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2주년 기획] 4.3피해 회복탄력성 인터뷰 (2) 김순녀

김종민 전 국무총리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의 최근 '4.3피해 회복탄력성' 연구는 길게는 27년전 인터뷰했던 4.3피해자를 다시 만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강산이 세 번 가까이 바뀌는 동안 4.3피해자들의 몸과 마음은 얼마나 회복됐을까. [제주의소리]는 4.3피해 회복탄력성 연구 보고서에 이어 연구 과정에서 진행한 인터뷰 11건도 소개한다. 월요일과 목요일 매주 두 차례 씩 총 11회 게재를 통해 4.3피해자들의 피해회복 과정 전반을 생생한 목소리로 전한다. [편집자 주]

연구방법은 많은 사람을 도식화된 설문조사를 통해 계량화·도표화하기보다는 심층 인터뷰라는 질적 조사방법을 적용하였다. 특히 본 연구의 책임연구원은 과거 4.3피해를 경험한 대상자를 조사한 적이 있다. 즉 책임연구원이 제민일보 기자 시절 '4.3은 말한다'를 연재하기 위해 1990년대에 이미 만나 인터뷰를 했으며(11명의 인터뷰이 중 8명), 인터뷰 내용이 신문에 게재된 바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학에서는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인명과 지명을 알아볼 수 없도록 익명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 연구의 본문은 익명이지만, 부록으로 실린 구술내용에서는 모두 실명을 사용했다. 구술자들도 이에 적극 동의했으며 사진 촬영은 물론 동영상 촬영도 허락했다. 실명을 쓴 까닭은 구술 내용이 검증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구술 내용이 훗날 역사의 사료로써 기능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물론 구술자들이 구술을 마친 후 ‘어떠어떠한 내용은 빼 달라’고 한 부분은 삭제했다. [필자 주]

# 김순녀(金順女, 조천 교래 출신. 구좌 평대 거주) 증언

1차 방문: 1996년 11월 25일(대흘2리 상점, 모친 양복천이 주로 증언)
2차 방문: 2019년 8월 15일 김순녀 자택

▲ 인적사항
* 생년: 1945년
* 본적지(출생지): 조천면 교래리
* 학력: 함덕초등학교 1학년 중퇴
* 직업: 제주도청 식당 근무(1982~1995)
* 왼쪽 다리 무릎 위쪽에 총상을 입은 후유장애인

▲ 가족 관계
“4·3 당시 우리 가족은 4명이었다. 아버지, 어머니(양복천), 나, 그리고 오빠(당시 9세, 김문용)가 있었다. 그런데 4·3 때 오빠가 숨지고, 어머니와 나는 총상을 입었다.
나중에 남동생(1953년생)이 태어났다. 남동생은 올해 4월에 병으로 사망했다.
현재 내게는 딸(1973년생)이 한 명 있다. 
난 지금 재혼한 남편과 살고 있다.”


# 1차 방문시(1996. 11. 25) 구술자 김순녀의 모친인 양복천(梁福天)의 증언 
- 1996년 11월 25일 방문 취재(대흘2리 소재 상점). 주로 양복천이 증언
- 1996년 당시 양복천의 나이는 79세

* 48.11.13 마을소각과 아들 김문용(金文龍. 9살) 희생 상황

“그날따라 뭔 일이 생기려 해서인지 세 살 난 딸이 특히 심하게 울었습니다. 그날은 마침 딸의 두 번째 생일이었습니다. 하도 울어대서 젖을 먹여가며 겨우 달래고 있었습니다. 

그날 새벽 요란한 총소리가 나자 마을의 젊은이들은 황급히 피신했습니다. 남편도 급히 대숲으로 숨었지요. 하지만 나는 어린 아들과 딸 때문에 그냥 집에 있었습니다. ‘설마 아녀자와 어린아이까지 죽이랴’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다짜고짜 집에 불을 붙이는 군인들 태도가 심상치 않자, 난 ‘살려줍서, 살려줍서’하며 빌었어요. 그 순간 총알이 내 옆구리를 뚫었습니다. 세 살 난 딸을 업은 채 옆으로 픽 쓰러지자 아홉 살 난 아들이 ‘어머니!’하고 외치며 내게 달려들었어요. 그러자 군인들은 아들을 향해 총을 쏘았습니다. ‘이 새끼는 아직 안 죽었네!’하며 아들을 쏘던 군인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가에 쟁쟁합니다. 

양복천 씨(1996년 당시). 제공=김종민.
양복천 씨(1996년 당시). 사진=김종민.

