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3) 대만 역사상 최대의 학살 2.28과 교훈 / 우다퀀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18년부터 세 나라 세 섬의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어 이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세 섬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로 국외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어 일어, 영어 번역 원고도 동시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냉전 이후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에 따라, 정치민주화, 경제개발, 지역통합 및 국제 안보 문제와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현실의 변화가 이뤄졌으며, 동시에 문화적인 면에서도 지역화 발전이 이어졌다. 이는 동아시아 지역이 유럽과 미국의 패권적 관점에서 벗어나 서로의 관계를 되돌아보고 수평적 문화교류와 다양한 예술협력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최근에는 동아시아에서 미국 중국 일본의 충돌이 가열되는 가운데, 제주, 오키나와, 대만 등 세 지역의 예술가들이 시작한 동아시아평화예술프로젝트, ‘EAPAP’가 열려 그 의미를 더욱 깊게 하고 있다. 일견 무관하게 보이면서도 밀접하고 얽혀있는 세 섬에서 예술가, 연구자들은 서로 이해하고 창조와 인도주의 관점에서 국가주의와 비극의 상처를 넘어 예술을 통해 서로 소통하며, 전쟁과 식민주의, 국가폭력을 비판하는 평화예술로 서로를 껴안았다. 

일제시기의 대만인들은 황민화 교육을 받고 자신을 일본인으로 간주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민당 당국의 교육을 받으며 자신이 중국인이라고 여기고, 대륙의 중화사상을 배양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체성은 시대의 비극을 낳았다. 대만이 국민당에 납치되었다는 사실은 망각한 채 서태평양에서 살고 있고 아시아의 고아가 되었다. 사실 대만은 태평양 섬의 일원으로서 류큐와 제주와 함께 해양문화의 일원으로서 쿠로시오야말로 섬을 키운 공동의 어머니이다. 이 세 섬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고난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역사의 회귀라는 관점에서, 우리는 역사를 건너 현실을 비출 수 있었다.

황롱찬의 판화작품, '공포의 검사'. 228사건의 무자비한 학살을 그린 이 작품대로 황롱찬 자신도 학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제주의소리
황롱찬의 판화작품, '공포의 검사'. 228사건의 무자비한 학살을 그린 이 작품대로 황롱찬 자신도 학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제공=우다퀀. ⓒ제주의소리

대만 근대사에서의 2.28사건

1947년 대만은 커다란 혼돈의 시대였다. 2.28사건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가운데, 적을 두려워한 나머지 온 산의 초목까지도 모두 적군으로 보이고, 겁먹은 사람이 하찮은 일이나 작은 소리에도 몹시 놀라는 ‘초목개병풍성학려(草木皆兵風聲鶴唳)’의 상황이었다. 취약한 통치기반을 다지기 위해 국민당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국가 폭력으로 대만 민중들을 학살했으며, 대만의 유지와 지식인 등 사회의 엘리트들을 체포해 총살을 자행했다. 모든 세대의 엘리트들은 재판 없이 살해당해 치유할 수 없는 역사의 상처를 남다. 2.28사건 이후에도 대만은 38년간 군사계엄령이 내려졌다. 이처럼 사상자가 많은 사상자가 나왔으므로 대만사람들은 중국에 대해 실망했다. 그것은 훗날 대만독립운동 발흥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수십 년간 2.28사건의 어두운 그림자가 줄곧 대만 사회를 뒤덮고 있었기에 국민당은 이를 금기시했으며, 1980년대 말에야 2.28사건의 명예회복을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2.28사건으로 수난당한 대표적 예술가는 대만 자이 출신의 천청포(陈澄波)와 중국 충칭 출신의 황롱찬(黄荣灿)이 있다.

