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57. 로웅 웅 지음, 이승숙·장미란 옮김, '킬링필드, 어느 캄보디아 딸의 기억', 평화를 품은 책, 2019.  

로웅 웅 지음, 이승숙·장미란 옮김, '킬링필드, 어느 캄보디아 딸의 기억', 평화를 품은 책, 2019. 출처=알라딘.

‘캄보디아’를 이야기 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1980년대 미국 영화 ‘킬링필드’를 통해 알려진 참혹한 학살의 장면들이다. 지금은 밀림의 신비한 사원 앙코르 와트를 보러 많은 사람들이 캄보디아를 여행하지만, 가보지 못한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캄보디아는 여전히 크메르루주 치하의 캄보디아가 떠오른다. 폐허의 한국전쟁의 우리를 기억하는 외국인 같은 느낌이라 캄보다아에게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지만 말이다….   

이 책의 저자인 로웅 웅은 20세기 참혹한 학살극이 벌어졌던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생존자이다. 인구 700만 명 가운데 200만 명에 이르는 캄보디아 국민이 악명 높은 폴 포트와 크메으루주 정권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1970년 프놈펜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저자는 크메르루주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다섯 살에 가족과 함께 시골로 옮겨가야 했다. 또한 1978년까지 크메르루주에 의해 부모님과 두 자매, 20여 명의 친척을 잃고 소년병 훈련을 받아야 했다. 1980년 로웅과 큰오빠 멩 부부는 베트남을 거쳐 보트를 타고 태국으로 탈출해서 5개월 동안 난민촌에 머물렀다. 이후 미국 카톨릭 주교회의와 신자 가족의 후원을 받아 버몬트주로 이주했다. 

미국으로 떠난 후 그동안의 고통과 상처로 인해 자매들의 편지도 외면했던 저자는 1995년이 돼서야 캄보디아로 대학살의 희생자 추도회에 참가했다. 그 후 평화운동에 뛰어들면서 소년병과 지뢰, 캄보디아 관련 주요 연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캄보디아 기금’의 대변인으로 일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어린 로웅의 목소리를 통해 그 시간을 증언하고 있다. 크메르루주 지배 아래에서 살았던 어린아이의 사랑과 증오와 분노, 상처들을 온전히 겪으면서 그 시절로 들어가고 있다. 저자는 같은 정신적 외상을 입어도 어린이들은 어른보다 고통이 덜하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없애고 싶었다고 한다. 어려도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목소리를 표현하고 싶어 했다.  

1974년 크메르루주는 캄보디아 국토의 85퍼센트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975년 4월 17일, 수도 프놈펜은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주에게 점령되었다.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는 크메르루주가 세운 캄보디아의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캄푸치아는 캄보디아의 베트남식 발음이라고 한다. 

급진 공산주의 단체인 크메르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는 친미 론 놀 정권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뒤, 새로운 공산주의 농민사회를 이룩한다며 도시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또한 론 놀 정권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지식인, 공무원, 정치인, 군인들을 처형하고, 타락한 자본주의에 물든 국민을 개조한다는 구실로 노동자, 농민, 여성, 어린이까지 잔인하게 살해했다. 이처럼 크메르루주 정권이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약 4년에 걸쳐 저지른 대학살을 ‘킬링필드(Killing Fields)’라 한다. 킬링필드는 ‘죽음의 들판’을 뜻하는 말 그대로 이때 학살된 민간인들의 시신을 묻은 집단 매장지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크메르루주는 자신들의 이념을 인민 전체에게 강요하면서 일으킨 집단학살을 자행했다. 학살행위 이외에도 크메르루주의 농업개혁은 심각한 기아를 발생시켰으며, 의약품이 부족해 수천 명이 학질에 걸려 죽어갔다. 무차별적인 처형과 고문이 난무했으며, 굶주림에 죽어갔다.

1975년 7월 프놈펜에서 시골로 강제 이주 당한 저자와 가족은 신인민으로 불리며 참혹한 소개 생활을 시작한다. 원래 농민이었던 사람들은 구인민으로 불리고 도시 출신 사람들은 신인민으로 불리며 철저히 개조를 당해야 하는 처지였다. 모든 사람들은 서로 ‘멧(동지)’으로 불러야 되고, 아이들은 학교를 갈 수 없고 오로지 고된 노동과 순화의 시간만 있을 뿐이었다.

