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학교 밖 오늘]① 국영수 보다 ‘행복하게 사람과 살아가는 법’ 먼저 배우는 청소년들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일명 ‘수능’ 날이다. 입시경쟁을 통한 상급학교 진학만을 최상의 가치로 여겨온 우리나라 입시제도를 상징하는 날이다. 그러나 제도권 교육은 청소년들에게 창의성을 길러주기보다 반복적으로 지식을 주입하고 암기하는 방식을 강요해온 것이 사실이다. 엄밀하게는 ‘학습’만 있을 뿐 ‘교육’은 실종 상태라는 지적도 그 때문이다. 언론 역시 천편일률적 수능 보도를 반복하면서 소모적 ‘경쟁교육’을 부추겨 온 것도 숨길 수 없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2019 수능을 성찰의 계기로 삼아 ‘학교 밖’ 청소년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보기로 했다. 엄격한 의미로 교육은 온전히 가정의 몫이 아니라 국가의 몫이고 책임이어야 한다. 학교밖청소년도 물론 그 대상이다. 핀란드 등 교육 선진국가들처럼 교육만큼은 국가가 책임진다는 발상과 의식 전환이 필요하다. 제도권 교육 밖의 아이들도 우리에겐 소중한 미래다. [편집자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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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볍씨학교의 제주학사 청소년들. ⓒ제주의소리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온 국민의 시선이 쏠리는 국가적 행사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수험생에게 방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날아가려는 비행기도 멈춰세우고 구급차 사이렌까지 금지시키는 통에 그 중요성을 더 강조해 무엇할까.

그러나 다소 주목받지 못했을 뿐, 같은 시간 같은 땅에서는 또 다른 방법으로 삶을 영유해가는 청소년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광야의 들꽃처럼, 단단한 바위처럼 살아간다는 수식어가 누구보다 어울릴 아이들. 척박한 환경에 겸손히 맞서며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를 먼저 배우는 아이들. 또래의 친구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때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고민하는 아이들.

[제주의소리]는 수능을 맞아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 대안학교인 볍씨학교 제주학사 학생들의 24시간을 동행했다.

볍씨학교 제주학사 학생들. ⓒ제주의소리
볍씨학교 제주학사 학생들. ⓒ제주의소리

◇ 9학년 과정의 대안학교 '볍씨학교'...살아가는 법 배우는 제주학사

볍씨학교는 총 9년간의 교육과정으로 이뤄져 있다. 9학년은 우리나라 공교육의 중학교 3학년과 같은 나이다.

1학년부터 8학년까지는 경기도 광명시 소재의 볍씨학교 본교에서 교육이 진행된다. 모든 과목이 아이들의 주체적 삶을 이끌어내는데 초점이 맞춰져있지만, 기본적 소양을 갖추기 위한 교과공부 역시 포함돼 있다.

마지막 학년에 맞이하는 '제주학사' 과정은 보다 특별하다. 2명의 교사와 9학년 아이들은 그해 3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간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마을에서 생활과 배움의 공간을 마련해 함께 생활한다.

이 공간에서는 살아가기 위한 모든 활동들이 이뤄진다. 인문학, 철학 등의 교육도 진행되지만 그보다 원초적인 수준의 생존이다. 단순히 식재료를 공수하는 수준이 아니라 직접 기르고, 가꾸고, 수확해야 한다. 세면장이 필요하다면 세면장을 짓고, 숙소가 비좁다면 숙소 건물을 짓는다. 단순히 '현장체험' 수준이 아닌 살아남기 위한 활동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배움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다. 고된 하루 일과 속에서 마음 속에 감춰왔던 격정이 치솟더라도 이를 이겨내고 다스리는 과정이 매일의 일상에서 이뤄진다.

함께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 크나큰 교육의 장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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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밥을 짓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볍씨학교 제주학사 학생.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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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30분. 볍씨학교의 아침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눈을 뜨고 아침 밥을 차리는 일부터 볍씨학교 제주학사 청소년들의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제주의소리

◇ 별빛속에 하루를 깨우는 아이들...청소도 밥짓기도 스스로

아침 해가 아직 달빛을 밀어내지 못한 새벽 5시30분. 닭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볍씨학교 제주학사의 일과는 시작된다.

아궁이 앞의 학생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장작개비와 종이조각을 연신 불구덩이에 집어넣었다. 하루 동안 먹을 밥을 짓기 위함이다. 전날의 피로가 가시지 않은 듯 눈은 반쯤 감긴 상태였다. 

학사 안쪽에 자리잡은 부엌동에서도 칼질 소리와 찌개 끓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도마 앞 학생은 부스스한 머리에 목도 잠겨있었지만 손놀림만은 빠르게 움직였다.

볍씨학교 제주학사의 공식적인 일과는 오전 6시30분부터 시작이다. 다만, 당일 밥 짓는 당번은 한 시간 일찍부터 부지런히 준비해야 아침을 깨우는 친구들을 맞을 수 있다.

