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2주년 기획] 4.3피해 회복탄력성 (3) 제주4.3 관련 사회 변화와 회복탄력성 ②

제주4.3은 현재 진행형인가? 아니면 70여년이 지난 이미 끝난 일인가? 최근 법원의 군법회의 공소기각 판결을 보더라도 4.3이란 족쇄를 풀지 못한 억울한 시민들이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 긴 시간이 흐르면서 4.3을 겪은 피해자들의 마음은 어느 정도 나아졌을까. 전 국무총리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 김종민은 최근 제주학연구센터의 지원을 받아 ‘4.3피해자 회복탄력성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4.3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긴 피해자들의 이야기와 함께 그들의 내적 회복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제주의소리]는 4.3 72주년을 맞아 김종민 전 전문위원의 연구를 1월6일부터 매주 월요일, 목요일 총 8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1-4-2 유족회

▶ ‘반공유족회’ 발족

4.3유족회의 첫 출발은 4.3사건 때 무장대에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의 유족, 이른바 ‘반공유족’에 의해 비롯되었다. 1988년 10월 30일 탐라자유회관에서 150여 명의 유족이 모인 가운데 ‘제주도4.3사건 민간인반공희생자유족회’(이하 ‘반공유족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회장에는 송원화, 부회장으로는 김병언·오인규가 선임되었다.

반공유족회는 창립총회에 앞서 1988년 5월에 3명이 모여 발기인 모임을 열고 반공유족회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8월 8일 일간지에 광고를 게재해 반공유족들의 참여를 촉구했는데, 가입 대상은 ‘4.3사건 당시 공비들에게 납치 또는 습격으로 인해 피살된 민간인 가족’으로 제한했다.

반공유족회의 창립 배경은 그 무렵 폭발적으로 분출하기 시작한 4.3진상규명운동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공유족회가 창립된 1988년은 4.3무장봉기 발발 40주년을 맞는 해로서, 1년 전 ‘6월 민주항쟁’을 계기로 조성된 민주화 열기 속에서 4.3논의가 오랜 침묵을 깨고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와 같이 1988년에 폭발적으로 분출된 4.3논의는 반공유족회 출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반공유족회는 조직 명칭을 바꾼 후 1990년 11월 21일 조직강화대회를 개최했는데, 아래 소개하는 이 행사의 안내서에 실린 ‘취지문’은 반공유족회의 출범 배경과 그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제6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민주화의 열기에 편승하여 일부 몰지각한 세대들은 4.3사건을 왜곡, 건국 혼란기를 틈탄 적화(赤化)를 위한 남로당의 폭동 지령으로 선량한 제주도민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인민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이른바 인민항쟁이라고, 비정(批政)과 압정에 항거하여 자연적으로 발생한 반정부운동, 즉 민중항쟁으로 호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로 인하여 1만 2천 여 유족은 물론 50만 도민은 통한을 금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유족들은 망각과 수수방관으로 도민들을 현혹시키고 사회혼란을 가중시키며 가신님들을 욕되게 하는 현실을 보다 못해 지난 88년 10월 공비(共匪)에게 희생된 일부 유족들로 민간인 반공유족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문법에도 맞지 않는 비문이기는 하지만, 위 취지문을 통해 1988년부터 분출한 4.3진상규명운동이 반공유족회 출범의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또한 4.3사건을 ‘남로당의 지령에 의한 공산폭동’이라고 규정한 것은 반공유족회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반공유족회는 1988년 10월 30일 출범한 이후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1989년에도 3월 20일에 사무소 개소 및 현판식을 연 것 외에는 아무런 활동이 없었다. 1990년에 접어들어도 임원회의만 몇 차례 개최했을 뿐 희생자 위령행사도 하지 않았다.

▶ ‘4.3민간인유족회’로 개칭

반공유족회는 1990년 6월 5일 임원회의를 열어 ‘제주도4.3사건 민간인희생자유족회’(이하 ‘4.3민간인유족회’)로 조직의 명칭을 바꿨다. 1988년 10월 30일 반공유족회로 출범한 지 1년 7개월가량 지났을 무렵이었다.