유채화의 화신 : 천청포

천청포는 일제시대와 전후에 활동한 유채화가로서, 결란사와 예술원 회화연구소 멤버였다. 1926년 대만에서 <嘉義の町はづれ(자이변두리)>(현재 <嘉義街外(자이가외)>)라는 작품을 제7회 일본 '제국예술전시회'(약칭 '제전(帝展)')에 출품하여, 대만인으로서는 최초로 서양화로 일본 황제 전시회의 관문을 통과했다. 1946년에 천징보 가의시의 첫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다음 해에 대만에서 2.28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대만은 광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표준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자이시 사람들은 천징보가 상하이에 가서 강의를 한 경험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 그를 ‘2.28사건처리위원회’의 협상대표로 임명하여 군대와 협상하도록 했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군은 죄명을 조작해 천징보를 투옥했다. 그해 3월 24일 자이 경찰청으로 이송되어 같은 날 ‘12만명의 자이 시민들을 위해 희생되어도 아무런 원한도, 후회도 없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천징보는 조리돌림을 받다가 3월 25일 오전 자이역 앞에서 총살당했다. 가족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녔지만, 저녁이 돼서야 당국의 허락을 받아 문짝을 뜯어내고 시체를 운송했다. 천징보는 대만 근대미술운동의 중요한 화신이 되었고, 기일 3월 25일은 대만의 미술제로 지정되었다.

오른쪽은 유채화가 천청포의 사진. 왼쪽은 천청포의 자화상. 제공=ⓒ제주의소리
오른쪽은 유채화가 천청포의 사진. 왼쪽은 천청포의 자화상. 제공=우다퀀. ⓒ제주의소리

‘공포의 검사’ : 황롱찬

당시 중국 충칭에서 온 판화가 황롱찬은 인도주의적 관심을 가지고 2개월 동안 2.28사건에 대한 현장답사를 한 뒤 '공포의 검사'라는 작품을 제작했다. '공포의 검사' 판화 원본을 직접 들고 배를 타서 상하이에 간 황롱찬은 1947년 4월 28일 상하이 <문회보>에 ‘리쥔(力軍)'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공포의 검사'는 신문 발표 후 11월 상하이에서 열린 '전국목판화전'에도 전시되었다. 황롱찬은 뜻한 바대로 전시를 진행한 후에 일본 친구 우치야마 가키치(内山嘉吉)에게 작품을 증정했고, 이후 우치야마 가키치는 일본 가나가와현립근대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했다. 그래야 이 작품은 그해의 국민당 특무의 추궁을 피해서 2.28 역사의 상처를 기억하는 가장 유력하고 중요한 아이템으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1952년의 백색 테러 시기에, 황은 국민당 정부에 의해 반란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2.28사건은 대만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내고 가장 심대한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이다. 2.28사건은 이미 대만사람들이 공유하는 악몽이며, 민족공동체의 잠재의식이다. 대만인의 의식이나 정신, 지조, 인간상, 인생의 이상, 예술창조, 가치관념 등은 모두 2.28의 인자를 내포하고 있다. 천재(天災)에 직면한 우리는 비난의 대상을 찾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전쟁과 국가폭력의 발동 및 이상사회 구축의 갈등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건전한 공민사회제도가 존재할 수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과거의 역사가 인류에게 주는 교훈은 소통이 좋지 않거나, 차별하거나 과격한 수단이 나타나면 반발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2.28사건에서 뿌려진 씨앗으로 인해, 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서양을 보지 않고 바다를 바라보는 쪽으로 돌아서서, 자아의 근원과 마주하고, 더 민주적이고 투명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언제라도 맞서 역사의 거대한 짐승이 삼키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서양이 준 '아시아'라는 개념을 어떻게 벗어날까? 섬을 표어로 삼아 섬의 사슬로 묶인 예술가들이 서로 동맹을 맺고, 역사와 정치지정학적인 공명의 시대를 만들어내자. 예술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고, 우리의 섬의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를 것이다. / 우다퀀 큐레이터

우다퀀(吳達坤, WU Darkeun)은 타이페이국립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타이페이예술대학 <관두미술관> 큐레이터, 대안공간 <VT ARTSALON> 디렉터, <타이페이국제예술촌> 디렉터 등을 역임했습니다. 현재 타이페이 소재 복합문화공간 <C-LAB(Taiwan Contemporary Culture Lab) 수석큐레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二二八事件到島嶼之歌 

後冷戰的東亞情勢轉變,從區域的政治民主化、經濟發展、區域整合與國際安全問題等不同領域的新現實架構,同時也促成了文化上的區域化發展。這也提供一個契機,讓東亞區域擺脫歐美世界的霸權視角,重新審視彼此,進而推動橫向文化交流和各項藝術合作計畫,近期美、中、日集團在東亞衝突升溫之際,來自濟州、沖繩、台灣三地藝術工作者自發的東亞和平藝術項目「EAPAP」更顯具意義。這三個看似無關卻又緊密交織一起的島嶼,藝術家、研究者們藉由認識彼此,以創作與人道主義的關懷,走出國族主義與悲情的創傷,以藝術串起合作與交流,共同批判戰爭、殖民與國家暴力,為藝術和平擁抱彼此。 

