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광의 제주 산책] 12. 흔들리는 가을 억새 꽃, 연민과 사념

사진=정은광. ⓒ제주의소리
사진=정은광. ⓒ제주의소리

들꽃들이 
무더기로 피어 있지만

그 중에 한 꽃
가까이 가보면 더 진한 향기로
세월의 내면을 말하고 있다.

세상 이치도
그렇다​.

그 사람을 멀리서 보면
그 사람은 어려움도
괴로움도 없이
시냇가의 햇살처럼
무심하게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바라보면
바람과 이슬 저녁노을이
흩고 지난
눈가에 희로애락과
잔주름도 섞여 있다.

꽃에게 말을 해보면
가슴에서 울리는 깊은
한 숨도
향기로 품어내고 있다.

​그렇듯
우리 삶은
모두가 깊은 애증과
번민이 스며있는데,

그것이
아름다움이다.

​언덕길에도
오솔길에도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집 모퉁이에도
꽃은 핀다.

하얀 꽃
노란 꽃
붉고 진한 꽃도 있다​.

그러나
지는 꽃은
그 꽃대로​

피는 꽃은
그대로
그냥 아름답다.​

​가까이서 보면
꽃들은 모두 황홀하다.

꽃의 황홀은
내 안의 연민이고 
기쁨이며 갈망의
여울목과 같은
깊은 사념의 놀이터다.

​늦가을 
억새 꽃 흔들리는
오름에 오르면​

살아서 춤추던 다른 꽃들의
영혼들도 함께 하고 있다.

생전에 이 땅에 바람과 돌과
함께 땅을 일구고 
노년에 부처님 공부와
염불을 좋아하시던

92세 어르신이 
얼마 전 들꽃처럼 
세상을 떠나시고
나는 그 영가에 
극락왕생을 빌어드렸다.

​49일 동안
조금 더 머무시다
서방정토 아름다운 가을 꽃길을 따라
가시다가​

인연이 있으면
겨울에 붉은 동백이나
노란 봄꽃으로 또 오세요….

 

# 정은광은?

정은광 교무는 원광대학교에서 원불교학을 전공하고 미술과 미학(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원불교 사적관리위원과 원광대학교 박물관에서 학예사로 근무하며 중앙일보, 중앙sunday에 ‘삶과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다년간 우리 삶의 이야기 칼럼을 집필했다. 저서로 ‘그대가 오는 풍경’ 등이 있다. 현재 원불교 서귀포교당 교무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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