반공유족회가 4.3민간인유족회로 개명한 까닭은 ‘반공유족’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4.3사건 희생자 중 무장대에게 희생된 이른바 ‘반공희생자’ 숫자는 전체 희생자의 10%가량으로 군·경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사람보다 훨씬 적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수적 열세인 반공유족이 유족의 대표성을 갖고 외연을 확대하기 위해선 조직 명칭에서 ‘반공’을 떼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공유족회가 ‘반공유족’만을 회원으로 하여 첫 출범할 때에는 이와 같은 수적 열세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 듯하다. 당시는 희생자 숫자가 도대체 몇 명인지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하던 때였다. 반공유족회는 출범 후 ‘반공희생자’의 숫자를 파악하는 데 힘썼다. 그 결과 월간 관광제주에 반공희생자 명단이 처음으로 실렸다. 월간 관광제주는 향후 반공유족의 핵심인사로 활동하게 되는 박서동 씨가 발행·편집인인 잡지였다. 

8개월간 조사해 ‘반공희생자’ 1284명의 명단을 파악한 월간 관광제주는 위 편집자 주 말미에 “진압과정에서 희생된 억울한 분들의 명단도 조사되는 대로 공개하겠습니다”라며 군·경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도 조사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대략이나마 희생자 실태를 파악한 반공유족회는 1990년 6월 5일 조직 명칭을 4.3민간인유족회로 바꾸게 되었다. 회장 송원화, 부회장 김병언, 총무부장 박서동, 재정부장 오균택, 조직부장 김성수 등이 회장단과 집행부였다. 조직 명칭은 바뀌었으나 회장단과 집행부는 여전히 ‘반공유족’이었다.

▶ 회장단 교체, ‘반공색채’ 탈피 계기

반공유족회가 4.3민간인유족회로 개칭됐으나 ‘반공’이라는 조직의 성격은 오랫동안 지속됐다. 이는 회장단이 ‘반공유족’ 위주로 승계되었기 때문이다.

유족회의 반공 색채는 유족회 ‘정관’에 잘 나타나 있다. 반공유족회(4.3민간인유족회)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와 ‘좌경세력 대처’를 조직의 목적으로 정관에 명시했다. 이는 4.3사건에 대한 유족회 주도세력들의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4.3사건을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폭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나중에 ‘행방불명인유족회’와 통합해 출범하는 ‘제주4.3희생자유족회’의 정관(목적)과 비교하면 <표>와 같다.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한편 4.3민간인유족회는 1990년 11월 21일 조직강화대회를 마친 후 각 읍·면에 지회를 결성하는 데 힘썼다. 유족회 이름에서 ‘반공’이란 글자가 삭제되자 지회 결성이 순조롭게 진행됐는데, 선임된 지회장 대부분이 군·경 토벌대에게 희생된 사람의 유족이었다.

그런데 읍·면 지회가 결성됨으로써 회원이 많아지는 등 유족회가 활성화됐지만, 어쩐 일인지 회장직은 처음부터 순탄하게 이어지지 못했다. 송원화 초대 회장은 3년 여 간 회장직을 수행하던 중 1992년 1월 28일 갑자기 사임했다. 

후임은 역시 반공유족인 김병언 회장이었다. 김병언 회장은 송원화 회장이 사임한 후 직무대리를 1년간 맡은 후 정식 회장으로 취임해 제2대와 제3대 회장을 역임했는데, 임기 2년을 채우지 못한 채 사퇴과 취임을 반복했다.

김병언 회장이 취임과 사임을 반복한 주된 이유는 박서동 총무부장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박서동 총무부장은 자신이 대표로 있는 월간 문화제주를 통해 위령탑 건립비 모금에 열중했다. 또한 군·경 토벌대에게 희생된 사람의 유족들에게 적극 권유해 읍·면 지회를 결성토록 함으로써 유족회의 외연을 크게 넓혔다. 6.25전쟁 직후 모슬포경찰서 관내에서 예비검속돼 학살당한 사람들을 위령하는 ‘백조일손영령 위령비’를 세우는 데에도 박서동 총무부장이 앞장섰다. 박서동 총무부장은 월간 문화제주에 광고를 내어 모금한 희생자 위령탑 건립비용을 유용해 큰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에 반해 김병언 회장은 유족회의 ‘반공 색채’ 유지를 중시했다. 1994년 열린 위령제 때 이덕구 무장대 사령관의 위패가 진설됐다는 이유로 1차 사퇴하기도 했다.

