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58. 로렌스 스턴, ‘트리스트럼 샌디’, 홍경숙 역, 문학과 지성사, 2015

로렌스 스턴, ‘트리스트럼 샌디’, 홍경숙 역, 문학과 지성사, 2015. 출처=예스24.

1. 신종코로나와 ‘기생충’

신종코로나만 아니었다면, BTS와 봉준호로 이어지는 한류 열풍의 훈기로 겨울의 끝자락을 따뜻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 한숨이 나온다. 신종코로나는 종교적인 문제와 뒤섞이면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전 세계에 알렸다. 한국의 반지하 셋방을 취재하던 외신은 이제 신천지를 취재할지도 모르겠다. 신종코로나는 결국 극복되겠지만 현재로서는 사태가 매우 엄중하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해 함부로 말할 게재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Book세통’이라는 이 코너는 어쨌든 책을 통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해야 하는 의무가 있으므로 무리가 있더라도 몇 마디 억지를 부릴 수밖에 없다. 억지스럽게 엮지 않으려면 카뮈의 ‘페스트’를 소개하는 정도의 글을 쓴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우리의 현실이 이미 그 소설의 상황을 훨씬 뛰어넘었으므로 맥이 빠질 것이 분명하다. 미디어를 통해 보도된 사례들만 하더라도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상을 수상할 수 있는 한국적인 영화의 소재가 넘쳐난다. 신종코로나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 그것과 맞서 싸우면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 앞에서 억지스러운 잡설을 늘어놓는 것이 송구하긴 하지만, 생사가 오가는 현실과 비교하면 글쓰기란 원래 한가한 일이 아닐 수 없으므로 독자의 양해를 구한다. 

봉준호는 아카데미 수상소감을 통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스콜세지 감독의 말을 인용했다. ‘기생충’이 창의적인 작품이라는 데 대해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봉준호는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었고,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렸다. 봉준호라는 이름이 하나의 장르라는 말은 그의 창의성이 기존의 질서에 포섭되어 살아남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문화적’ 진화의 과정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자연의 생물종은 환경의 변화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무기로 삼을 수밖에 없다. 돌연변이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구상의 생물들은 일찌감치 사라졌을 것이다. 

신종코로나는 바이러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창의적인 생명체이다. 비록 인간을 숙주로 삼아서 살아남겠다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오래 살아남기는 힘들겠지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영역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만약에 바이러스가 글을 쓴다면 자신들이 어떻게 인간들의 약한 고리를 찾아서 그것을 끊어내고 살아남고자 했는지에 관한 드라마를 쓸 것이다. 깨끗한 척 하는 인간들이 일상적으로 얼마나 많은 체액을 공유하는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이유로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음지에서 결속하는지를 간파한 바이러스는 영웅으로 묘사될 것이다. 종말론적인 드라마를 씀으로서 자신들의 사멸을 예언한 바이러스는 권위 있는 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신종바이러스의 창의성에 대한 이야기는 봉준호의 천재성을 폄하하거나 바이러스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영웅들을 희화화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재앙을 마주할 때 느끼게 되는 삶의 덧없음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한 것이다. 바이러스는 물론 글을 쓰지 못한다. 글을 쓰는 것은 인간이다. 글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삶을 다양하게 주제화한다. 우리가 오늘날 겪고 있는 고통 속에서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질 것이고 그 이야기에 담긴 주제들을 통해서 우리는 각자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할 것이다. 바이러스는 자신이 왜 인간의 몸으로 옮겨 왔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은 글을 통해 그런 설명을 시도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왜 그런 설명을 통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일까?

2. 시대를 앞지른 해체적 글쓰기

서구에서 일어난 근대화의 과정이란 막스 베버식으로 말하면 ‘탈신화화’의 과정으로 볼 수 있지만, 근대를 특징짓는 ‘계몽주의’ 역시 신화적인 스토리를 담고 있다. 데카르트에서 헤겔로 이어지는 인간 이성의 진보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이 갖는 의미를 설명한다. 그 이야기 속에서 인류의 역사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고, 따라서 거기에 참여하는 개인의 삶도 그렇다. 삶의 의미는 시작과 끝이 있는 이야기 속에서 확인된다. 다양한 이야기의 주제들이 우리 삶의 의미를 변주한다. 