아들은 가슴에 총알을 정통으로 맞아 심장이 다 나왔어요.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을 피신시킬 때 아들도 보내려했는데 죽을 팔자인지 웬일인지 따라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군인들이 가버리자 나는 우선 아들이 불에 탈까봐 마당으로 끌어낸 후 딸을 업었던 담요를 풀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울지 않았기 때문에 딸까지 총에 맞았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지요. 

그런데 등에서 아기를 내려 보니 담요가 너덜너덜하고 딸의 왼쪽무릎 위가 뻥 뚫려 있었습니다. 내 옆구리를 관통한 총알이 딸의 왼쪽 다리까지 부숴놓은 겁니다. 두 번째 생일날 불구자가 된 딸이 이제 쉰 한 살입니다.

아무튼 군인들이 물러간 후에야 남편이 나타났습니다. 죽은 아들을 가매장하고 ‘뒷곶’이라는 곶자왈로 가서 숨었습니다. 남편은 부상당한 나를 업고, 딸은 조카가 구덕에 담아 이동했습니다. 곶에서 약 10일간 숨어있었는데 그곳에도 ‘병원장’이 있어서 아까징끼를 발라줬습니다. 딸은 부러진 다리뼈가 살을 찔러대니까 고통에 못 이겨 계속 울었습니다.

열흘 쯤 지난 후 어디선가 ‘조천으로 소개하라!’는 명령이 소문으로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11월 23일경에 조천으로 내려왔지요.”

[책임연구원 주: 1996년 김순녀는 어머니 양복천이 증언하는 동안 아무런 말도 않고 유심히 듣기만 했는데, 당시 제민일보 기자였던 책임연구원이 총상을 보여달라고 하자 보여주었음]


# 2차 방문시(2019. 8. 15) 김순녀(양복천의 딸)의 증언 
- 증언 채록시 남편이 옆에서 지켜봄

* 1948. 11. 13. 사건, 강렬한 기억…평생 어머니 원망

(아주 어렸을 때인데, 혹시 사건이 나던 날 상황을 기억하는가요?)

“어렸을 때긴 하지만, 태어나서 만 3살이고, 우리 나이로 4살입니다. 불타는 광경이 굉장히 강렬했고 내가 총상을 입은 날이어서 분명하게 기억이 납니다.” [책임연구원 주: 사건이 발생한 때는 1948년 11월 13일(음력 10월 13일). 그런데 구술자 김순녀가 1945년 11월 13일생(음력 10월 13일)이므로 우리식 나이로는 4살이고, 만 나이로는 정확히 3살이 되는 날임]

“그날 어머니는 기저귀 누빈 것 같은 담요로 나를 업고 있었는데, 나를 바닥에 내려놓자 담요 여기저기가 잘라지고 하얀 담요에 피가 벌겅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나는 어머니 때문에 이렇게 평생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대나무밭으로 숨어들 때 어머니는 ‘설마 여자와 애기들에게 무슨 짓을 하겠느냐?’고 생각해 숨지 않았다고 나중에 말했는데, 왜 그날 우리를 데리고 함께 숨지 않았는지, 그때 숨었다면 내가 평생 이 꼴로 살지 않았을 텐데, 지금도 어머니가 너무 원망스럽습니다.” [책임연구원 주: 이때부터 구술자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계속 눈물을 흘림]

(1996년부터 어머니(양복천)를 몇 차례 만났는데 지금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나요?)

“2011년 3월 11일 돌아가셨습니다. 일본에 지진이 발생해 쓰나미가 덮치던 날이라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김순녀 씨의 왼쪽 다리 총상. 제공=김종민.
김순녀 씨의 왼쪽 다리 총상. 사진=김종민.

* 소개(疏開) 생활…병원 치료 못한 채 소독약만 발라

“우리는 조천으로 소개했다가 나중에 대흘1리 함바집에서 살았습니다. 쇠막(외양간)을 길게 지은 것 같은 곳입니다. 거기에서 6살까지 살았지요. 조천 비석거리에 김탁림 씨가 있었는데 마을 의사쯤 되는 분 같습니다. 그 분이 소독약을 발라줬지요. 병원에는 전혀 가보지 못했습니다.

먹을 거라고는 밀가루 수제비뿐이었습니다. 하도 수제비만 먹은 탓에 어머니는 그 후 돌아가실 때까지 수제비를 전혀 드시지 않았습니다.”

* ‘병신’이라 놀림 받으며 생활…초등학교 1년 중퇴

“제대로 걸을 수가 없으니 초등학교 1학년 다니다 그만 두었습니다. 아이들은 내게 ‘병신’이라며 놀렸습니다. 어린 시절에 특히 사춘기 때 그런 소리를 들을 때는 참으로 가슴이 아프고 슬펐습니다.”