내부 갈등 끝에 김병언 회장이 중도 사퇴하자 오선범이 새 회장으로 선임됐다. 군·경 토벌대에게 희생된 사람의 유족이 처음으로 회장이 된 것이다. 이는 유족회의 성격이 크게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대부분의 회원은 물론 읍·면 지회장들이 군·경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 유족이었음에도, 그동안은 반공유족인 회장과 집행부가 주도권을 갖고 유족회를 이끌어왔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반공유족이 8년가량 유족회를 좌지우지해온 것이다.

그러나 오선범 회장이 취임함으로써 유족회의 성격이 바뀌기 시작했다. 오선범은 회장으로 선임되기 전부터 4.3민간인유족회 서귀포시 서부지회장을 맡았고,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의 희생자 조사요원으로 활동하는 등 4.3진상규명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왔다. 회장으로 선임되기 몇 달 전에는 서귀포시의회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다.

그런데 오선범 회장은 임기 2년을 채우지 못한 채 취임 1년 만에 중도 사퇴했다. 오 회장이 사임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전임 집행부와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임 집행부의 총무부장인 박서동은 여러 차례 요구를 받고도 유족회의 각종 서류와 통장을 넘기지 않았다. 특히 희생자 위령탑 건립비용으로 모금한 거액의 기금을 인계하지 않았다. 오선범 회장이 사퇴하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서귀포시의회 의장으로 선임됐기 때문이었다. 위령탑 건립기금을 인수하기 위해 법적 소송까지 준비했지만, 시의회 의장으로서 전임 집행부와 갈등을 벌이는 것에 부담을 느껴 유족회장 직을 사퇴한 것이다.

오선범 회장이 사퇴하자 후임으로 박창욱이 1997년 2월 24일 제5대 회장으로 선임됐다. 박창욱 회장도 군·경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 유족이었다. 박창욱 회장은 연임돼 2001년 3월 3일까지 제6대 회장도 역임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오선범 회장이 1996년 2월 25일 취임한 이래 4.3민간인유족회의 ‘반공 색채’는 많이 희석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제주사회를 짓누르고 있던 ‘레드 콤플렉스’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 '수형인명부' 발굴…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 창립

2000년 3월 13일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이하 ‘행불인유족회’)가 창립되었다. 행불인유족회의 결성은 1999년 9월 15일 당시 집권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 추미애 의원이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에서 '수형인명부'를 발굴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수형인명부'에는 4.3사건 당시 ‘4.3군법회의’에 회부돼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돼 있다가 대부분 6.25전쟁 직후 학살된 제주도민 2530명의 명단이 기재돼 있었다.

‘4.3군법회의’라 함은 1948년 12월과 1949년 6~7월 등 두 차례에 걸쳐 제주도에서 마치 열렸던 것처럼 허위로 자료에 기재된 군법회의를 가리킨다. 이 자료의 표지에는 수형인명부 군법회의분(受刑人名簿 軍法會議分)이라 적혀 있고, ‘제주지방검찰청’이 작성한 것처럼 쓰여 있다. 

'수형인명부'는 표지 외에 총 128쪽으로 구성돼 있는데, ‘고등군법회의 명령’ 등 문서 20건(총 22쪽) 외엔 모두 ‘별지(別紙)’이다. 별지에는 수형인의 인적사항이 도표로 정리돼 있다. 수형인명부에 기재된 사람은 제1차 군법회의 때 870명, 제2차 군법회의 때 1660명이다. 이를 정리하면 <표>와 같다.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두 차례의 군법회의에서 제주도민들은 사형, 무기징역, 20년형, 15년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군·경 토벌대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극을 자행하던 ‘초토화작전기’인 1948년 12월의 제1차 군법회의에선 전체 수형인 870명 가운데 사형이 4.5%, 무기징역이 7.6%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당시는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돼 있던 때여서 민간인을 군법회의에 회부해 모두 일제 형법 제77조 내란죄를 적용한 것이다. 

