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 숨, 쉼] 가끔은 뒤돌아서 지나간 길도 보고

눈부신 가을 햇살이 도처에 널려있다. 씽씽 차들이 달리는 도로위에도, 작은 골목길 입구 낮은 돌담 아래에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 오솔길에도 햇살은 있다. 공평과 공정에 대한 말들이 부쩍 많아진 요즘 똑같이 따뜻하게 똑같이 아름답게 세상을 비춰주는 가을 햇살.

할 수만 있다면 잘 마른 햇볕을 모아 자루에 넣었다가 추운 겨울날에 한 줌씩 꺼내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하니 지금 가을 길을 걷기로 한다. 

걷다 보니 오만가지 생각들이 일어난다. 좋은 것을 아껴 모았다가 필요할 때 쓰는 것도 좋지만 때론 절정의 순간에 그냥 그 절정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로 우리 세대가 거친 청소년기, 청년기는 ‘무엇이 되기 위한’으로 가는 길이었다. 찬란한 미래의 꿈을 위해 현재의 욕망을 기꺼이 억눌러 참아야 하는 길. 물론 그 길도 의미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선택의 길’이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내의 열매를 기대하거나, 지금의 즐거움이 훗날 추억의 힘이 되거나.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내가 걸어온 길을 자식들이 걷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내 모습이 웃기다. 

돌보지 않으니 스스로 알아 살아야하는 우리 집 화단에 식구 하나가 늘었다. 한들한들 바람이랑 춤추는 코스모스. 언제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한 귀퉁이에 뿌리내려 꽃을 피운 것이 참 기특하다. 저 몇 송이 꽃들과 함께 하는 가을이 좋다. 사진=홍경희. ⓒ제주의소리
돌보지 않으니 스스로 알아 살아야하는 우리 집 화단에 식구 하나가 늘었다. 한들한들 바람이랑 춤추는 코스모스. 언제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한 귀퉁이에 뿌리내려 꽃을 피운 것이 참 기특하다. 저 몇 송이 꽃들과 함께 하는 가을이 좋다. 사진=홍경희. ⓒ제주의소리

웃기긴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오늘’을 살고 싶다는 생각은 떨쳐버릴 수 없다. 날마다 새롭게 오늘 하루를 뚜벅뚜벅 걸어가며 살고 싶다. 걷다 지치면 좀 쉬어가기도 하고, 걷다 예쁜 꽃을 보면 잠시 즐거운 대화도 나누고, 코끝을 스치는 바람의 향도 깊게 천천히 들이마시면서. 가끔은 해야만 하는 일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일을 과감하게 해보기도 하고. 가끔은 걷다가 뒤돌아서 걸어온 길을 보는 것도 좋겠다. 

내가 왜 이 길을 걷기 시작했지?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걷다가 이렇게 한번 씩 멈춰 서서 뒤돌아보지 않으면 길을 걷는 것에 에너지를 다 써 정작 어디로, 왜 가야하는 지를 잊어버릴 수도 있다. 종종 내가 친구들과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특히 경계해야하는 것 두 가지. ‘절대’와 ‘내가 아는 것’이다. 이 둘이 만나면 ‘무조건 나만 옳다’는 길로 가기 싶다. 이것은 앞만 보며 걸어갈 때 빠지기 쉽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가끔은 손차양을 하고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뜻밖의 상황을 만날 수 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전체가 아니라 부분을 본 것이어서 전체의 시선으로 보면 아집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뒤늦게라도 알면 다행이지만 잘 몰랐을 때는 여러모로 낭패다.

햇살 좋고 바람 서늘한 가을날은 이제 곧 지나가고 겨울이 올 것이다. 그러면 어떤가, 겨울이 오면 겨울 길을 걸으면 되지. 걷다 보면 봄날이 오고, 또 봄날이 지나가면 여름, 가을이 올 것이다. 그러니 그냥 오늘 이 길을 잘 걸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요즘은 참 날이 좋으니 더욱 걷는 것이 즐겁다. / 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 ( http://jejubook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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