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49. 농부는 개날 닭날 기는 공으로 산다

* 농부안 : 농부

도리깨질하는 제주 여성들

 

‘부지런 공은 하늘이 안다 했다. 아마 나라 안에 부지런으로 제주사람 따를 곳이’있을까. 특히 옛날 제주 선인들은 참으로 부지런했다. 

‘기는 공’이란 말은 그 부지런함을 구체적 행위로 표현한 것으로 실감이 넘쳐난다. ‘긴다’는 것은 ‘걷는다’, ‘뛴다’와는 다른 행보다. 너무 걷고 너무 뛰다 보니 지쳐 다음 동작은 자연히 ‘기는’ 쪽으로 가게 마련이다. 생각해 볼 일이다. 오죽 일을 했으면 그 지경이 될 것인가.

 ‘개날’과 ‘독날’은  한 달이면 서른 날에 붙여지는 12지(十二支)다. 꼭 그날에 밭에 나가 일한다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만날, 늘, 언제나’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이날저날 고르거나 가리지 않고 매일 일을 한다는 말이다.

동네 앞집에 한 아주머니 얘길 하게 된다. 
  
예순 댓 초로의 나이에 키 작고 몸집이 아주 왜소한데도 이만저만 강골이 아니다. 10년 연상이던 남편이 돌아간 지 10년, 귤밭 6000평을 거뜬히 혼자서 해 내고 있다. 약 치고 거름하고 전지하고 적화‧적과하고 따고 선과해 팔고. 귤농사가 어디 쉬운 일인가. 아들 넷이 있지만 다들 제 일이 있어 힘든 고비에 주말에나 거들어 나선다. 실제 혼자 힘으로 하는 그야말로 독농(篤農)이다. 지켜보면서 놀란다.
  
비 오는 날이 공치는 날이라, 비 날씨가 아니면 밭으로 나간다. 그렇게 귤밭에 매달린다. 새벽에 나가니 한 달이면 고작 두세 번밖에 얼굴을 대하지 못한다.

한번은 일하다 어깨를 크게 다쳐 병원에 드나드는 걸 보며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오른 팔과 어깨를 통 깁스하고 있었다.
  
이 아주머니가 해마다 갖다 주는 귤을 받아먹기만 하고 있으니 이런 얌체가 없다. 참 면구스럽다. 
  
지나가는 얘기로, 어느 정도로 과수원을 줄이면 좋지 않으냐 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집에 있는 것보다 밭에 가 일할 때가 더 좋다는 게 아닌가. 일을 즐긴다는 말로 들렸다. 아주머니에게 붙여진 별명이 있다. ‘들고냉이’, 매일 들고양이처럼 밭에 나간다는 뜻이 담겨 있는 아주머니의 또 다른 이름이다. 본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선인들, 특히 여인들은 아침에 밭에 나갔다가 물때가 되면, 집에 와 망사리 메고 바다로 자맥질했다. 이런 억척스러운 삶이 또 있을까. 그렇게 물과 뭍에서 농사하고 물질해 번 돈으로 아이들 먹여 키우고 대학까지 보냈다. 예전 집마다 자녀가 적었는가. 한 집에 대여섯이 보통이었다. 이른바 ‘빼 부러지게’(뼈가 부서지게) 일하지 않고서는 식구들 입에 풀칠도 어려웠다.

밭농사도 대충하지 않았다. 퇴비를 싣고 가 밭에다 깔고 나서 파종하고 김매고 거둬들여선 타작했다. 간간이 우마차를 썼으나 동네에 열을 넘지 못했으니, 8할이 등짐으로 지어 날랐다. 그 거둬들인 것들을 또 손으로 장만해 갈무리했다. 
  
심지어 농번기에는 밭에서 일하다 애를 출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대목에 이르러 서러운 생각에 가슴 쓸어내린다. 그렇게도 삶이 구차했으니….
  
밭일에 매여 몸이 땀에 절었고 어느 한 곳 성한 데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소출이 적었다. 밭이 푸석푸석한 화산토라 땅심이 박했다. 그러고도 몸이 삭아 내리게 농사에 매달렸다. 과연 농자천하지대본이 아닌가.

‘저를 읏다’라 한다. 일로 바빠 ‘겨를이 없다는 말이다. ’
  
‘농부안은 개날 독날 기는 공으로 산다’에는, 우리 선인들의 처절할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잰걸믐, 쉴 새 없는 손놀림 그리고 거친 숨소리에 섞여 긴 한숨소리가 새어나온다. 귀 기울일 일이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김길웅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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