무장대가 궤멸되어 사건이 거의 종결되었다고 여겨지던 때인 1949년 6~7월의 제2차 군법회의에서는 전체 수형인 1660명 가운데 사형이 20.8%, 무기징역이 14.3%의 비율을 차지해 제1차 군법회의 때보다 더욱 가혹한 피해를 당했다. 이때는 계엄령이 해제된 때라 민간인을 군법회의에 회부할 수 없었기에 국방경비법을 적용했다. 국방경비법은 기본적으로 군법(軍法)이므로 대개의 조문은 “군인 및 군속으로서~”로 시작된다. 그러나 제32조(이적죄)와 제33조(간첩죄)만은 “여하한 자로서~”로 시작된다. 이를 근거로 민간인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던 것이다. 

그러나 군법회의의 근거가 된 ‘4.3계엄령’은 헌법의 규정을 위반한 채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포된 불법적인 것이다. 국방경비법은 제정 주체도 모호하고 법률 호수도 없는 유령법이다. 계엄령의 불법성과 국방경비법의 유령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4.3군법회의는 실체가 없는 허구의 재판이다.

4.3군법회의에 관한 수형인명부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오류투성이인 허구의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수형인명부 ‘별지’는 도표 형식인데, 수형인 한 명당 △순번(順番) △직업(職業) △성명(姓名) △연령(年令) △본적지(本籍地) △항변(抗辯) △판정(判定) △판결(判決) △언도일자(言渡日字) △복형장소(服刑場所)가 딸랑 한 줄씩 기재돼 있다. 주소지를 적는 칸도 없다. 판결문이 첨부돼 있는 것도 아니다. 행형기록이라고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부실한 문서이다.

그런데 '수형인명부'가 허위로 작성된 문서이긴 하지만, 4.3사건 때 제주도민들이 불법 감금되거나 학살당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수형인명부'가 발굴되기 전에도 일부 유족들은 희생자들이 형무소에 수감돼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소문을 듣거나 또는 희생자들이 형무소에서 보내온 엽서를 통해 수감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유족들은 희생자들이 집을 나간 후 소식이 끊겼기 때문에 생사조차 알 수 없어 오랫동안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또한 희생자들이 형무소에 수감됐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뚜렷한 근거 자료가 없었다.

그러나 '수형인명부'가 발굴됨으로써 희생자들의 수감 사실이 명확히 확인되었고, 유족들은 ‘복형장소’에 기재된 형무소 이름을 보고 희생자들이 어느 형무소에 수감됐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한편 '수형인명부'가 공개된 지 3개월 여 지났을 때인 1999년 12월 24일자 제민일보에 6.25전쟁 때 형무소 수감자들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학살당했음을 확인해 주는 미국 비밀문서 3건과 관련 사진 18장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내용은 이후 한국일보에도 보도됨으로써 전국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재미사학자 이도영 박사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 비밀해제를 공식 요청해 확보한 자료를 제민일보에 제보함으로써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문서에는 “총살명령은 의심할 바 없이 최고위층이 내렸다”고 쓰여 있었다. 문서에는 또한 “대전형무소 수감자 1800명이 1950년 7월 첫째 주에 3일간 벌어졌다”는 내용도 있어 유족들이 희생자의 사망일자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수형인명부에 이름이 기재된 사람들이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분산 수감돼 있다가 대부분 6.25전쟁 직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학살당했음이 확인되었다.

 ▶ 멍에를 벗은 강력한 유족회

4.3사건 때 행방불명된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제주도내에서 희생되었으나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수형인이다.

수형인 유족들은 일반적인 4.3희생자 유족들보다 훨씬 더 심하게 연좌제에 대한 피해의식과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려왔다. 어느 날 갑자기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킨 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집단총살한 ‘북촌리 사건’과 같은 경우는 보수인사들조차 무모한 학살극임을 인정하는 터이므로 유족들은 ‘억울함’을 토로할 수 있었다. 

또한 같은 행방불명인이지만 군.경 토벌대에게 끌려간 후 제주도내에서 죽임을 당한 희생자의 유족들은 1988년부터 본격화된 진상규명운동의 결과로써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수형인 유족들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며 언론 취재에도 잘 응하지 않았다. ‘뭔가 죄를 졌으니 형무소에 수감된 것 아니냐?’는 눈총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99년 9월 15일 '수형인명부'가 공개됨으로써 희생자들이 정상적인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은 ‘엉터리 재판’으로 불범 감금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같은 해 12월에는 이도영 박사가 발굴한 미국 비밀문서를 통해 수감자들이 불법적으로 학살당했음이 확인되자 수형인 유족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1999년 12월 16일 국회에서 4.3특별법이 통과되자 조직 결성에 박차를 가했다.