밥짓기 당번은 전날 잠들기 전에 결정된다. 딱히 순서를 정해놓지는 않았다. 그날그날 자원하는 식으로 번갈아가며 식사 당번을 맡는다. 나름의 순번대로 당번이 돌아가지만, 이 역시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결정할 몫으로 남겨뒀다.

청소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청소 담당구역을 정한다. 숙소동을 청소하는 '안집지기', 식당·부엌동을 청소하는 '흙집지기', 커뮤니티동을 맡는 '돌집지기', 마당을 청소하는 '바깥지기' 등을 그 자리에서 정한다.

청소의 난이도가 다름은 물론, 요령을 피우거나 꾀를 부리는 친구들이 왜 없을까. 하루 이틀이라면 감출 수 있겠지만 24시간을 부대끼며 살아가다보면 금세 티가 나기 마련이고,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에 호된 피드백이 돌아온다. 깨지는 과정 자체가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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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달리기를 하고 있는 볍씨학교 제주학사 청소년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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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요가를 하고 있는 볍씨학교 제주학사 청소년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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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저서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함께 낭독하고 있는 볍씨학교 제주학사 청소년들.

◇ 달리기-요가-묵상...매일 이어지는 '자신과의 싸움'

기상시간. 눈을 비비며 일어난 아이들은 옷가지를 대충 주워들더니 식당이 아닌 문 밖으로 엉금엉금 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출발하겠습니다!" 외마디 구령과 함께 냅다 뛰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매일 아침마다 2.6km 거리의 선흘리 마을길과 숲길을 달린다.

달리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기자도 뒤따라 뛰었지만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숨을 헥헥거리며 아이들이 멀찌기 사라져가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10분쯤 지났을까. 새벽 공기를 뚫고 아이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도착한 아이들은 크게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기록을 체크했다. 매일 아침 이어가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스스로 정해놓은 기준치를 달성하지 못하면 한번 더 뛰어야 하는 것이 학사 내 암묵적인 룰이다.

달리기 이후에는 숙소에 둘러앉아 요가를 하고, 톨스토이의 저서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함께 낭독한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 아침 첫 술을 뜨는 것은 7시30분쯤이다.

감사의 기도와 자신이 좋아하는 반찬을 양 옆의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식사가 시작됐다. 식사 시간 중에는 오늘 일과에 대한 간단한 나눔이 오갔다. 큼직한 놋그릇의 밥덩이를 말끔하게 해치웠다.

그 누구도 밥 한 톨 남기는 경우가 없었다. 식재료 하나하나에 어떤 정성이 깃드는지 몸소 체험한 아이들은 누가 시킨것도 아니었지만 잔반을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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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만지고 농사를 짓는 일은 이들에게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배움의 과정이다. 땅에서 생명을 수확해내는 과정이 오롯이 이들에게 가르침을 준다. 녹두 수확을 하고 있는 볍씨학교 제주학사 청소년.ⓒ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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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를 줍는 작업을 하고 있는 볍씨학교 제주학사 청소년. ⓒ제주의소리

◇ 오늘의 과목은 '콩-녹두 수확'...집짓기도 너끈

오전 8시30분 공식적인 일과가 시작됐다. 오늘의 과목은 콩-녹두 수확이다.

4명의 친구들은 일찌감치 외부 아르바이트에 나섰다. 2명은 목조주택 건설현장 아르바이트, 2명은 마을 내 식당 아르바이트 현장으로 갔다. 외부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것 역시 배움의 일환이다.

나머지 친구들은 새참과 농기구 등을 챙기고 인근 밭으로 향했다. 

3000여㎡ 가량의 밭에는 콩과 녹두가 한가득 심겨 있었다. 지난해까지 밀밭이었던 이 곳은 아이들이 직접 개간한 이후에 콩-녹두 밭으로 재탄생했다. 제초제 등도 일절 사용하지 않다보니 잡초를 제거하는 작업도 손수 이뤄졌다.

당장 내일 오후부터 비소식이 예보됐기에 아이들의 손놀림은 바빴다. 최대한 오늘 중으로 수확을 끝마쳐야 했다.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으면 콩이며 녹두며 꿩들이 쪼아먹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능숙하게 녹두와 콩을 골라내는 작업을 하던 보윤(17)이는 "물론 농삿일이 힘들기는 하지만, 먹을 것을 직접 키운다는게 재미있기도 하고, 애들(농작물)이 크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농사라고는 'ㄴ'자도 모르는 기자에게 눈을 반짝이며 녹두 껍데기 속 알맹이를 보여주기도 했다. 

밭 바로 옆에는 커다란 돌집 건물 두 채가 자리잡고 있었다. 아이들이 정으로 돌을 쪼아가며 직접 쌓아올린 건물이다. 오히려 교사들이 '대충 하라'고 걱정할 정도로 아이들은 온갖 정성을 쏟았다. 한 동은 기숙사, 한 동은 커뮤니티 시설로 사용될 예정이다. 이미 건축물로서의 기능을 모두 갖춰놓았고, 준공 검사만을 앞두고 있다.

