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보다 가슴으로 다가오는 한국적인 햄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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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종이로 만든 배, 연극술사 수작 연극 ‘햄릿 더 블라인드(the blind)’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가 1600년 즈음에 쓴 희곡 ‘햄릿’(Hamlet)은 시대를 초월한 끊임없는 재해석 속에서 지금도 꾸준히 무대 위에 올리는 고전 명작이다.

국내 유명 예매 플랫폼 ‘인터파크’에서 ‘햄릿’ 공연을 검색하면 2004년부터 기록이 남아있다. 연극, 뮤지컬, 무용극, 판소리 등 장르는 물론이요 표현이나 해석에도 무수한 분화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 시선에서 극을 진행하거나, 햄릿을 보다 악독한 인물로 탈바꿈 하거나, 시공간을 옮겨 시대의 아픔과 고민을 나누기도 한다. 한국적인 혹은 동양적인 감각과 접목하는 경우도 있다. 소극장부터 대극장까지 전체 공연 수는 191건에 달하고 중복을 제외한 개별 공연 숫자만 추려도 얼추 150건이 넘어 보인다. 그야말로 재해석의 향연이다.

420년이나 지나도 현대인과 소통하는 생명력은 탄탄한 전개와 곱씹게 만드는 대사, 그리고 비극 위에서 관객과 감정을 공유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욕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2008년 창단한 극단 ‘종이로 만든 배’ 그리고 제주 배우 양승한이 몸 담은 극단 ‘연극술사 수작’은 24일부터 26일까지 제주대 아라뮤즈홀에서 연극 ‘햄릿 더 블라인드(the blind)’를 공연한다.

두 극단의 합동 제주 공연은 2015년 10월 ‘너, 돈끼호떼’ 이후 4년 만이다. '너, 돈끼호떼'는 방대한 소설 ‘돈키호테’를 양승한 배우 한 명과 즉석에서 소리를 만드는 폴리 아티스트 김범린 둘이서 소화한 1인극이다. 누가 뭐라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은 돈키호테의 정신을 빼어난 연기력과 흥미로운 효과음으로 표현하며 제주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번 ‘햄릿 더 블라인드’는 주인공 양승한을 필두로 총 14명이 출연한다. 배역은 원작과 동일하다. 왕자 햄릿(배우 양승한), 햄릿의 숙부이자 새로운 국왕 클로디어스(최지환), 고인이 된 남편의 동생과 결혼한 왕비 거트루드(김보경)까지 덴마크 왕실 인물과 주요 인물 대부분이 등장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두 달 만에 어머니가 숙부 클로디어스와 결혼한 사실이 무척이나 못마땅하고 괴로운 햄릿. 아버지의 영혼을 만나고 난 뒤 석연치 않은 죽음에 의심을 품는다. 미친 척을 하면서 자신에 대한 시선을 떨쳐낸 햄릿은 클로디어스가 아버지를 암살한 과정을 연극으로 제작하며 진실에 다가간다. 클로디어스는 내기 결투를 만들어 햄릿을 죽이려 하지만 계획이 어긋나면서 결국 햄릿, 거트루드, 클로디어스 모두 목숨을 잃는다.

24일 공연을 마친 '햄릿 더 블라인드' 배우들이 인사를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24일 공연을 마친 '햄릿 더 블라인드' 배우들이 인사를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 절제의 연출로 한국적인 정서 담다

‘햄릿 더 블라인드’는 원작을 충실하게 따라가면서 한국적인 정서를 녹여낸 장치들과 클라이막스에 방점을 찍는다. 그것은 소소한 흥미를 자아내는 정도부터 원작에서 느낄 수 없는 감정까지 망라한다. 

대표적으로 햄릿은 맹인이라는 설정을 부여받았다. 깊은 어둠 속 하나의 조명 빛줄기 안에서 햄릿은 쪼그려 앉아 주어진 운명에 괴로워한다. 보이는 건 오직 어둠뿐인 두 눈은 “죽느냐 사느냐” 읊조리는 햄릿의 절망과 답답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맹인 설정은 극의 마지막에서 나타나는 해원(解冤)과 이어지며 더 큰 감동을 선사한다.