日治時期的台灣人受到皇民化教育,認同自身為日本人;二戰之後受到國民黨的黨國教育,認為自己是中國人,被灌輸大陸中原思考。不斷切換轉變的身份認同致許多大時代悲劇,被國民黨綁架灌輸忘卻了台灣其實身處西太平洋之中,成為亞細亞的孤兒。其實,台灣作為太平洋島嶼的一員,跟琉球和濟州都是海洋文化的一份子,黑潮才是撫育島嶼的共同母親。這三座島嶼為居於地緣上的關鍵地位,雖然同具坎坷歷史,但透過重返歷史的觀照,我們得以穿越歷史,映射出現實。

台灣近代史上的二二八 
1947年的台灣是個混亂的大時代。在二二八事件的陰影籠罩之下,草木皆兵,風聲鶴唳。為了鞏固脆弱的統治基礎,國民黨政府派遣軍隊用國家暴力鎮壓、屠殺台灣民眾,大肆逮捕並槍決台灣士紳、知識分子等社會菁英。整個世代的菁英在甚至有人在未經審判之下就被清鄉殺害,劃下一道無法彌補的歷史傷痕,二二八後來也讓台灣帶來長達38年的軍事戒嚴。如此的傷亡慘重,從此讓台人對中國感到失望,更成為後來台獨運動興起的重要原因。數十年來,二二八事件陰影一直籠罩著台灣社會,國民黨將其懸為禁忌,直到80年代末期,才能夠公開談論二二八事件的平反。受到二二八事件波及的代表藝術家分別是出生於台灣嘉義的陳澄波和來自中國重慶的黃榮燦。
 
油彩的化身:陳澄波CHEN Cheng-Po
陳澄波為日治時期及戰後油畫家,決瀾社和藝苑繪畫研究所成員。1926年以一幅《嘉義の町はづれ》(現稱為《嘉義街外》)的作品,入選第七回日本「帝國美術院展覽會」(簡稱「帝展」),這是台灣人首次以西畫跨進日本帝展的大門。1946年,陳澄波榮任嘉義市第一屆參議會參議員;隔年,臺灣發生「二二八事件」,當時臺灣光復沒有多久,大多數人聽不懂普通話,嘉義鄉親想到陳澄波之前到過上海教書,就推舉陳澄波擔任「二二八事件處理委員會」談判代表與軍隊協調,卻遭國民黨政府軍隊羅織罪名入獄。3月24日陳澄波被轉往嘉義市警局監禁,當日留下遺書表明為12萬嘉義市民犧牲,無怨也無悔。陳澄波被遊街示眾後,3月25日上午被當眾槍決在嘉義火車站前。家人四處奔走無法為其收屍,到傍晚當局才同意,家人拆下門版將大體運回。陳澄波成為台灣近代美術運動的重要化身,諷刺的是其忌日3月25日恰巧也是台灣的美術節。 

《恐怖的檢查》:黃榮燦HUANG, Rong-Can
當年,來自中國重慶的版畫家黃榮燦,以人道主義的關懷花了兩個月時間騎著單車實地訪查二二八事件的各方說法,製作了《恐怖的檢查》這件作品。黃榮燦不只埋首創作,1947年4月13日,他親自帶著《恐怖的檢查》版畫原件搭船前往上海,以「力軍」當作筆名發表在4月28日的上海《文匯報》。除了發表在報刊,《恐怖的檢查》還在11月上海舉辦的「全國木刻展」中展出。如願展出之後,黃榮燦便將作品贈送給日本友人內山嘉吉,內山嘉吉之後再轉贈日本神奈川縣立近代美術館典藏。這件作品才得以躲過當年國民黨特務追查,此作遂成為紀念二二八歷史傷痛最有力的重要圖騰,流傳至今。在1952年白色恐佈時期,黃榮燦被國民黨政府羅織叛亂罪處決。 