행방불명인 유족들은 2000년 3월 13일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 창립대회’를 개최했다(공동대표 김문일, 박영수, 송승문, 이중흥, 한대범). 제주민속관광타운 대강당을 가득 메운 이날 창립대회에서 유족들은 4.3행불인에 대한 법적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에 나설 것임을 천명했다. 또한 제주공항에 암매장된 희생자의 시신 발굴과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대한 순례 및 자료조사도 병행하겠다고 밝혔다.

행불인유족회는 정관에 “4.3으로 억울하게 희생되어 행방불명된 희생자의 법적.제도적 명예회복을 위한 제반 사업을 통하여 진정한 도민화합과 새천년 제주도 공동체 건설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하는 등 조직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법적·제도적 명예회복’을 위해 앞장서겠다고 천명한 것은 기존 4.3민간인유족회의 태도와 큰 차별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반공유족회에서 출발한 4.3민간인유족회는 8년 만에 군.경 토벌대에게 희생된 유족들이 주도권을 갖게 되었지만, “희생된 민간인의 원혼을 위로하며 나아가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고 좌경세력에 대처”한다는 정관(목적)도 바꾸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행방불명인 유족들은 오랫동안 피해의식과 레드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일반 유족들보다 더욱 움츠러들었지만, 스스로 멍에를 벗어던지고 밖으로 나서자 가장 강력한 유족 집단이 되었다.

행불인유족회는 또한 2000년 5월부터 전국의 형무소 터를 방문해 위령제례를 치렀는데, 이때를 시작으로 매해 형무소 순례를 하며 결속력을 다져나갔다. 행불인유족회는 이밖에도 4.3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누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그 위상을 급속히 높여갔다. 

▶ 통합유족회 출범

행불인유족회가 창립되자 4.3유족들은 기존의 ‘4.3민간인유족회’와 ‘행불인유족회’로 양분되었다. 이는 두 유족회 모두에게 곧 부담으로 다가왔다. 마치 두 유족회 간에 서로 갈등과 알력이 있는 것처럼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4.3특별법이 제정돼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사업이 본격화되는 시점에 하나로 똘똘 뭉쳐야할 유족들이 둘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은 외부에서 보기에도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었다.

이에 두 유족회는 4.3특별법에 따른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구성되던 날인 2000년 8월 28일 대표자 연석회의를 열어 통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 (가칭)제주도4.3사건희생자유족회 창립위원회는 2001년 2월 28일 제주도의회 도민의방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두 유족회의 통합을 공식 선언했다. 두 유족회가 발전적 해체를 한 후 하나의 유족회로 새 출발할 것을 천명한 것이다. 이어 3월 3일 ‘제주도4.3사건희생자유족회’ 창립대회가 개최됨으로써 새로운 유족회가 출범했다. 

한편 통합유족회는 2007년 3월 3일 ‘제주도4.3사건희생자유족회’라는 명칭을 ‘제주4.3희생자유족회’로 바꾸었다. 향후 4.3의 정명(正名)을 위해 ‘사건’이라는 무색무취한 단어를 뺀 것이다.

1-4-3 제주4.3특별법 제정과 진상보고서 확정…노무현 대통령 사과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지 1년이 되도록 특별한 성과가 없자 제주도민들은 1999년부터 정부·여당에 4.3진상규명을 강력히 요구하기 시작했다. 3월 8일 상설 운동조직체인 ‘4.3도민연대’가 결성돼 “국회 4.3특위 구성과 특별법 제정을 위해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나설 것”을 촉구했다. 특히 정부.여당 내의 4.3특위 또는 국회4.3특위로는 제대로 진상규명을 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초점을 맞췄다.