* 제주도청 구내식당 취업해 생계유지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몸도 장애인이라 먹고 살 길이 없었지요. 그러던 중 남동생 친구가 도청 서무과에 있어서 그의 소개로 도청 식당에 다녔습니다. 38살이 되서야 겨우 생계비를 벌수 있었던 겁니다. 그때 월급이 7만원이었습니다. 1982년부터 1995년까지 도청 구내식당에서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며 일했습니다. 신발도 맞는 없었지요. [책임연구원 주: 구술자의 총상입은 왼쪽 다리는 오른쪽 다리에 비해 얇았고, 왼쪽 발은 오른쪽 발의 2/3수준으로 작았음]

김순녀 씨의 총상 후유증. 총 맞은 다리의 발이 다른 쪽보다 훨씬 작다. 사진=김종민.
김순녀 씨의 총상 후유증. 총 맞은 다리의 발이 다른 쪽보다 훨씬 작다. 사진=김종민.

그때 제주시에서 딸(1973년생)과 함께 방 한 칸 얻어 살고 있었지요. 연탄가스 때문에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집에 놀러왔던 어머니도 연탄가스에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지요.”

* 재혼…1998년 여수에서 다리 수술

“전 남편과는 딸을 낳은 후 헤어졌습니다. 딸은 현재 47세인데 시집가서 잘 살고 있습니다.

현 남편은 내가 도청 구내식당에 근무할 때인 48살에 만났습니다. 1996년에 김종민 기자님(책임연구원)이 대흘2리 상점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왔을 때는 현 남편을 만나던 시기였습니다.

아저씨(현 남편을 ‘아저씨’라고 호칭)는 나를 무척 아껴주었습니다. 아저씨는 내 다리를 고쳐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의료보험혜택도 못 받고 있던 나를 데리고 제주도에 있는 정형외과는 모두 다녀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여수에 훌륭한 의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1998년경 여수재활병원에 가서 수술했습니다. 지금도 제대로 걷지 못하지만 이 정도 치료받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 현 남편 만나 정신적·경제적 안정 찾아…나이 들수록 어머니 원망 커져

“현 남편을 만나기 전에는 불편한 몸으로 홀로 딸을 키우는 게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아픈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도청 식당에서 일했지만 월급이 7만원 밖에 되지 않아 집세를 내고 먹을 거 구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양복천)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90년대 후반에 현 남편을 만나 보살핌을 받으니 삶이 안정되었습니다. 우선 집세를 내지 않아도 되니 경제적으로 안정됐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 ‘어머니! 왜 피신하지 않고 그러셨어요? 왜 나를 신발도 못 신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라고 원망했습니다. 어머니도 총상을 입은 피해자이지만, 내가 나이를 먹을수록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커져갔습니다.”

* 4·3특별법 제정, 대통령 사과에 위로 받아

(돌이킬 수 없는 육체적·정신적 상처를 입었는데 마음 풀린 것은 언제였나요?)

“4·3특별법이 제정되고, 노무현 대통령이 희생자와 유족에게 사과한 것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4·3평화공원에는 돌아가신 어머니와 오빠가 계시기 때문에 매년 추모제에 갑니다. 거기 가면 ‘그래도 나라가 희생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됩니다.”

* 후유장애인 지원 너무 적어…특별법 개정돼 배상 받아야

(나라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상처가 조금이나마 마음이 치유가 될까요?)

“나는 텔레비전을 보아도 중앙방송은 안 보고 지방방송 7번만 봅니다. 4·3과 관련해 혹시 좋은 소식이 있을까 해서요.”

“후유장애인 결정은 오래 전에 됐습니다. 장애등급 받으라고 해서 보건소에 가니까 3급 결정을 해 주었습니다. 지원금을 주는 데 겨우 월 30만원을 주었습니다. 그게 조금씩 올라 50만원이었다가 지금은 70만원입니다.

4·3특별법과 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의 사과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사회가 우리를 외면했는데, 이젠 희망이 조금 보이니까요. 그렇지만 어서 4·3특별법이 개정돼 배상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올해 75살인데, 동네에서 나보다 10살 위인 80대 할망들도 집에 가만히 앉아 노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밭에 가서 일을 합니다. 그런데 나는 다리가 불편해 일을 못하니 남편 보기가 너무나 미안합니다. 남편 혼자 5000평 당근 농사를 짓는데, 남들은 부인들이 나서서 같이 일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으니…. 남편도 이제 늙어서 일꾼 빌어 농사를 지어야 하니까 남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특별법이 개정돼 보상이라도 받으면 좋겠습니다. 남편에겐 아들과 손자도 많아 돈이 많이 드는데, 내가 전혀 도울 수 없으니 너무 미안하지요.

남편은 술도 안마시고 담배도 피지 않고 절약하면서 혼자 농사를 짓는데도 일체 내게 불만을 말하지 않아 그저 미안하고 고마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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