二二八事件是台灣史上,死傷最慘最多,影響最深廣的歷史事件。二二八事件已成為台灣人共同的夢魘、族群的共同潛意識;台灣人的意識、精神、情操、人間形象、人生理想,藝術創造,價值觀念等等,都隱含著「二二八」的因子。面對天災,我們或許找不到責怪對象,但戰爭與國家暴力的發動與建立理想社會的拉扯將永遠存在。我們不知道,健全的公民社會制度能否存在? 歷史給過人類教訓:溝通不良、歧視與手段過激常會引起反挫。回首至今,二二八事件埋下的種子,讓台灣人不再只是向西觀看,而是轉而向面海的一方,學會⾯對自我根源,建立更民主、公開透明的國家,適時挺身而出,盡我們所能不被歷史巨獸吞噬。 

如何懸置「亞洲」這個西方給予的概念?以島嶼為倡議,讓島鏈上的藝術家作為彼此同盟,開創出歷史的與政治地緣的時代共鳴。以藝術撫慰每個亂世中的人心,大聲吟唱出屬於我們的島嶼之歌。


二二八事件から「島歌」へ

冷戦後、東アジア情勢は変転し、さまざまな分野における現実の枠組みは、地域の政治的民主化、経済発展、地域統合と国際安全保障問題などを含めてさまざまに変化し、同時に文化的な面で地域の発展を促進してきた。それは、東アジア地域に、欧米世界優位の視点から脱して互いの関係を見つめ直し、横につながる文化交流と芸術協力プログラムを推進するチャンスを与えている。最近はアメリカ、中国、日本の衝突が東アジアで白熱するなかで、済州、沖縄、台湾の3地域の芸術家たちが自発的に参加するEAPAP:東アジア平和芸術プロジェクトが、その意義をさらに深めている。一見無関係に見えても密接に絡み合ったこの3つの島で、芸術家や研究者たちは互いに認識し合い、創作と人道主義的関心のもと、ナショナリズムと悲しい精神的な傷を乗り越えて、芸術を軸に、戦争や植民地主義、国家の暴力を批判し、平和芸術のためにお互いを抱擁する。 

日帝強占期の台湾人は皇民化教育を受けて、自分を日本人と見なした。第2次世界大戦後は国民党の党国教育により大陸の中華思想を植え付けられて、自分を中国人だと思った。絶えず変転するアイデンティティは時代の大きな悲劇を生み、台湾が国民党に拉致されたことは忘却され、西太平洋に身を置いたまま、台湾はアジアの孤児となった。事実、台湾は太平洋島嶼のメンバーであり、琉球と済州とともに海洋文化の一員であり、黒潮が島々を育む共同の母親だ。三つの島が地政学的に重要な位置にあるために、苦難の歴史を有してはいても、私たちは歴史への回帰という観点から、現実を照射することができる。 

台湾の近代史における二二八事件
1947年の台湾は大いなるカオスの時代だった。2·28事件の闇の中、まさに「草木皆兵、風聲鶴唳」だった。脆弱な統治基盤を固めようと、国民党政府は軍隊を派遣し、国家暴力を出動して台湾民衆を虐殺し、台湾の郷士や知識人などの社会的エリートたちの逮捕銃殺をほしいままにした。あらゆる世代のエリートたちがまともな裁判もなく粛清され、癒すことのできないほどの歴史の傷を与えた。二二八の後、台湾には38年間に及ぶ戒厳令がもたらされた。これほど多くの死傷者が出て、台湾は中国に対して失望し、それはのちの台湾独立運動勃興の重要な要因となった。数十年も台湾社会に影を落とす二二八事件を国民党はタブー扱いし、1980年代末になってようやく、二二八の名誉回復を公に議論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二二八事件で受難した代表的な芸術家に、嘉義出身の陳澄波と、中国の重慶出身の黄栄燦がいる。 

