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 제주4·3-여순항쟁 71주년] ④4·3도민연대, 여·순과 함께 ‘항쟁의 길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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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도민연대가 제주4·3과 여순항쟁 71주년을 기념해 18일 여순사건의 주요 유적지인 만성리 형제묘를 방문해 주철희 박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제주의소리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김민기 작사·곡 '늙은 군인의 노래' 

유신과 군부독재시절 저항가요로 자주 불렸던 김민기 씨의 '늙은 군인의 노래'가 유난히 귓가에 맴돌았다. 청춘을 바쳐서라도 국민의 목숨을 지켜내는 군인의 사명을 다한다면 바랄 것이 없다는…. 흙 속에 묻히더라도, 청춘이 실려가더라도. 

제주4·3과 한몸과도 같은 역사, 10·19 여수순천사건. 제주도민을 진압하라는 4·3학살 명령을 거부하고 인민을 위해 항쟁했던 여순사건의 발자취를 쫓는 여정이 펼쳐졌다.

제주4·3도민연대는 제주4·3과 여순항쟁 71주년을 기념해 지난 17일부터 2박 3일 동안 여수와 순천에서 순례일정을 진행하고 있다. 이틀 째인 18일에 '항쟁의 길을 걷다'를 주제로 여순사건의 주요 유적지를 방문했다.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가 유적지 설명을 맡았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한 사건으로, 여수,순천 일대를 거쳐 전남 동부까지 확장한 이들 세력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과 군경이 숨졌다.

이날 탐방지로는 △여순사건 발발지 △14연대 주둔지 △인구부 전투지 △여수군 인민대회가 열렸던 건물 앞 진남관 △만성리 학살지와 형제묘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를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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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도민연대가 제주4·3과 여순항쟁 71주년을 기념해 18일 여순사건의 주요 유적지인 14연대 탄생지를 방문해 주철희 박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제주의소리

처음 방문한 곳은 전남 여수시 신월동 여수장례식장 인근으로 국군 14연대가 주둔했던 여순사건 발발지였다. 여순사건 주동자들인 14연대가 탄생하고 그 군인들이 근무했던 지하벙커이자 무기고였다.

주 박사는 "14연대는 제주4·3이 발발한 뒤 만들어진 부대다. 1948년 10월 제주도 출동명령을 받은 14연대는 여수인민보에서 보도한 [애국인민에게 호소함] 성명서에서 알 수 있듯, 같은 인민인 제주도민을 죽일 수 없다며 군인의 사명을 정확히 지킨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또 "저는 14연대의 봉기 행위를 항쟁으로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봉기를 촉발로 이 지역 사람들이 당시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만으로 함께 들고 일어난 민중이 주체가 됐으므로 여순‘항쟁’이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역사를 이해하려면 지리적 공간을 이해하는 게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 14연대가 여수역을 거쳐 지리산을 목적지로 삼고 이동을 하려면 여수 시내를 지날 수밖에 없다. 이 지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14연대가 여수 시내를 점령하려고 왔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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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도민연대가 18일 여수 인구부 전투지를 방문했다. 사진에 보이는 도로 일대가 진압군과 반군의 격전지였던 곳이다. ⓒ제주의소리
여순사건으로 알려진 14연대는 당시
여순사건으로 알려진 14연대는 당시 "같은 인민인 제주도민을 죽일 순 없다"며 제주도 진압 명령을 거부했다. 사진은 국군 제14연대 제1기 하사관 후보생들(1948년)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여수시 연등동에 위치한 인구부 전투지. 왼쪽으로 구부러진 지형 때문에 인구부라 불리는 인구부 전투지는 여순사건이 일어난 후 1948년 10월 24일 진압군과 반군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됐던 대표적 격전지다. 

인구부 전부지는 지역적 특성을 잘 알고있던 시민들이 매복해 전투 사령부를 공격했던 곳으로, 진압군은 빈번히 여수 탈환에 실패했다. 실제 항쟁에 주요 구성원이었던 여수 시민들의 저항이 빛을 발했던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제주4·3도민연대는 이 외에도 학살 후 시신을 찾을 길이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고 ‘형제묘’라고 이름 붙인 만성리 형제묘, 여순 사건 당시 부역 혐의자로 잡혀 있던 종산국민학교 수용자 중 수백 명의 민간인이 끌려와 떼죽음을 당했던 만성리 학살지 등을 방문해 가슴 깊이 역사를 아로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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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만성리 형제묘.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됐던 부역혐의자들 중 125명이 1949년 1월 13일 이곳에서 총살되고 불태워졌다고 추정된다. ⓒ제주의소리

주 박사는 "희생자의 숫자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 벌어졌던 국가폭력도 인식해야 한다. 빨갱이로 내몰리고 이름조차 새겨지지 못한 비석을 보며 유족들이 얼마나 한스럽게 살았는지 알 수 있다. '많이 죽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함께 인식해야한다"고 전했다.

양동윤 제주4·3도민연대 대표는 "하루의 여정이었지만 눈으로 직접 보고 여순항쟁을 느꼈다.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사실도 알게 됐다. 하루 빨리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되길 바란다. 역사의 진보를 믿으며, 특별법 제정이 제대로 될 수 있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라는 말로 연대의 뜻을 전했다.

주 박사는 "제주4·3과 여순사건 모두 우리 스스로 인식체계가 먼저 변화돼야 한다.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비극의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닌 항쟁, 투쟁의 역사로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주4·3도민연대는 오는 19일 오전 10시 30분 이순신 광장에서 '여순사건 71주기 희생자 합동추념식' 행사에 참여하며 2박3일 여수 방문 일정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 여수=최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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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도민연대가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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