술연구소에 들러 박서보를 비롯한 일군의 청년들과 함께 최신 동향을 주고받으며 작가의 꿈을 키웠고 언젠가 파리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꾸준히 프랑스어를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1960년대 중반 뉴욕에 머물다 결국 원하던 파리로 간 김창열은 프랑스인과 결혼하고 현지에서 물방울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다. 1970년대 초반부터 그린 물방울은 그를 성공시킨 이미지가 되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박서보도 ‘묘법’에 매진한 것을 보면 어떤 운명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앙포르멜로 만나 의기투합한 두 사람이 이후 각자의 길을 갔지만 결과물도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것을 보면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린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그런 단짝이 말년에 제주의 중산간 저지리에서 다시 조우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저지예술인마을의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전경, 출처는 김창열미술관 페이스북.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박서보의 작업실 근처에 들어 선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은 ‘물방울 작가’라는 명칭으로 유명해진 후 미술관을 만들고 싶어 하던 차에 유치된 것이다. 김창열은 자신이 죽고 난후 자식이 작품 관리를 잘 못할 것 같아 고민하던 중 “제주도 유지되는 몇 사람이...선생님 미술관을 제주도에 하나 지으시면 어때요?”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여기에 그가 6.25시절 잠시 제주에 머물렀다는 인연도 기여했다. 그는 1952년경 제주에 경찰로 근무했는데, 4.3사건이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제주에 미술관을 짓게 되자 “좀 찜찜해...어떻게 될지 모르지요. 내가 맞아 죽을 지”라고 웃으면서 고백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친한 친구 박서보는 자신의 작업실 인근에 김창열미술관을 건립한다는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김창열에 따르면 박서보보다 먼저 미술관을 짓는다고 싫어했단다.

필자 양은희는...

양은희는 제주에서 나고 자라 대학을 졸업한 후 미학, 미술사, 박물관학을 공부했으며, 뉴욕시립대(CUNY)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 <조우: 제주도립미술관 개관 1주년 기념전>, <연접지점: 아시아가 만나다> 등의 전시를 기획했으며, 여러 미술잡지에 글을 써왔다. 뉴욕을 현대미술의 눈으로 살펴 본 『뉴욕, 아트 앤 더 시티』 (2007, 2010), 『22개 키워드로 보는 현대미술』(공저, 2017)의 저자이자 『기호학과 시각예술』(공역, 1995),『아방가르드』(1997),『개념 미술』(2007)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전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 현 스페이스 D 디렉터 겸 숙명여자대학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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