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제주장애인문화예술센터 창작뮤지컬 ‘The Rainbow Runway’

제주장애인문화예술센터(센터장 최희순)가 올해로 3년째 창작뮤지컬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도민들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그 무대를 마주한 경우는 더욱 적으리라 본다.

지난 19일 오후 7시 제주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한 센터의 세 번째 창작뮤지컬 ‘The Rainbow Runway’(레인보우 런웨이)는 단 한번으로 막이 내렸지만 모처럼 기분 좋은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다.

작품 줄거리는 그리 새롭진 않다. 어릴 적부터 하늘에 뜬 무지개를 바라보며 상상력을 키운 이구석(배우 김대홍). 공무원으로 평생 살아온 아버지(배우 김칠성)의 기대에 부응하며 공직에 입문한다. 나름대로 진정성 있게 민원을 처리하지만 관행적인 업무에 충실 하라는 상관(김성일)과의 마찰로 큰 내적 갈등을 겪는다. 그러던 어느 날 본인의 꿈을 공감해주는 의상 디자이너 안그래 킴(김상홍)을 만나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길로 나선다.

출연진은 발달·지체 장애인들이 고루 모여 있다. 당연히 일반인 배우들이 출연하는 공연과 비교하면 대사 전달이나 연기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기 마련이다. 이런 기본 인식을 가지고 바라본 무대는 배우들의 진심, 대사와 노래의 내용, 연출 같은 짜임새에 자연스레 눈이 갔다. 그리고 레인보우 런웨이는 이런 기대 아닌 기대를 뛰어넘는 멋진 결과물을 관객들에게 안겨줬다.

작품은 출연진 역량을 배려해 세세하게 역할을 구분했다. 주인공 이구석을 연기한 김대홍은 희로애락의 감정 변화를 충실하게 보여줬다. 장애인연극제를 포함해 풍부한 연기 경험을 지닌 지체 장애인 김상홍·김성일은 1인 다역으로 공연의 완성도를 책임지는 중책을 부여받았다. 최희순 센터장은 직접 무대에 올라 준수한 노래 솜씨로 뮤지컬 연기의 중심을 잡았다. 지난 5월 제8회 전국 장애인 연극제에서 ‘목마른 남자’에 출연해 발랄한 연기를 선보인 박재원은 아들 구석이를 믿고 응원해주는 차분한 연기로 눈길을 끌었다. 특히 온전한 발성은 물론이고 홀로 서 있기도 어려운 배우 부정훈은 대사 없이 춤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모든 출연자가 각자 여건에 맞는 연기를 펼치도록 배치한 섬세한 고민을 느낄 수 있었다. 

올 한해 제주에서 만나본 일반인 극단들의 뮤지컬은 대사, 조명, 음향 같은 진행에 있어 크고 작은 실수가 심심치 않게 나오곤 했다. 레인보우 런웨이는 대사가 다소 막히는 정도의 실수가 한두 번 나왔을 뿐, 무대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허술하지 않은 균형감을 뽐냈다.

장애인 배우들은 주어진 역할에 몰입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살아있는 눈빛과 몸짓으로 집중했다. 여기에 상황에 맞게 장르와 감성을 달리한 노래들은 뮤지컬이라는 정체성을 완성했다. ‘안정된 삶’을 부르짖는 공무원 아버지의 연기는 트로트 멜로디, 주인공이 철없다고 놀리는 고등학교 친구들의 조롱은 힙합, 주인공의 튀는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 공무원 계장의 외침은 록 사운드에 실렸다. 정성이 담긴 작곡인 셈이다. 

무엇보다 모든 출연진들은 합창 부분에서 빠짐없이 라이브로 화음을 맞췄다. 물론 그들의 목소리가 엄격한 음악적 기준을 만족시키는 화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뮤지컬이란 이름을 내걸었지만 정작 무대 위에 울려 퍼지는 노래의 상당수를 녹음 파일로 대체하는 제주 극단 공연을 여럿 봤던 기자는 레인보우 런웨이 무대를 보며 부끄러움과 감동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온전히 이해 받을 때, 닭이 알을 깨고 나와 빛을 처음 만날 때처럼 자유로워지지”, “꿈을 꾼다는 것은 두려움을 떨쳐버리는 일이야.” 작품의 대사는 단조로울 수 있는 줄거리에 힘을 불어넣는 듯, 고민의 흔적이 느껴져서 좋았다. 

한때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 받았던 주인공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는다. 환한 웃음으로 무지개를 따라간 어린 시절처럼, 흔들리지 않고 본인의 미래를 향해 뚜벅 뚜벅 걸어가는 청년의 얼굴에는 언제나 무지개가 비춘다. 한때 자녀의 미래를 걱정한 아버지는 주인공이 만든 첫 번째 옷을 입으며 “네가 하는 일이 다 옳다”고 진심을 다해 자녀를 응원한다. 이구석의 인생은 더 이상 외딴 ‘구석’진 존재가 아니다. 환한 빛을 품은 ‘구석’(救晳)으로 다시 시작한다. 공연 말미, 출연진 모두가 처음부터 입었던 무채색 옷을 벗고 다양한 색으로 갈아입은 연출은 이날 소극장을 찾은 모든 이가 주인공처럼 꿈을 찾길 바란다는 응원의 메시지다. 

한 시간 넘는 러닝타임이 끝나고 나서 레인보우 런웨이는 그저 장애인들의 발표 자리가 아닌 어엿한 하나의 뮤지컬 작품으로 관객들에게 각인됐다. 

지난 19일 제주장애인문화예술센터의 창작뮤지컬 '더 레인보우 런웨이'의 무대 인사 모습. ⓒ제주의소리
지난 19일 제주장애인문화예술센터의 창작뮤지컬 '더 레인보우 런웨이'의 무대 인사 모습. ⓒ제주의소리

완성도 높은 무대가 있기 까지 센터와 배우들은 지난 6월부터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모여 연습에 매진했다. 무엇보다 2017년 '딜레마', 2018년 '바리스타즈'까지 3년 연속 창작 작업을 도맡은 민경언 대표(커뮤니티 아트랩 코지)의 수고가 컸다. 작품 홍보 자료 속에는 연출, 음악감독, 안무, 무대디자인, 조명디자인, 무대감독, MR제작, 작·편곡, 가사·각색에 민 대표 이름이 새겨져 있다. 무려 1인 9역이다. 극작, 의상디자인, 소품디자인, 가사·각색을 도맡은 신소연 작가의 노고도 빠질 수 없다.

민 대표는 “2월부터 극본, 작곡 작업에 착수해 6월부터 본격적인 연습에 착수했다”고 지난 과정을 설명했다. 더불어 “이 작품은 우리 안에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바람이 담겨있다. 무대를 위해 땀 흘려 노력한 배우들, 그리고 무대를 지켜본 관객 모두가 함께 변화하는 작은 계기가 된다면 충분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장애는 또 다른 예술의 표현입니다.”

최희순 센터장의 인사말처럼 레인보우 런웨이와 함께 한 순간은 우리가 자칫 뜬구름처럼 여기는 ‘꿈’의 가치를 장애인들의 노래와 몸짓으로 한층 더 깊게 공감한 예술의 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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