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5주년 특집-생존수형인 4.3을 말하다] ⑦ 김묘생 할머니 “4.3 구타 평생 고통” 2차재심 나서

1948년과 1949년 두 차례 군법회의를 통해 민간인들이 전국의 교도소로 끌려갔다. 수형인명부로 확인된 인원만 2530명에 이른다. 생존수형인 18명이 70년 만에 재심 청구에 나서면서 사실상 무죄에 해당하는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졌다. 사법부가 군법회의의 부당성을 인정한 역사적 결정이었다. [제주의소리]는 창간 15주년을 맞아 아직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전국 각지에 거주하고 있는 생존수형인을 만나 당시 처참했던 4.3의 실상을 전한다. [편집자주]

4.3생존수형인 김묘생 할머니. ⓒ제주의소리
4.3생존수형인 김묘생 할머니. 벌써 6년째 치매를 앓고 있는 김묘생 할머니의 머리에 질끈 동여맨 보라색 스카프가 인상 깊다. 할머니가 태어나고 자란 표선면 가시리의 따라비오름에는 이 가을, 저 보라색 스카프를 닮은 갯쑥부쟁이꽃이 흐드려져 있을테다. ⓒ제주의소리

'망각의 병' 치매가 그녀의 삶에 찾아든 것은 햇수로 6년째다. 음력으로 세는 먼 친척의 제삿날까지 하루도 어긋남 없이 챙겨왔지만, 이제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조차 쉽게 분간하지 못한다. 

그러나, 70년전 오늘날의 기억만큼은 생생하고 뚜렷했다. 생사의 문턱을 간신히 넘어서고, 영문도 모른 고난을 감수해야 했던 그날. 치매를 핑계로라도 가장 잊고 싶었을 기억이었을텐데..., 가장 깊게 각인된 4.3의 기억은 그렇게 잔인한 역설이 됐다.

"억울허주. 온 몸이 안맞은데가 어서. 평생 종아리에 이추룩 파스 붙영 다니고...나 언제 죽어질지 모르난 (재심 재판 받으러)나왔주게." (억울하지. 온 몸이 안맞은데가 없어. 평생 종아리에 이렇게 파스를 붙여서 다니고...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 나왔어)

18살 꽃다운 나이에 4.3의 광풍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김묘생 할머니(91)는 70년이라는 세월의 침묵을 뒤로하고 세상으로 나섰다.

[제주의소리]는 제주시 노형동에 거주하는 김 할머니의 자녀의 주택에서 그녀를 만나 조각난 기억과 자녀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4.3 당시의 상황을 되돌아봤다.

4.3생존수형인 김묘생 할머니. ⓒ제주의소리
4.3생존수형인 김묘생 할머니. ⓒ제주의소리

◇ 어머니 제삿상 앞에서 겨눠진 총구..."난 아무 죄 없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출신의 김 할머니는 3남 1녀의 막내딸이었다. 부모님은 물론 손 위 오라버니들과 나이차가 있어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가정 형편도 비교적 넉넉했던 편이어서 당시로선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기구한 운명은 한 순간에 몰아쳤다. 이른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것이 시작이었다. 김 할머니에게 어머니의 빈 자리는 큰 충격이었다. 그녀는 당시의 기억을 비교적 생생하게 증언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도 정확히 기억했다.

김 할머니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그날의 사건은 어머니의 삭망(상 중의 집에서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아침에 지내는 제사) 날이었다.

"우리 어멍이 돌아가셔서 제사 모시젠 했주. 오라방들이영 아주망(올케)들이영 군인들이 올라온덴 허난 다 도망치고. 난 어머니 삭망 날이어서 숨으러 안가고 제사 지냈지. 빙떡이영 고기영 밥이영 다 해놓았주."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제사 모시려고 했지. 오빠들과 올케들은 군인들이 올라온다고 하니까 다 도망가고, 난 어머니 삭망이어서 숨으러 안가고 제사 지냈지. 빙떡이랑, 고기랑, 밥이랑 다 해놓았지."