이스라엘 대안교육의 대부가 제주를 찾은 김에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한 현장에서 아이들이 직접 돌을 쌓고 있는 것을 보고 연거푸 "I don't believe it(믿을 수 없다)!"이라고 탄성을 터뜨린 것은 유명한 일화다.

표상(17)이는 건물 한 켠에서 흩어진 기와조각을 치우는 작업을 했다. 발달장애가 있는 표상이는 제주학사 생활이 올해로 3년째다. 제주생활 초기에는 좌충우돌 어려움도 많았지만, 이제 어엿하게 후배들을 챙기는 선배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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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녹두를 수확하고 있는 볍씨학교 제주학사 청소년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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볍씨학교 제주학사 학생들이 손수 지은 돌집. ⓒ제주의소리

◇ "솔직하고 정확하게"...쌓여있던 감정 쏟아내는 '하루나눔'

고된 일과를 마치고 모든 친구들이 저녁상에서 하루를 나눴다. 스마트폰 등의 전자기기는 커녕 이렇다할 놀거리가 없는 이곳에서는 친구들과의 대화가 가장 큰 즐거움이다. 

청경채는 아삭한 식감이 좋은지, 물컹한 식감이 좋은지를 두고 한바탕 토론이 벌어졌고, 더 단맛을 내기 위해 얼마나 삶아야하는지도 대화가 오갔다. 누가 오리 소리를 더 잘 흉내내는지를 두고 한바탕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부모님과의 교류는 손편지를 통해 이뤄진다. 부모님을 나의 부모가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서 바라보는 객관화 역시 제주학사 아이들이 마주하는 교육 과정이다.

빨래 등 개인정비를 마치고 아이들은 돌집에 둘러앉았다. <독도는 우리땅>,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등의 노래를 부르고 '하루나눔'을 시작했다.

제주학사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과정이 이 '하루나눔' 시간이다. 각자 하루동안 있었던 일과 그 과정에서 느낀 점들을 친구들과 공유하는 시간이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공유한 내용을 갖고 피드백을 해준다.

으레 그랬듯이 이날도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외부 목조주택 건설현장에 갔던 한결(17)이와 수민(18)이가 서로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토로하면서다. 이전의 경험으로 건설현장이 보다 익숙했던 한결이에게 수민이의 행동은 다소 여유로워보였고, 수민이는 무엇을 해야할지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은 채 자신을 답답해하는 한결이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지극히 외부인인 기자가 옆에 있었지만 아이들은 감정을 나눔에 있어 매우 솔직했다. 당시의 상황을 하나하나 캐물어가며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되새겼다. 친구들과 선생님도 가세했다. 한 친구가 섭섭한 표정을 짓자 '왜 그런 표정을 짓느냐'며 굳이 다시 남아있는 감정을 끄집어냈다.

이 과정만 1시간20여분간 진행됐지만,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는 것을 모두가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일은 나름의 격동적인 일들이 벌어질 것이기에 오늘의 감정은 오늘로 끝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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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나눔을 하고 있는 볍씨학교 제주학사 청소년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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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나눔을 하고 있는 볍씨학교 제주학사 청소년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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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나눔을 하고 있는 볍씨학교 제주학사 청소년들. ⓒ제주의소리

◇ 또래 친구들과 결이 다른 진로 고민 '무엇을 하고 싶은가'

오후 11시가 넘어서 아이들은 서로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보윤이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나눠주고 싶다"며 유치원 교사가 되고싶다는 꿈을 발표했다. 가만히 지켜듣던 선생님도 사람 한 명 한 명에게 세세한 관심을 갖는 보윤이에게 잘 어울리는 직업이겠다고 격려했다.

수현(18)이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당당하게 공유하고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통령 탄핵 정국, 세월호 진상규명, 제주 제2공항 등 우리사회의 문제를 공유하고 바꿔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꿈이다.

사랑(17)이는 동물의 권리가 보장되고 평등한 세상을, 수민이는 음악이나 미술을 매개로 더 많은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삶을 꿈꿨다. 표상이는 죽어가는 공간을 행복하게 살리는 목수를, 한결이는 환경을 지키는 세상을 위해 자전거를 전파하는 일에 매진하고 싶다고 발표했다.

또래의 친구들이 겪는 '무얼 해야 하는가'라는 공통된 고민을 안고 있었지만, '무엇을 할 수 있을까'가 아닌 볍씨의 친구들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이 달랐다. 무엇보다 왜 그 꿈을 갖게됐는지에 대한 목표의식이 명확했다. 

하루 일과는 자정이 훨씬 지나서야 마무리 됐다. 아이들은 이튿날 아침에 또 오늘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밤하늘을 빛나게 해주는 달과 별, 세상도 내 마음도 환하게 비추는 달과 별이 좋다는 아이들의 노랫가사가 머릿 속에 맴돌았다. 별빛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볍씨의 친구들은 오늘도 성큼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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