'햄릿 더 블라인드'가 선사하는 가장 큰 재미는 한국 전통문화·정서와의 융합이다.

작품의 모든 소리는 북, 장구, 꽹과리, 징, 피리 등 전통악기와 폴리 아티스트 작업으로 만든다. 특히 전통악기들은 햄릿과 레어티즈의 결투신에서 조명과 함께 격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궁내부 내신 폴로니어스(박경은)는 판소리 창법에 부채와 지팡이를 지녔고, 무덤지기의 행동거지는 각설이를 떠올리게 한다. 햄릿의 당부로 국왕 내외 앞에서 열리는 연극은 흡사 중국 가면극이다.

'햄릿 더 블라인드'의 이런 시도는 눈과 귀를 자극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심정적으로 다가가는 영역까지 나아간다.

원작처럼 연극 결말은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며 주요 인물이 잇달아 목숨을 잃는다. 죽음만이 남아있는 무대. 쓰러진 망자들은 풍물패의 연주에 맞춰 한명 씩 일어선다. 그들은 생전 지녔던 왕관, 갑옷을 한쪽에 내려놓고 말없이 서로를 반갑게 맞이한다.

한때 적의를 품었던 대상이라도 상관없다. 권모술수와 고통이 가득했던 핏빛 무대를 뒤로 한 채, 망자들은 고통과 근심을 내려놓는다. 햄릿도 그제야 눈을 뜬다. 처음 보는 아버지를 꼭 껴안고, 원수처럼 미워했던 숙부 클로디어스와도 포옹한다. 모든 소리를 없애는 침묵의 연출은 탁월한 선택이다.

이 순간 ‘햄릿 더 블라인드’ 무대는 해원을 이룬 내세(來世)로 변모한다. 그것은 극락과 지옥으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인식과 다르다. 지난 과거를 서로 용서하는 '낙원'에 가깝다. 여기서 관객은 묘하게 따뜻한 위로를 받는다. 원통한 마음 모두 풀어내며 한(恨)과 죽음을 극복하는 '우리네' 정서가 녹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햄릿 더 블라인드'는 원작에서 느끼지 못하는 새로운 재미를 선사한다. 화려한 복장이나 무대 장치 같은 외형에서 굳이 '한국'을 강조하지 않았음에도, 전통악기와 극 말미 죽음에 대한 재해석으로 한국적인 햄릿을 만든다. 영원한 이상향 ‘이어도’, 서천꽃밭을 기억하는 제주도민에게 작품의 클라이막스는 더욱 반갑게 느껴질 것이다.

원작에 감명받은 사람이라면 '햄릿 더 블라인드'를 통해서 고요하게 깊은 여운을 남기는 새로운 '햄릿'과 마주하리라 본다. 앞서 햄릿을 전통문화에 접목시킨 사례(극단 집현의 '햄릿코리아', 연희단거리패의 '햄릿' 등)와 비교하는 재미도 있겠다.

주인공 햄릿을 연기한 양승한은 비통함에 빠진 모습에서 스스로 운명을 매듭짓기까지 감정의 흐름을 잘 이끌어 갔다. 지난 번 ‘너, 돈끼호떼’를 기억하는 입장에서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분위기와 연기는 복잡 미묘한 생각이 든다.

클로디우스를 연기한 최지환과 레어티즈의 김장동은 묵직하게 극의 중심을 잡았다. 무덤지기, 악사 등을 소화한 이건희와 한경애도 재치 있게 극 안에 녹아들었다. 무엇보다 악기 연주와 연기를 쉴 새 없이 오가며 병행한 배우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너, 돈끼호떼’가 삶의 의지를 불어넣었다면, 이번 ‘햄릿 더 블라인드’는 죽음을 극복하며 마음을 위로한다. 두 개 모두 기억 속에 오래 남을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제주 관객 맞춤형 유머와 폴리 아티스트들의 솜씨는 별미 같은 볼거리다.

‘햄릿 더 블라인드’는 25일과 26일에도 공연한다. 장소는 제주대 아라뮤즈홀이다. 25일은 오후 7시 30분, 26일은 오후 3시다. 관람료는 일반 3만원이다. 대학생 2만원, 중·고등학생 1만5000원 등 할인 혜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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