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특집] 열악한 업무환경 노출 제주 이동노동자들...벌이·여건·인식 노동환경 '삼중고'

성탄 전야인 24일 늦은 오후 업무에 나선 대리운전기사 고종운(가명)씨. ⓒ제주의소리
성탄 전야인 24일 늦은 오후, 겨울바람을 피해 버스정류장에서 콜을 기다리는 대리운전기사 고종운(가명)씨. ⓒ제주의소리

성탄 전야 거리엔 삼삼오오 모인 가족, 친구, 연인들의 온기가 가득했다. 세밑 한 해를 돌아보는 송년 분위기로 번화가 네온사인 밑에도 웃음소리가 들어찼다.

지난 24일 늦은 오후 제주시 아라동 버스정류장 한편의 중년 남성은 무언가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이미 막차는 끊긴 뒤였지만, 그는 휴대전화를 꺼냈다가 들여놓기를 반복했다.

올해로 10년차 대리운전 기사인 고종운(53.가명)씨는 두터운 점퍼에 의지해 차가운 겨울 밤공기를 견뎌내고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휴대전화 진동 소리가 그치가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연말이 대목이라고 하지만 예전만 같지는 않아요. 오늘만해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전혀 나질 않더라고요. 대리기사들도 원체 많아지다보니 자연히 경쟁도 늘었어요."

쉬는날은 1년 365일 중 열흘이 채 되지 않는단다. 주말·휴일을 가리는 것은 사치다. 모두가 쉬기 좋은 때가 곧 가장 바쁠 때. 이동노동자의 숙명이다.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거리의 기다림은 일상이다. 여름엔 더위와, 겨울엔 추위와 싸운다. 그나마 번화가에는 몸을 녹일 편의점이라도 있지만, 너무 외진 곳에서 콜이 들어오면 더욱 예리해지는 긴장감과 요즘같은 겨울철에는 칼날 같은 밤바람까지 온 몸으로 감내해야 한다.

간혹 TV나 신문기사를 통해 비춰지는 이른바 '진상 손님'도 그에겐 지극히 당연한 일상이다. 고씨는 예전에 비해 고객들의 매너가 많이 좋아졌다고 강조했지만, 그러면서도 대략 10명 중 한 명은 첫 대면부터 대뜸 반말을 던진다고 했다. 옆에서 담배 연기를 뿜어대고, 고막을 때리듯 음악을 틀고, 조수석 대시보드에 맨발을 올려놓더라도 대리기사는 '벙어리 냉가슴'일 뿐이다.

"자식뻘 고객도 많지요. 어떤 진상을 부리더라도 결국은 입 꾹 닫고 사는게 낫더라고요."

벌이라도 좋으면 무엇이 그리 고될까. 한 달을 꼬박 뛰어도 주머니 속에 들어오는 돈은 겨우 200만원 정도다. 그마저 보험료, 회사 수수료, 어플 이용료, 출근비 등으로 빼고 나면 한숨은 더 깊어진다. 고씨는 베테랑 기사인 자신에 비해 초보 기사의 벌이는 더 적을 것이라고 했다.

대리운전 일을 하는동안 건강도 부쩍 상했다. 언제부턴가 허리도, 무릎도 신음소리를 냈다. 10년 전에는 12시간을 꼬박 일했지만, 지금은 피크 타임 때 바짝 버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헤어진) 전 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어요. 올해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아빠가 크게 해줄 건 없어도 용돈은 줄 수 있어야죠. 딸 이름으로 보험도 들어놨고요. 따로 사는데도 일주일에 2~3번씩 꼭 아빠를 찾아오는 착한 딸이에요."

대화를 나누던 그의 휴대전화가 또 울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 행선지도 돌아오기에 수월했지만, 처음 듣는 식당 이름이었다. 네비게이션에도 쉽게 잡히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새로 생긴 식당이 아닌가 싶다. "5분 내로 도착하겠다"던 그의 마음이 바빠졌다. 수화기 너머로는 벌써부터 곱지 않은 타박이 들려왔다.

"손님 입장에서는 답답할만 하죠. 이 정도는 전혀 문제될 일도 아니에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목적지에 도착한 고씨는 곧 음식점 뒷편 주차장에서 고급 SUV 차량의 시동을 걸었다.

퀵서비스 음식 배달 기사 박준오(40.가명)씨도 성탄 전야의 저녁은 바빴다. 음식점마다 배달원을 고용했던 예전과는 달리 최근에는 대부분의 배달이 어플을 통한 '외주'를 통해 이뤄진다. 박씨는 투잡으로 벌이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 반 년 전쯤 거금 150여만원을 들여 오토바이 한 대를 장만했다. 지나고보니 병원비가 더 들어갔지만 이젠 본전 생각에 멈출 수도 없다.

"이 일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겠다 싶어요. 바쁜 시간대에는 배달이 늦어진다고 클레임도 들어오고요. 건수만큼 돈이 들어오다보니 마음이 급해져서 신호·차선 다 지키면서 일을 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성탄 전야인 24일 늦은 오후 업무에 나선 대리운전기사 고종운(가명)씨. ⓒ제주의소리
성탄 전야인 24일 늦은 오후 업무에 나선 퀵서비스 이동노동자 박준오(가명)씨. ⓒ제주의소리

욕심을 억누르고 신호만큼은 철저히 지켜오던 박씨였지만, 사고는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두 달쯤 일하며 오토바이 운전이 익숙해졌다 싶을 때쯤 어느밤, 4차선 도로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하던 중 1~2차선 사이에 정차해있던 운전석 문이 갑자기 열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박씨는 튕기듯 도로 위를 뒹굴었다. 아직도 다리의 철심을 빼지 못한 박씨는 완치되지 못한 다리를 끌고 두 자녀를 건사하기 위해 다시 밤거리를 내달렸다.