도민들의 요구가 거세지자 정치권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동안 4.3문제를 외면해 오던 제주 출신 한나라당 국회의원(변정일·양정규·현경대)이 10월 11일 4.3특별법안을 공개하고 국회에 상정한다고 발표했다. 이듬해 4월 열릴 제16대 총선을 염두에 둔 제스처로 보이긴 했지만, 보수 야당이 먼저 4.3특별법안을 발의한 것은 법 제정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집권 여당이 된 새정치국민회의는 ‘국회 4.3특위’를 우선 구성하자며 특별법 제정에 소극적이었다. 이에 10월 24일 제주지역 24개 시민사회단체가 총결집해 ‘4.3특별법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를 결성해 상경투쟁에 나서며 여당을 압박했다. 그 결과 1999년 12월 16일 마침내 4.3특별법이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했다.

국회를 통과한 4.3특별법은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1월 11일 서명함에 따라 1월 12일자로 제정되었다. 3월 위원회의 사무처 기능을 할 제주4.3사건처리지원단이 행정자치부 산하에 설치됐고, 제주도에는 제주4.3사건지원사업소가 설치됐다. 8월 28일에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4.3위원회가 발족되었다.

그런데 위원회가 발족하기도 전인 6월 10일 군 장성 출신들의 모임인 성우회의 정승화 회장 등 333명이 4.3특별법이 위헌이라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제기했다.

2001년 1월 17일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단장 박원순)이 발족해 본격적인 진상규명에 나섰다. 보고서작성기획단에서는 국방부, 육군본부, 해군본부, 경찰청,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 국사편찬위원회로부터 국내 자료를 입수하는 것은 물론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과 러시아연방기록관리청을 방문해 해외 자료도 수집했다. 12월 28일에는 수집한 자료들을 묶어 제주4.3사건자료집 1.2권을 펴냈다. 이 자료집 출판은 계속 이어져 전 11권까지 나왔다.

진상조사보고서는 2003년 1월 24일 초안이 완성됐으나, 보고서작성기획단 단원들 간의 이견을 좁히지 못해 진통을 겪었다. 2월 25일 초안이 통과된 이후에도 보고서 채택은 어렵게 진행됐다. 당시 고건 총리는 진상조사보고서 심의소위원회를 세 차례나 직접 주재하며 보고서 수정안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3월 29일 열린 전체 위원회에서 진상조사보고서를 ‘조건부 의결’했다. 즉 진상조사보고서를 군·경측은 물론 보수단체에까지 배포해 6개월간 수정의견을 받을 것이며 새로운 자료나 증언이 나오면 재심의를 거쳐 수정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을 달아 보고서를 채택한 것이다.

이후 고건 총리는 4월 3일 위령제에 참석했는데, 진상조사보고서 확정을 유보시킨데 대해 분노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위령제단 앞으로 가는 고건 총리의 길목을 막고 거세게 항의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한편 보수단체들이 많은 수정의견을 제출했으나 4.3위원회의 김종민 전문위원이 일일이 반박자료를 제시함에 따라 진상조사보고서는 별다른 수정 없이 10월 15일 열린 전체 위원회에서 최종 확정되었다.

이에 노무현 대통령은 보고서 채택 보름 만인 10월 31일 제주도에 직접 내려와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했다. 진상조사보고서 채택에 이어 대통령이 보고서를 근거로 사과하자 제주도민들은 수십 년간 맺힌 한을 어느 정도 풀어낼 수 있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2003년 10월 31일 제주를 찾아 4.3사건에 대해 유족과 도민들에게 사과하는 노무현 대통령.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고 노무현 대통령이 사과하자 극우세력들은 2004년 ‘제주4.3사건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대책위원회’를 결성해 극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자유시민연대 등은 7월 20일 진상조사보고서와 대통령의 사과를 취소하라는 취지의 헌법소원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제기했다.

한편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었음에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6.25전쟁사라는 책을 펴내며 4.3을 왜곡시키자 4.3유족회와 시민사회단체가 크게 반발하는 등 물의를 빚었다. 이에 4.3위원회 전문위원실에서는 6.25전쟁사에 나타난 왜곡 부분에 대해 근거를 들어 일일이 반박하는 문서를 작성했다. 논란이 커지자 청와대가 직접 중재에 나서서 35건에 달하는 왜곡 내용을 수정했다.  