油彩の化身、陳澄波
陳澄波は、日本植民地時代と戦後に活動した油彩画家で、決瀾社和藝苑繪畫研究所のメンバーである。1926年に《嘉義の町はづれ》という作品で第7回日本帝国美術院展覧会(帝展)に、台湾人として初めて西洋画で日本帝展の門をくぐった。1946年、陳は嘉義市第1回参議会参議員に就任した。翌年に台湾で二二八事件が起こる。当時の台湾は光復(日帝からの解放)から間もなく、ほとんどの人が中国語を解さなかった。嘉義の人々は、以前に上海に行って講義をしたことのある陳を「二二八事件処理委員会」の交渉代表に任命し、軍隊と協議させたが、国民党政府軍が罪名をでっち上げて陳を投獄した。同年3月24日、陳は嘉義市警察局に連行監禁され、同日、12万嘉義市民のために犠牲となっても何の恨みも悔いもないという遺書をしたためた。陳は市街を引き回され、3月 25日午前、嘉義駅の前で銃殺された。家族が奔走しても遺体を回収できなかったが、夕方になって当局が同意し、大部分を収拾した。陳は、台湾近代美術運動重要な化身となり、皮肉にもその命日である3月25日は台湾美術の祭日となっている。 

《恐怖の検査》 黃榮燦
その年、中国重慶出身の版画家・黄永燦は、人道主義的関心から、二二八事件の各地を実地に訪れ、《恐怖の検査》を制作した。黄は、創作するだけでなく、1947年4月13日この作品の原版を持って上海への船に乗り、「力軍」のペンネームで、4月28日の上海《文匯報》で発表した。《恐怖の検査》は新聞発表の後、11月に上海で開かれた全国木版画展で展示された。展示後、黄は、日本の友人の内山嘉吉に作品を贈呈し、のちに内山は神奈川県立近代美術館に寄贈した。この作品は当時の国民党のスパイ捜査から逃れ、二二八の歴史的傷痕の最も有力で重要なアイコンとして今に伝わっている。1952年の白色テロ期、黄は国民党政府への反乱という罪名で処刑された。 

二二八事件は、台湾史上最も多くの死傷者を出し、最も深甚な影響を与えた歴史的事件だ。二二八事件は、台湾人たちが共有する悪夢、民族共同の潜在意識であり、台湾人の意識や精神、情操、人間像、人生の理想、芸術創造、価値観念などには、「二二八」の因子が潜んでいる。天災について誰も責めることはできないが、戦争と国家暴力の発動に対する理想社会構築の拮抗は永遠に存在するだろう。健全なデモクラシーシステムが存在するものか、私はわからない。歴史が過去に人類に与えた教訓は、ディスコミュニケーション、差別や手段の過激さは、常に同じように裁かれる結果に至るということだ。今にして思えば、二二八事件の蒔いた種は、台湾人を、ただ再び西洋を見るのでなく、海側へと転回して自我の根源と向き合い、もっと民主的で透明な国を作るために、歴史の巨大な獣にいつでも立ち向かい、飲み込まれないように育てあげた。 

西洋が与えた概念である「アジア」を、どう配置するか?島を合言葉に、島の鎖で結ばれた芸術家たちが互いに同盟し、歴史と政治の地縁の時代の共鳴を造り出そう。芸術は、乱世の中にいる人心を慰め、高らかにわれわれの「島の歌」を歌うのだ。


From 228 to “Island Song”

After the Cold War, the situation in East Asia has changed and new real frameworks in various fields, including regional political democratization, economic development, regional integration and international security issues, have simultaneously promoted the development of the region in terms of culture. It provides an opportunity for the East Asian region to re-examine its relationship with each other from the perspective of dominance of the Western world and to promote horizontal cultural exchange and art cooperation programs. Recently, the conflict among the United States, China and Japan has heated up in East Asia, and the EAPAP: East Asia Peace Art Project, in which artists from Jeju, Okinawa and Taiwan voluntarily participate, is deepening its significance. These three islands, seemingly unrelated but closely intertwined, the artists and researchers recognize each other transcend nationalism and sorrowful psychological scars, criticize war, colonialism and national violence,&#160;with concern of artistic creation and humanism, and embrace each other for the sake of peace art.

Taiwanese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colonial rule received imperial education and considered themselves Japanese. After World War II, hewas they were educated by the KMT and cultivated the idea of mainland China, thinking he was they were Chinese. The ever-changing identity has caused great tragedies of the times, and Taiwan has become an orphan in Asia while staying in the West Pacific, forgetting that it was abducted by the Nationalist Party KMT. In fact, Taiwan is a member of Pacific Island, a member of marine culture along with Ryukyu and Jeju Island, and the Kuroshio is their mother of the islands. Because the three islands are geopolitically important, we can shed light on reality in terms of a return to their history, even though we have a history of hardship.