여기서 근대적인 글쓰기의 특징이 부상한다. 글은 어떤 ‘주제’를 담는 것이어야 한다. 20세기에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글쓰기는 바로 그런 생각을 무너뜨리려는 문화적 변종이었다. 보르헤스의 글쓰기에서 데리다의 글쓰기로 이어지는 해체적 글쓰기는 글에서 시작과 끝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글에 마땅히 포함되어야 할 주제를 실종시켰다.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를 읽기 전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글쓰기 시도가 매우 창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소위 모더니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명칭으로 지성사의 시기를 구분하는 일이 얼마나 자의적이며 근거가 없는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로렌스 스턴의 이 책은 무려 18세기 중반에 쓴 것이기 때문이다. 400쪽짜리 두 권으로 국내 번역 출간된 이 책은 원래는 9권으로 된 장편소설이다. 여기서 이 책의 줄거리를 요약 소개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이 소설은 줄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원제는 ‘젠틀맨 트리스트럼 샌디의 삶과 견해’로 되어 있지만, 트리스트럼 샌디의 삶과 견해는 전혀 소개되지도 않는다. 주인공 트리스트럼 샌디는 국내 출판본의 1권이 끝날 무렵이나 되어서야 드디어 출생하지만 2권에 들어가도 파리를 여행한 이야기 몇 쪽이 산만하게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내용은 트리스트럼 샌디의 아버지와 삼촌이 벌이는 쓸데없는 장광설로 채워져 있다. 그들의 대화내용도 지리멸렬하고 산만해서 그 내용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식이다.

“층계 하나를 내려가는 사이에 일어난 일로 두 장을 채운다는 것은 너무 심한 일이 아니겠습나까? 사실 우리는 이제 겨우 첫번째 층계참에 도달했을 뿐이며, 밑바닥까지는 모두 열다섯 개의 계단이 남아 있으니, 아버지와 토비 삼촌의 수다스런 분위기로 미루어, 아마도 계단 수만큼의 장이 필요할 것 같은데, —설사 그렇게 된다 해도, 선생, 내가 운명을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속수무책일 따름입니다. —갑작스런 충동이 마음에 스치는군요.—막을 내려라, 샌디.—나는 막을 내립니다.—종이를 가로질러 금을 그어라, 트리스트럼.—내가 금을 그으니—보세요. 새 장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내가 지켜야 할 무슨 규칙이라도 있단 말입니까—만약 있다면—나는 무슨 일을 하든 어떤 규칙도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그 규칙을 비틀어 갈기갈기 찢은 다음, 불 속에 던져버리겠습니다.—따뜻하냐고요? 물론 따뜻합니다.—사람이 규칙을 따라야 하는가—아니면 규칙이 사람을 따라야 하는가? 멋진 이야기 아닙니까!”(338-339쪽) 

로렌스 스턴은 이렇게 자신이 그저 글을 쓰기 위한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글쓰기의 규범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의 인용문에서와 같이 조롱하고 있다. 나의 제안으로 억지로 이 책을 읽고 온 학생들은 이 책을 읽고 오라고 한 내게 화를 냈다. 자신들의 소중한 시간을 쓸데없는 독서로 낭비했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항의에 대한 변명은 역자의 스턴에 대한 평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턴의 탁월함은 그가 소설의 내용과 형식의 새로운 장을 여는 데 머물지 않고 인간의 삶 자체가 그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줄거리, 인과관계, 종결 등이 무시된 통제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있다.”(397쪽)

전염병의 공포와 불안은 삶의 우연성과 맞물려 있다. 누군지 모를 보균자와 마주치는 일을 완벽하게 피하기는 어렵다. 단지 누군지 모를 그와 우연히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삶이 갑자기 마감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런 삶에 우리는 기승전결 혹은 서론, 본론, 결론의 글쓰기를 통해 이야기를 만들고 의미를 부여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의미의 의미에 대해 묻는 이 글은 대체 어떤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이 두서없는 글은 도대체 어떻게 끝을 내야 하는 것일까?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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