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40) 이월의 숲 / 고정국

한라산 겨울나무. ⓒ김연미
한라산 겨울나무. ⓒ김연미

빙점을 치르고서도 제자리를 지키는 저들
부채꼴 탑을 쌓는 나목들 관습에 따라
제몫의 하늘을 섬기는 잔뼈들이 보인다

한 곳에 이르기 위해 길 아홉을 버려야 하는
뼈뿐인 잡목 숲은 그대 영혼의 사원이었네 
선채로 참선을 마친 팔다리가 눈부셔

​눈을 뜨지 않았어도 이월은 참 귀가 밝아
겨울과 봄 사이 뽀얀 빛이 감도는,
“바스락” 은밀한 처소에 한 쌍 새를 앉힌다. 

-고정국 [이월의 숲] 전문-

쌓인 눈이 녹으려면 아직은 먼 이월, 군더더기거나, 혹은 달콤한 그 무엇, 그런 것들을 뺀 삶의 모습으로 겨울나무들이 눈밭에 발을 담그고 서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발이 시렵고, 충분히 내려서지 않으면 그 무엇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자연의 심리에 행동을 맞추기는 쉽지 않다. 제자리를 지키는 일조차 우리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기꺼이 자신을 바치게 될 그 ‘빙점’의 시간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겨울 숲은 주저함이 없다. ‘한 곳에 이르기 위해 길 아홉’쯤 버릴 수 있는 결단. 버리고 버리다 핵심만 남았을 때, 거기가 바로 ‘영혼의 사원’인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뼈 뿐인 잡목 숲’이 눈부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고.

고통이 있으면 그에 따른 보상이 주어지는 것 또한 자연의 이치. 겨울 숲에 ‘뽀얀 빛’이 감돈다. 그 뽀얀 빛은 ‘빙점’의 시간을 견딘 것들이 깊게 내쉬는 숨. 딱딱한 겨울 표피 속, 관념처럼 묻어두었던 봄기운이 실재하면서 내뱉는 호흡. 숲은 어느새 ‘은밀한 처소에 한 쌍 새를 앉’혀 놓고 있는 것이다.  

귀 밝은 이월, 봄이 오는 소리가 선명하다.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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