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 숨, 쉼] 넉넉함 웃음의 길을 따라가고 싶어

제주해양경찰청 담벼락에 붙어있는 털머위와 낙엽들. 피고 진 꽃들이 한데 있고 낙엽들 사이로 누군가 살짝 버린 휴지도 보인다. 다향한 삶의 모습들이다.

지난 늦가을 어느 일요일 오후 집을 나섰다. 굽이굽이 골목길을 지나 제주여고 사거리에서 길을 건너 한라산을 뒤로 하고 내려가는 길을 걸었다. 왼쪽으로는 제주해양경찰청 담벼락 아래로 노란 털머위 꽃이 무더기로 피어있고 오른쪽으로는 듬직하게 구실잣밤나무가 서있는 길. 짧은 길이지만 너무 아름다워 특히 사랑하는 길이다. 그날도 대충 일할거리를 챙겨 가방에 쑤셔놓고 동네 커피숍으로 가는 길이었다. 가다가 길 한쪽에 털썩 앉아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뭐햄수가, 잣밤 주웜수가"(뭐 하십니까, 잣밤 주우십니까)

"나, 그자 심심행 나완"(나는 그냥 심심해서 나왔어)
 
이빨이 다 빠져 말소리에 바람이 함께 실려 왔고 허리가 많이 굽은 할머니가 허우당싹 웃고 있었다. 그때 나의 느낌은 가득 찬 편안함 이었다. 없는 것으로 가득 한 공간은 내가 마음대로 채울 수 있는 공간.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고 휴일이라 문 닫은 가게와 가게 사이 작은 네모 땅에서 잘 자라는 작은 나무도 보면서 걷다 보니 벌써 목적지에 도착했다. 할머니의 웃음이 마법가루처럼 온 몸에 배어있었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어 일찍 해가 떨어져 어둠이 가득 내린 초겨울 어느 날 저녁. 집 앞에서 동네 할머니를 만났다. 여느 때처럼 반갑게 인사했다. (내가 인사는 잘 한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나를 부른다.
 
"야.. 너 집에 미깡 이서? 어시믄 이거 가져당 먹으라. 나 이거 오늘 밭에 강 미깡 땄주게. 경행 호끔 얻어 완"
 
그러면서 할머니는 담벼락에 털썩 주저앉으시더니 배낭에서 샛노란 밀감을 꺼내 내 가방에 담아주셨다. 괜찮다고, 할머니 드시라고 하는데도 배낭 속에 있는 마지막 밀감 한 개까지 탈탈 털어 내게 주시고는 일어서서 가신다. 85세난 할머니가 하루 종일 일해 받아 온 밀감을 맛있게 까먹으며 빵이나 사다 드려야지 했는데, 지금도 사다드리지 못했다.
 
한 해가 밝았다고 호들갑을 떨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새해가 오고 있다. 또 한 살 나이를 먹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이건 뭐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니라 그냥 오는 것이다. 그냥 온다면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 아닌가. 언젠가 중학생 때 썼던 일기장을 걷어보니 “마흔이 넘으면 이 세상을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다”라고 쓴 게 있었다. 그런데 지금 사십 아니라 오십이 넘었는데도 그냥 저냥 살아가고 있다. 
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
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

나는 나이 드는 것이 싫지 않다. 젊은 날은 가끔 그립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냥 이 자리에서 남루하면 남루한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좋다. 그래도 바람이 있다면 나는 그자 심심행 나완,하면서 잣밤을 주워도 밝게 웃는 할머니의 웃음, 배낭을 탈탈 털어 아낌없이 밀감을 줄 수 있는 할머니의 넉넉함을 따라가고 싶다. 그 길을 잘 따라가면서 오늘이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 물론 날마다 오늘이 행복하진 않겠지만 오늘 되지 않으면 또 다른 오늘인 내일 하면 된다. 오늘 가면 내일 오고 그 내일은 또 오늘이 되니까. / 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 ( http://jejubooks.com )
 

 
그동안 부족함이 많은 바람섬 숨, 쉼을 사랑해주신 독자들에게 인사 올립니다. 모두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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