그때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김 할머니는 군인들의 수를 열댓명으로 기억했다. 그들은 뚜벅뚜벅 집 안으로 들어와 제사음식을 모두 먹어치우고 담배를 태우기 위해 성냥불을 요구했다.

성냥이 없다고 하니 군인들은 '그럼 어떻게 아궁이에 불을 뗐냐'고 으름장을 놓았다. '옆집에서 빌려다 썼다'고 답하자 군인들은 담장을 훌쩍 넘어 옆집으로 넘어가더니 그 집에 살고있던 노인을 총으로 쏴 죽였고, 노인의 초가에 불을 붙였다.

"'탕' 하는 소리가 나고 불씨를 준 하루방을 보난 난간에 넘어졍 이서. 그 다음엔 이제 나를 죽이러 오는거라. 나를 보면서 서쪽으로 돌아서라고 해서 돌아섰주. 경허고 총을 쏠라고 하니까 내가 (총구를)딱 잡았지. '난 아무 죄도 없는데 왜 총을 맞히려고 하냐', '뭐 때문에 나를 죽이젠 하냐'고 하난 나한텐 도망가라고 허멍 봐줘서." ('탕' 하는 소리가 나고 불씨를 준 할아버지를 보니까 난간에 넘어져 있었어. 그 다음에 나를 죽이러 오는거야. 나를 보면서 서쪽으로 돌어서라고 하니 돌아섰지. 그러고 총을 쏘려고 하니까 내가 딱 잡았지. '난 아무 죄도 없는데 왜 총을 맞히려고 하냐', '뭐 때문에 나를 죽이려 하냐'고 하니까 나한테 도망가라고 하면서 봐줬어."

김 할머니는 어떻게 도망가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불타는 집을 뒤로하고 뒷동산의 한 구멍에 숨어있었다고만 기억을 더듬었다. 택시를 탔다고 했지만, 당시 생활상을 돌아보면 치매 증세가 겹친 발언으로 풀이된다.

4.3생존수형인 김묘생 할머니의 종아리에 붙은 파스. 김 할머니는 4.3 당시 구타로 인해 평생 고통을 받아왔다고 했다. ⓒ제주의소리
4.3생존수형인 김묘생 할머니의 종아리 바깥뼈에 붙은 파스. 김 할머니는 4.3 당시 구타로 인해 평생 고통을 받아왔다고 했다. ⓒ제주의소리

◇ 불법재판에 의한 수형생활...모진 구타와 고문까지

김 할머니의 집은 가시리 내에서도 중산간에 위치한 곳이었다. 한라산 방면으로 몸을 돌리면 바로 야산과 맞닿아 있었다. 소개령이 내려진 후 아버지 소유의 집 세 채가 모두 불에 탔고, 일가족은 움막을 지어서 지냈다. 먹거리도 산을 타며 구해야 했다.

풀 속에 숨고, 동굴 속에 숨고, 간간히 마을을 오가며 생활하던 중 산 입구에서 경찰에 잡혔다. 김 할머니는 시기는 특정짓지 못하고 "산에 있어서 추웠을 때"라고만 기억했다.

"잡혀강 서귀포에서 열흘, 제주시에서 열흘 정도 살아서. 그 후젠 재판인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어디로 데려가긴 해나서. 왜 끌려가신지는 몰라. 주변에 누게 여러명 이서나신디 누군지는 몰라." (잡혀가서 서귀포에서 열흘, 제주시에서 열흘 정도 살았지. 그 뒤엔 재판인지 뭔지 모르지만 어디로 데려가긴 했었어. 왜 끌려갔는지는 몰라. 주변에 누가 여러명 있었는데 누군지는 몰라.)

수형인명부 상에 김 할머니의 언도일자는 1949년 7월 7일로 기록돼 있다. 내란죄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누구도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은, 명백한 불법재판이다.