1-4-4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역주행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후 4.3위원회 위축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된 후 희생자 결정이 순조롭게 진행돼 희생자의 위패가 평화공원 위패봉안소에 안치돼 왔다. 그러나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 희생자 심사가 난항을 겪었다. 이명박 정부는 오랫동안 4.3위원회를 개최하지 않아 이미 심사소위원회를 통과한 피해자들에 대한 최종적인 희생자 결정이 미뤄졌다. 이 때문에 희생자 신고를 한 유족들은 위패봉안소에 희생된 가족의 위패가 오르지 않아 속을 썩였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부터 뉴라이트 출신을 중심으로 한 여당 의원들이 4.3특별법과 4.3위원회를 폐지하기 위한 법안을 제출했다. 제주도민들의 반발로 법안이 통과되지는 못했지만, 보수정부 출범 후 4.3위원회의 활동은 크게 위축됐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 제주4.3연구소, 제주4.3 도민연대, 민예총 제주도지회, 제주4.3 범국민위원회는 2008년 10월 22일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긴급 공동기자회견을 가졌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4.3희생자유족회, 제주4.3연구소, 제주4.3 도민연대, 민예총 제주도지회, 제주4.3 범국민위원회는 2008년 10월 22일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긴급 공동기자회견을 가졌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2009년: 수구세력, 각종 소송 제기해 4.3진상규명의 성과 무력화 시도

수구세력들은 2009년 3월부터 5월까지 헌법소원심판 2건, 행정소송 2건, 국가소송(민사소송) 2건 등 모두 6건의 소송을 제기하며 진상조사보고서 파기와 희생자 결정 무효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4.3위원회 김종민 전문위원의 소송 수행으로 이들의 소송은 2012년 3월까지 모두 원고 패소했다. 그 내용은 아래 도표와 같다.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2013년: 보수정권 재창출…수구세력 또다시 준동

2013년 2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보수정권이 재창출되자 수구세력들은 또다시 준동하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4.3진상규명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시도를 했으나 하나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수구세력들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그동안의 4.3진상규명운동의 성과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청와대와 총리실 등에 집단적으로 민원을 넣었다. 특히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주도적으로 작성하고, 극우세력의 각종 소송에 대한 대응과 함께 ‘제주4.3평화기념관’ 전시 패널문을 작성했다는 이유로 4.3위원회 김종민 전문위원을 해임시키라는 민원이 빗발쳤다. 결국 김종민 전문위원은 2013년 6월 말 해임됐다.

▶2014년: 수구세력, 4.3희생자 결정 무효확인 소송 제기

수구세력들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에 희생자 결정 무효를 주장하며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나 만 3년만인 2012년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된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또다시 ‘희생자 결정 무효확인’을 구하는 행정소송을 2014년 12월 12일 제기했다. 그러나 이 소송은 2016년 11월 10일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됐다. 도민 여론에 밀린 박근혜 정부는 3월 18일 국무회의에서 4.3희생자추념일을 국가기념일에 포함시키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개정안이 의결함으로써 4월 3일이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4.3사건바로잡기대책회의'는 2014년 3월 20일 오후 4.3평화공원 앞에서 집회를 열고 "제주 4.3추념일은 폭동의 날 추념일"이라고 주장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2015년: 수구세력, 4.3평화기념관에 대해 시비

수구세력들은 3월 4.3평화기념관 전시 설명패널의 내용에 불만을 품고 2015년 3월 20일 제주특별자치도와 4.3평화재단을 상대로 전시금지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소송도 2017년 1월 17일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됐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 4.3추모제 참석해 유족들에게 사과

2016년 가을부터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을 규탄하는 촛불시위가 매주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다. 그 결과 대통령 박근혜가 탄핵되고 2017년 5월 열린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됨에 따라 4.3진상규명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2018년 4월 3일 문재인 대통령은 4.3추모제에 참석해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로 제주도민에게 사과했다. 또한 민주당에서 발의한 4.3특별법 개정안에 대해 국회와 논의해 잘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울러 4.3 당시 입은 정신적 피해를 치유하기 위해 트라우마 치유센터를 설립할 뜻을 밝혔다.

한편 경찰청은 6.25전쟁 때 예비검속자를 처형하라는 군대의 명령서에 “부당하므로 불이행”이라고 쓰며 예비검속자를 풀어준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을 ‘올해의 경찰영웅’으로 선정했고, 제주지방경찰청은 11월 1일 문형순 경찰서장의 흉상을 제작해 청사 마당에 세움으로써 ‘민주경찰’의 표상으로 삼았다.

