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제주의소리 문화부 한형진 기자

지난 달 20일 열린 관덕정 차 없는 거리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지난 달 20일 열린 관덕정 차 없는 거리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지난 10월 20일 제주시 관덕정 앞 도로는 근래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졌다.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차량이 오가는 도로 위에는 어린 아이들이 분필을 잡고 마음껏 그림을 그렸다. 청소년들은 이곳 저곳에 놓인 푹신한 쿠션 위에서 느긋하게 책을 읽거나 여유를 만끽했다.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자연스레 작은 공연장을 만들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제주시는 지난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2019 대한민국 문화의 달' 사업을 추진했다. 문화의 달은 매년 지역을 순회하며 여는 정부 사업으로, 제주에서는 이번이 두번 째다. 사흘 동안 탐라문화광장, 칠성로 원도심, 관덕정 일원, 제주성지 등 제주시 일원에서는 각종 볼거리들이 펼쳐졌다.

산지천을 배경으로 둔 공연 방식의 기념식, 미디어아트 작품을 설치한 제주성지 등 다양한 문화 행사가 주목을 받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관덕정 도로 개방’은 시민 반응이 가장 좋았던 것으로 손꼽힐 만 하다.

중앙사거리부터 서문사거리까지 차량을 통제하고 자유롭게 거니는 경험. 그것은 제주도민들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광장의 기억을 불러 일으켰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도로를 칠판삼아 분필로 누구나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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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션 위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오카리나를 연주한다. 어느 제약도 없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지난 22일 제주도의회 행정사무감사에서 고희범 제주시장은 관덕정 차 없는 거리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다. 도의원들 역시 원도심 활성화의 일환으로 차 없는 거리에 힘을 실어줬다.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있다.

문화의 달 행사가 끝나고 제주도 도시재생센터는 관덕정 인근 상인, 주민 3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문화의 달을 통해 진행한 차 없는 거리에 대한 의견. 그 결과는 상당히 놀라웠다.

13명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정례화 찬성’, 14명은 ‘언제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고 답했다. 반대는 3명 뿐이었다. 압도적인 찬성 의견이다. 비록 표본 수가 적지만 극심한 주민 반발을 불러온 2017년 상황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졌다.

10월 31일 제주시는 문화의 달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이례적으로 고희범 제주시장까지 참석했다. 고 시장은 “연말까지 충분한 주민 의견 수렴과정을 거쳐, 내년 날이 풀리는 시기부터 차 없는 관덕정 거리를 정기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주민 의견이 가장 중요한 만큼 장·단점을 충실하게 듣고 진행하겠다"면서 2년 전 실수를 재현하지 않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여러 사람이 뜻을 같이하여 만나거나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국립국어원이 운영하는 개방형 한국어 지식 대사전 '우리말샘'에는 광장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단순히 널찍한 자리를 광장으로 부르지 않는다. 누구나 자유로운 목소리를 내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어야만 참된 광장이다. 이런 면에서 제주도민들에게 광장은 허락되지 않는 문화다. 언제까지 제주시청 옆 주차장과 도로에 모여야할까. 이번 차 없는 거리를 온전한 광장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자유롭게 모이는 행위' 자체를 일깨웠다는 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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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위에 차려진 프리마켓.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2019 대한민국 문화의 달에서 총감독을 맡은 김태욱 씨는 행사 전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이번 문화의 달은 상상력을 던지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새로운 시도를 통해 시민들의 문화적 감성을 자극하는 기회로 삼겠다는 그의 포부는 관덕정 차 없는 거리를 통해 이뤄지는 듯 하다.

날씨가 포근해지는 2020년 봄. 다시 한 번 뻥 뚫린 관덕정 앞 도로를 만나보고 싶다. 

p.s 제주시는 문화의 달 사업을 추진하면서 '지원은 하되 간섭은 없다'는 문화 예술 행정의 원칙을 잘 지켜냈다는 평가다. 몇몇 공무원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사전 검열을 저지른 서귀포시와 대비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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