김 할머니는 위가 없는 배(갑판으로 추정)를 타고 목포로 갔다고 했다. 전주형무소로 끌려간 김 할머니는 2개월 감형돼 10개월 수형 끝에 1950년 2월 출소했다.

수형 생활은 10개월이었지만, 당시의 사건은 평생 김 할머니를 옭아맸다. 감금 과정에서 이뤄진 무수한 고문과 구타에 의해 평생 통증을 달고 살아야 했다.

"어깨영 다리영 쇠몽둥이로 안 맞은데가 어서. 막 때리고..." (어깨랑 다리랑 쇠몽둥이로 안 맞은데가 없어. 막 때리고)

김 할머니는 인터뷰 도중 연신 어깻죽지를 주물렀다. 종아리 바깥쪽에는 파스가 길게 한줄로 붙어있었다. 김 할머니의 자녀 정순애씨는 "어머니는 평생 파스 없이 살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한 달에 파스 한 박스씩, 15~20만원이 꼬박꼬박 지출됐다고 했다.

4.3생존수형인 김묘생 할머니가 자녀 정순애씨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제주의소리
4.3생존수형인 김묘생 할머니가 딸 정순애 씨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제주의소리

◇ 뒤늦게 드러난 누명..."살아있을 때 꼭 해결해달라"

김 할머니의 억울한 누명이 밝혀진 것은 올해 초였다. 70년간 주변인들은 물론 자식들까지도 이 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 4.3생존수형인에 대한 재심 재판이 이뤄진 후 "김묘생이도 그때 같이 잡혀갔었다"는 가시리 동네 사람의 증언에 의해 4.3 당시의 기록들이 드러났다.

생존수형인의 재심 재판을 돕고 있는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4.3도민연대)'가 처음 찾아갔을 때만해도 김 할머니의 거부 의사는 상당히 거셌다. 

카메라만 들이대도 양 손을 휘저으며 입을 꾹 닫았다. 그때와 같이 빨갱이로, 간첩으로 몰릴까봐, 또 자신의 과거 이력이 드러났을 시 자식들에게 피해가 가해질까 두려웠던 탓이다.

사람들이 찾아간 직후 자녀에게 전화를 걸어 '총 들고 누가 잡으러 온다'고 말한 일도 있어 김 할머니의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긴 설득 끝에 부들부들 떨면서 겨우 당시를 증언했던 김 할머니다. 결국 그녀가 이제 70년만에 누명을 벗기 위한 불법재판 재심 청구에 나선다.

세상 밖으로 나선 그녀는 간절하고 명확한 바람을 되뇌이고 또 되뇌였다.

"나라에서 어떵 해주길 바라냐고? 당연히 보상을 해줘야지게. (억울하게) 내가 매 쳐맞고, 평생 아팡 해신디, 내가 얼마나 고생해신디, 무사 보상을 안해줍니까. 이제 언제 죽어질지 모르난...나 살아질때 꼭 좀 해결해줍써." (나라에서 어떻게 해주길 바라냐고? 당연히 보상을 해줘야지. 내가 매를 맞고 평생 아파했는데, 얼마나 고생했는데, 왜 보상을 안해줍니까. 이제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살아있을때 꼭 해결해주세요.)

가을 제주들판을 보라색으로 물들인 갯쑥부쟁이 꽃. 김묘생 할머니가 나고 자란 표선면 가시리의 따라비오름에는 70년 전에도 지금도, 흐드러지게 핀 갯쑥부쟁이 꽃으로 보라색 물결이 장관이다. 치매가 깊어갈 수록 동심으로 돌아가는 걸까. 김 할머니는 머리에 쑥부쟁이 꽃처럼 보라색 스카프를 단단히 동여맸다. 쑥부쟁이 꽃말이 '기다림'이라는 걸 김 할머니는 알고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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