The 228 incidents in the modern history of Taiwan
In 1947, Taiwan was in a period of great chaos in the darkness of the 228 incident. In an effort to consolidate the weak foundation of government, the KMT dispatched troops, mobilized the Taiwanese people by resorting to state violence, and allowed the arrest and shooting of Taiwanese people and intellectuals. Elites of all generations were purged without proper trials and that inflicted irreparable historical scars. After 228 incident, Taiwan came under 38 years of martial law. With so many casualties, Taiwanese became disappointed with China, which later became an important factor in the rise of the Taiwan independence movement. 228 has cast a shadow on Taiwanese society for decades, KMT has made it taboo. It was not until the end of the 1980s that the 228 restoration of honor was publicly debated. Representative artists affected by the 228 incident are 陳澄波CHEN Cheng-Po, born in Chiayi, Taiwan, and 黃榮燦HUANG, Rong-Can, from Chongqing, China. 

An Icon of Oil-colour painting: 陳澄波 CHEN Cheng-Po
陳澄波 CHEN Cheng-Po was an oil painter who worked during and after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a member of the Member of the Juran Society and Yiyuan Painting Research Institute. In 1926、his work titled “Outside Chiayi Street, 嘉義の町はづれ” was awarded at the 7th Exhibition Imperial Art Exhibition of Japan. For the first time as a Taiwanese artist in the Western style painting, he passed through the gates of the Japanese Imperial Exhibition. In 1946, Chen became a member of the first House of Councillors in Chiayi City. Next year of this, 228 incidents occured. It was soon after the liberation from Japanese colonial rule at that time, Most of people did not understand Mandarin Chinese. To consult with the KMT Military, Chen who once went to Shanghai to give lectures was appointed as the negotiating representative of the committee of 228 incident. KMT Military made up the name of the crime and prisoned him. On March 24 of the same year, Chen was transferred to and detained by the Chiayi Police Bureau. On the same day, he wrote in the letter that he had no grudge or regret when he sacrifice himself on behalf of 120,000 people of Chiayi city. Chen was towed around the city on the morning of March 25 and killed by gun in front of the Chiayi train station. The body could not be recovered even though family members rushed to the rescue, but in the evening the authorities permittede them to collect it. Chen became an important incarnation of the Taiwan modern art movement, and the anniversary of his death, ironically that March 25 happened to be celebrated as Taiwan Art Festival day.

The Horrifying Inspection(恐怖的檢查) 黃榮燦 HUANG Rong-Can
In 1947,a woodblock print artist from Chongqing, China, was inspired by humanitarian concerns. He visited every sites of the 228 incident, and produced a work titled The Horrifying Inspection. Hwang not only made the work but also took the original version of the print to Shanghai on April 13 1947, and showed it in the newspaper WenHuiPao(文匯報) dated April 28 by the pen name of “LiJun(力軍)”. After the release in the newspaper, the work was exhibited at the National Woodcut Art exhibition in Shanghai in November. After the exhibition, Hwang presented his work to his Japanese friend Uchiyama Tatsuyoshi、who later donated it to the Kanagawa Prefectural Museum of Modern Art. The work could escape from KMT espionage investigation and is now being passed on as the&#160;most powerful and important icon of 228 historical scars. During the white terror in 1952, Huang Yung-Tsan be execution by rebellion crime of the KMT government. 

The 228 attacks have caused the greatest number of casualties in Taiwan history and have had the most profound impact on the island. The incidents are the nightmares shared by the Taiwanese and the subconsciousness of the people. In the perseption, spirit, taste, ideals of life, artistic creation and values humanity of the Taiwanese people, 228 factors are embeded. We can blame nobody for natural disaster, but there will always be an antagonism to build an an ideal society against war and national violence. I do not know perfect democracy systems exist or not. The lesson that history taught us discommunication and the radicality of discrimination and means always bring about the opposite. I think that the seeds of the 228 incident has brought that Taiwanese should not only look at the West again but turned to the sea side and face the deepness of their self conciousness to build a more democratic and transparent country. We are ready to face the enormous beast of history and we never be swallowed by it.

How should we reorganize the concept of ASIA that the West gave us? Artists on the chain of the islands will join forces to create a resonance between the times of history and politics. Art consols the hearts of the people in the turbulent times and exaltedly sings our song of Is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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