우리 모두가 평등하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마을에는 세 계급의 시민이 있었다. 일등 시민은 온 마을에 권력을 행사하는 촌장, 그의 조력자인 크메르루주 군인들로 구성된다. 그들은 구인민으로, 크메르루즈 핵심 당원들이다. 그들은 교육, 치안, 재판, 처형에 관한 권한을 쥐고 있다. 노동의 세부 사항, 가족당 배분하는 음식의 양, 엄격한 처벌에 관한 모든 사항을 결정한다. 그들은 지역 차원에서 앙카르(크메르루즈)의 눈이고 귀이다. 모든 활동을 앙카르에 보고하고 앙카르의 법을 집행한다. 
- '킬링필드, 어느 캄보디아 딸의 기억', 109쪽에서

어느 날 군인들이 우마차를 고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면서 자상했던 아빠를 데려간 날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것은 핑계였고 아빠는 그 길이 죽음의 길인 것을 알고 있었다. 애써 담담히 가족에게 인사를 하고 끌려간 아빠를 어린 아이인 저자와 남매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나는 우리 남매들과 앉아서 길 쪽을 향해 아빠를 찾아본다. 그러고는 아빠가 우리에게 늦게 돌아와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낸다. 우마차가 진흙 속에서 망가지고 소는 움직이지 못한다. 군인들이 우마차를 고쳐야 한다며 아빠가 도와야 한다고 했다. 내 핑계거리를 믿으면서 그들의 말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려 애써보지만, 내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찬다. 우리는 촌장에게 아프다고 말하고 집에 있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는다. 아침과 오후 내내, 걸어서 우리에게 돌아올 아빠를 기다린다. 밤이 오자 신들은 또다시 찬란한 일몰로 우리를 비웃는다.
- '킬링필드, 어느 캄보디아 딸의 기억', 181쪽에서

사춘기 정도 나이의 소년과 소년들은 강제로 수용소 생활로 끌려갔고 저자의 언니도 수용소 생활 중에 굶주림과 식중독으로 죽음을 당한다. 저자도 이후 소년병으로 끌려가게 되고 엄마와 어린 동생마저 끌려가 죽음을 당하면서 저자의 고통은 꿈속에서 재현되지만 어린 저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민주 캄푸치아(1975-1979) 집권 기간 동안 자행되었던 만행은 반인륜적인 범죄 행위였다. 집권 기간 동안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1/4 이상이 목숨을 잃었으며, 수십만 명이 투옥과 고문을 겪다가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06년, 만행의 주범인 민주 캄푸치아의 고위 지도층 및 이에 대한 중대한 책임이 있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 특별재판소(ECCC)가 설립되었다. 희생자의 정의를 독특한 방식으로 추구하려는 노력에 따라, 캄보디아 정부는 UN과 협력하여 캄보디아 및 국제 판사, 검사 및 변호사로 구성된 합동재판소를 조직했으며, 소속자들은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캄보디아 국내법과 국제법에 따라 사법처리를 맡게 되었다. ECCC에서 처음으로 심판대에 올린 이는 카잉 구엑 에아브, 일명 두크로, S-21(투올슬렝 교도소)의 수장이었다. 2016년에는 크메르루주 정권의 국가주석이었던 키우 삼판에게 종신형을 확정했다. 그러나 크메르루주의 최고 지도자였던 폴 포트는 1998년 사망함에 따라 이 재판에서 제외되었다.

투울슬렝 교도소는 이후 투올슬렝 학살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 기록유산의 등재에 앞장섰던 헬렌 자비스에 의하면 “투올슬렝 대학살 박물관의 기록보관소는 과거 S-21 감옥 및 심문실로, 현재는 학살 현장 관련 사진과 문서를 보존하는 시설로 사용 중이다. 본래 고등학교였던 이 건물에 총 1만8000명이 넘는 수형인이 구금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부만이 살아서 그곳을 나올 수 있었다.”라고 했다.

4년 가까운 학살의 시간을 겪고 저자는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으로 태국으로 마침내 1980년 오빠 부부와 같이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그동안의 상처로 인해 평범한 미국 소녀로서만 생활하려 했지만, 결국 고향 땅의 이야기와 학살을 증언하는 작가와 평화운동가로 거듭나게 된다. 

저자는 이야기 한다. “이 책은 캄보디아 킬링필드라는 끔찍한 대학살 시기를 고통스럽게 헤쳐 나오면서 결코 놓을 수 없었던 삶의 의지와 희망, 용기, 사랑 그리고 나와 우리 가족의 처절했던 생존의 이야기”라고 쓰고 있다. “전쟁과 대학살은 우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주었지만, 이러한 경험을 통해 나는 오히려 평화를 더욱 더 갈구하게 되었다”고 하고 있다.

전쟁은 어린 아이에게서 부모를 빼앗아가고 삶의 거처를 없애고, 굶주림과 증오를 주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성장한다. 저자도 프놈펜의 평화로운 가족과의 삶을 빼앗기고 사랑하는 부모와 자매를 잃었다. 어린 소녀는 상처와 증오를 가졌지만, 그 소녀는 자라고 또 성장했다. 그 속에서 우리도 성장한다. 인류애라는 어쩌면 교훈적 언술이라 이야기할 수 있지만, 증오만이 아니라 평화를 갈구하고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증오를 평화로 바꾸기 위해 얼마나 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읽고 들으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게 된다. 여전히 우리에게 ‘평화’는 지키려고 노력해야 하는 소중한 가치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 양정심

현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전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학술위원장.
전 고려대, 대진대,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며 제주4.3과 한국전쟁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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