제주지역 이동노동자들의 열악한 업무환경은 현실이다.

제주특별자치도가 지난해 노사발전재단에 의뢰해 수행한 '제주지역 이동노동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8년 5월 기준 제주도내 대리운전 업체는 270개, 소속된 대리운전기사는 약 1240여명이다. 대리기사의 겨우 신규 등록과 채용, 이직 등이 수시로 이뤄지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올해는 이보다 조금 늘어난 수준으로 여겨진다.

지난해 6~7월 제주 대리기사 200명을 대상으로 한 노동환경 실태 설문조사에서는 열악한 업무환경이 보다 자세하게 드러나 있다. 손님으로부터 폭언 등을 한 달에 몇 번 당하는지 여부를 묻자 1회 16.4%, 2회 30.1%, 3회 15.8%, 4회 6.6% 폭언을 당했다고 답했다. 

고객이 대리기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한 기사는 61.8%에 달했고, '보통이다'는 29.4%였다. '그렇지 않다'는 답변은 8.7%에 불과했다. 콜센터 소속회사의 횡포를 묻는 질문에도 17.2%가 '매우 그렇다', 22.7%가 '조금 그렇다'고 답했다. 

대리운전으로 인한 사고나 질병의 위협 정도를 묻는 질문에도 '매우 그렇다'는 응답은 47.1%, '조금 그렇다' 21.5%, '보통이다' 19.4%로 집계됐다. 거의 모든 답변자들이 관절염, 시력장애, 디스크, 신경성 질환, 수면장애 등을 앓고있다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같은 기간 제주 퀵서비스 기사 1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도 열악한 노동환경을 보였다. 업체에 소속된 퀵서비스 기사의 보험가입 여부를 묻는 질문에 고용보험·산재보험에 가입됐다는 답변자는 각각 2명에 그쳤다. 

일각에서는 열악한 이동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위한 쉼터 등의 공간은 물론, 노동자 간 커뮤니티 조성의 필요성을 제언하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서초구, 중구, 마포구, 강동구 등 곳곳에 대리운전, 퀵서비스 노동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휴서울 이동노동자 쉼터' 등을 운영하고 있다. 광주 등의 대도시에도 선제적으로 이동노동자 쉼터가 조성돼 운영중에 있다.

제주에도 지난 7월 제주시청 인근에 개소한 '제주이동노동자혼디쉼팡'이 운영되고 있지만, 열악한 지역 여건 상 보다 많은 과제가 남아있다.

최희영 혼디쉼팡 사무국장은 "서귀포지역과 신제주권 지역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어려운 환경에 노출되기도 했지만, 단순히 이동노동자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적 개념이 아닌, 정보도 얻어가고 자신의 노동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짤막 인터뷰] 최희영 혼디쉼팡 사무국장

제주시 중앙로 226. 지역 최대의 번화가인 제주시청 큰 길가에 이동노동자들을 위한 쉼터가 자리잡은 것은 지난 여름이다. 7월 15일 개소한 '이동노동자혼디쉼팡'의 이용자는 조금씩 늘어나더니 최근에는 하루 60~70명의 노동자들이 활용하고 있다.

최승희 제주이동노동자혼디쉼팡 사무국장.
최희영 제주이동노동자혼디쉼팡 사무국장.

혼디쉼팡은 대리운전기사를 비롯해 퀵서비스, 학습지, 배달, 보험설계사, 강사 등 다양한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교육실, 상담실, 여성전용휴게실 등을 갖추고 있으며 발마사지기, 안마의자, 혈압측정기, 컴퓨터도 구비돼 있다. 24시간 운영된다.

이동노동자는 대부분 일정한 근무 장소가 없어 다른 직종에 비해 근무여건이 매우 열악하다. 상당 시간을 외부에서 생활해 날씨 등에 영향에도 취약할 수밖에 없다.

최희영 혼디쉼팡 사무국장은 "단순히 이동노동자들이 쉬는 공간으로만 만든 곳이 아니라 자신들의 노동의 조건과 삶의 조건을 바꿔갈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갈 수 있도록 조성된 곳"이라며 "이 공간에서 정보도 주고 받고, 다양한 노동 교육도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 국장은 "특수고용 노동자들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어떤 것이 있는지, 개별적으로 알아보는데는 한계가 있다. 노동자 개개인이 찾아보기 어려운 정보를 설명해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이용자들의 만족도도 높았다"고 했다.

또 "건강과 파산·채무 교육 등을 준비하니 관심있는 이들이 찾아왔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전개했고, 내년에도 좀 더 적극적으로 노동자들의 필요를 찾아 프로그램을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 국장은 "이용자들이 처음에는 '무료로 마음 편히 와도 되느냐' 경계심이 있었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게 서비스를 제공받고 있다"며 "이동노동자들의 업무 특성 상 각 지역별로 쉼터와 같은 역할을 할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2~3호점이 생겨서 연계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말했다.

제주이동노동자혼디쉼팡.
제주이동노동자혼디쉼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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