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50.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이진우 역, 책세상, 2019.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이진우 역, 책세상, 2019. 출처=알라딘.

1. “라떼는 말이야”

요즘 젊은이들이 인터넷에서 꼰대들을 비웃을 때 쓰는 말 중의 하나가 '라떼는 말이야'이다. 다소 TMI(too much information)가 되겠지만 이 칼럼을 읽을 젊은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설명을 하자면, 이 말은 늙은이들이 젊은이들한테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 때는 말이야'라고 운을 떼는 것을 두고 발음이 비슷한 ‘라떼’를 가져다 붙인 말장난이다. 요즘 학생들과 대화를 할 때 나도 모르게 ‘내가 젊었을 때는’하고 말하려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꼰대가 되었음을 느낀다. 사실 젊은이들은 나이든 사람들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이든 사람들의 지혜 따위는 스마트폰에 밀린지 오래다.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젊었을 적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이미 사라졌어야 할 과거의 어떤 것들이 마치 유령처럼 어슬렁거릴 때이다. 예컨대 공산주의, 공산당, 빨갱이 같은 단어들이 그런 것들이다. 그런 단어들이 인터넷이나 거리에서 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1980년대 학생 시절이 떠오르는 것이다. 수업보다는 데모를 많이 했던 시절 ‘공산당 선언’ 같은 불온한 서적은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옥에 갈 수 있는 위험한 금서였다. 어디서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를 등사한 유인물(등사라는 말도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모르겠지만)을 몰래 돌려보면서 과연 군부독재 타도의 끝은 공산주의 혁명인가 하는 뜻 모를 의문을 품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엔 아마도 데모하는 학생 중에 북한을 모델로 생각하는 주사파도 있었을 것이고, 노동자와 농민을 선동하여 공산주의 혁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학생도 있었을 것이다. 젊은 혈기에 혁명을 생각하는 것은 어찌 보면 건강한 것이다. 그러나 전경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저 책이나 읽고 살기를 바랐던 나와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혁명이란 너무 거창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 모든 사상적인 혼란들은 80년대 말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와 더불어 허망하게 사라졌다. 공산주의는 초라하게 끝났고, 냉전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대학가에서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을 읽으며 열변을 토하던 학생들은 슬그머니 하버마스니, 푸코니 하는 상대적으로 얌전한 사상가들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무도 나서서 공산주의 혁명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생각이 비현실적인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일부러 고백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자신들의 혈기 넘쳤던 20대의 추억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본가를 타도하고 노동자, 농민,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더 이상 억압과 착취가 없는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 꿈인가? 어떻게든 자본의 논리를 체득하여 온갖 굴욕을 감수하면서 취업하는 것만을 꿈으로 삼고 있는 요즘의 젊은이들을 보면서 우리 세대의 꼰대들이 ‘라떼는 말이야’라고 주접을 떠는 이유는 그런 낭만에 대한 추억 때문일 것이다. 내용은 다르겠지만, 베트남전이나 6.25를 겪으면서 공산주의와 싸워 이긴 추억을 가진 노인들은 더더욱 ‘라떼’를 찾고 싶을 것이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공산당 선언’을 읽히고 소감을 묻자 한 학생이 이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순간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몰래 읽었던 옛 추억이 떠올라 ‘라떼’를 찾을 뻔 했으나 침착하게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다. 그 학생의 말 속에 우리 시대의 진실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는 변했고, 공산주의는 더 이상 젊은이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2.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그런데 공산주의니 빨갱이니 하는 단어가 여전히 귀를 괴롭힌다. 공산주의는 80년대 말에 죽었으나 공산주의라는 말은 마치 유령처럼 여전히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자신들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쪽을 여전히 빨갱이로 지칭하는 사람들이 있다. 흥미롭게도 이런 일은 마르크스가 활동했을 당시에 똑같이 벌어졌던 일이다. 공산당 선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옛 유럽의 모든 세력이 연합하여 이 유령을 잡기 위한 성스러운 몰이 사냥에 나섰다.…[중략]…정권을 잡은 반대파들에게서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받지 않은 야당이 어디 있으며, 좀 더 진보적인 반대파나 반동적인 적수들에게 공산주의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난하지 않는 야당이 어디 있겠는가?(15쪽)

당시에도 정치적 입장이 다른 상대에 대해 비난할 때 ‘공산주의’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 소책자를 쓴 이유는 아무한테나 공산주의라는 명칭을 붙이지 말고 진정한 공산주의자에게만 그 명칭을 사용하도록 안내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본에서 매우 어렵게 이야기했던 자신들의 이론적 입장을 이 소책자에서는 매우 간결하고 쉽게 요약하고 있다. 

모두 네 개의 절로 나뉘어 서술된 ‘공산당 선언’의 첫 번째 절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저자들은 인류의 역사가 계급 투쟁의 역사라고 선언하고, 그들의 시대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라는 두 개의 계급으로 분열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저자들은 의외로 부르주아지의 역사적인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백년도 채 안 되는 지배 기간 동안 과거의 모든 세대가 함께 이룩한 것보다 더 엄청나고 더 거대한 생산력을 산출했다”(23쪽)는 것이다. 인류의 전체 역사에서 보면 물질적인 진보를 이루는 데 부르주아지만큼 공헌한 계급은 없다. 물론 그런 진보는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한 결과이므로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지와 끝장을 봐야 한다.”(32쪽) 두 번째 절에서 저자들은 공산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소유 일반의 폐지가 아니라 시민적 소유의 폐지”(36쪽)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재화의 개인적 소유를 금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의 소유 형태를 바꾸고자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즉 “공산주의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사회적 생산물을 취득할 권력을 빼앗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이 취득을 통해 타인의 노동을 자신에게 예속시키려는 권력을 빼앗는 것”(39쪽)이라고 설명한다. 세 번째 절에서는 당시 경합했던 다양한 사회주의 이론들을 비판하고, 마지막 절에서는 자신들의 입장을 천명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유명한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견해와 의도를 숨기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해야만 달성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 지배 계급은 공산주의 혁명이 두려워 전율할지도 모른다. 프롤레타리아들은 공산주의 혁명에서 자신들을 묶고 있는 족쇄 외에는 잃을 게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65쪽)

요약하자면, ‘공산주의자’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폭력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자는 주장을 해야 한다. 이 책을 왜 읽어야 하느냐고 묻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만약 있다면), 그런 주장을 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과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라고 지칭하는 사람도 모두 그저 ‘라떼’를 찾는 꼰대로 보일 것이다. 옛 추억을 떠나보내기는 힘들겠지만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놓아줄 때가 되었다.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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