1-4-5 4.3군법회의 수형인 재심 청구 결과: 공소기각(무죄): 배.보상 문제

4.3특별법이 제정돼 진상규명보고서가 작성되고 보고서에 근거해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 사과를 했음에도 군법회의 수형 희생자의 유족들은 ‘아직도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무고한 희생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과자 낙인’이 지워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2017년 4.3유족회(회장 양윤경)는 4.3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4.3특별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변호사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4.3전문가들로 ‘법률지원단’(단장 이석태 변호사, 단원 고호성, 김성주, 김종민, 문성윤, 송승문, 양성주, 양윤경, 이상희, 이재승, 장완익, 조영선)을 구성했다. 법률지원단은 ‘피해배상’과 ‘4.3군법회의 무효화’에 초점을 맞춘 4.3특별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4.3유족회는 개정안을 민주당에 제시했고, 민주당은 제주 출신 오영훈 의원을 중심으로 개정안을 국회에 발의했다. 

한편 특별법 개정안과는 별도로 생존 수형인 18명이 4.3군법회의는 정상적 절차를 밟지 않은 엉터리 재판이라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2003년 확정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이미 “1948·1949년 제주에서 치러졌다는 ‘군법회의’는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았음을 증명할 수 있는 소송기록, 즉 재판서‧공판조서‧예심조사서 등이 발견되지 않는다. 특히 김춘배에 대한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의 판결(1963.8.20)에서 군법회의 재판 근거서류가 없기 때문에 잔형 집행을 취소한 사례는 주목된다. 나아가 재판이 없었거나 형무소에 가서야 형량을 통보받는 등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는 군인·경찰·피해자들의 증언, 관련법령에 의해 영구보존 대상인 판결문이 당초부터 작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각종 자료의 존재, 하루에 수백 명씩 심리 없이 처리하는 한편, 사흘만에 345명을 사형선고 했다고 하나 이런 사실이 국내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는 등 제반 정황 등을 통해서도 재판절차가 지켜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4.3사건 군법회의’는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은 재판으로 볼 수 없다.”고 규정한 것에 근거한 재심 청구였다.

이 재심 청구 사건에 대해 제주지방법원 재판부(제갈창 판사)는 2019년 1월 17일 무죄 취지의 ‘공소기각’ 판결했고 검찰이 항소 포기를 함으로써 이 재심사건은 1심 판결만으로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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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 17일 제주4.3 생존수형인들이 제기한 재심에서 법원이 공소기각 판결을 내리자 환호하고 있는 생존 희생자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한편 ‘생존수형인 18명’이 청구한 이 재심사건은 현재 국회에 발의돼 있는 4.3특별법 개정안이 하루빨리 통과되어야 함을 웅변해 주고 있다. 개정안에는 ‘4.3군법회의 무효화’ 조항이 포함돼 있다. 4.3군법회의를 무효화하지 않는다면 ‘운’이 좋아 형무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와 지금까지 장수하면서 재심을 청구한 18명은 ‘무죄’이고, 형무소에 수감 중 6.25전쟁 직후 이승만 정권에게 학살당한 분들은 여전히 ‘유죄’로 남는 큰 불합리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표 3>는 정치·사회적 변화에 따른 제주4.3 관련 사회 환경 및 제도 변화를 정리한 것이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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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민은?

김종민(59)은 4.3의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일간지 기자 4.3취재반 13년, 국무총리 소속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 13년, 그리고 지금까지 30여년간 오로지 4.3 연구에만 매달리고 있다. 제민일보 ‘4.3은 말한다’ 취재보도, 정부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4.3평화기념관 전시 설명문 작성, 희생자·유족 인정, 일부 희생자를 제외시키라는 극우보수단체와의 숱한 송사를 맡아 승리로 이끌었다. 지금은 낮엔 농사를 짓고 밤엔 글을 쓰고 있다. 기자시절 무려 7000여명의 4.3유족들로부터 증언을 채록한 역사학도(고려대 사학과 졸업)로서의 집요함을 보였다. 이 방대한 증언은 4.3의 진실을 밝히는데 단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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