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61. 밴 때는 한 시름, 낳은 때는 열 시름

* 밴 땐 : (아이를) 배었을 때, 임신했을 적
* 난 땐 : (아이를) 낳았을 때, 출산하고 나면

그냥 해 본 푸념 따위가 아니다. 아이를 가졌다 하면 먼저 뿌듯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임산부도 그 남편도, 시부모 할 것 없이 다들 기뻐하게 마련이다.

더군다나 손이 귀한 집안일 경우는 온 가족이 좋아라고 마음 들뜰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하지만 그런 고무된 집안 분위기는 뱃속의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뿐, 막상 태어나고 나면 아이를 키우는 일에 부대껴야 한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이야 어찌어찌 치다꺼리한다지만, 아이가 커 가면 신경 써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남들처럼 잘 입혀야 하고 잘 가르쳐서 훌륭한 사람으로 양육하기 위해 발달단계에 따라 학교에도 보내야 한다.

학교도 초등학교만이 아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치면 대학까지는 일반적으로 거쳐야 하는 코스다. 요즘 대학 안 나온 사람이 있는가. 사람 구실 제대로 하며 살라고 부모가 자식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보편화된 교육과정이다.

무상 급식에 교복까지 무상으로 지급되는 요즘은 꿈같은 일이다. 예전엔 특히 시골에서 여자아이는 초등학교도 보내지 않았다. 부모의 농사짓는 일을 도와야 했기 때문이다. 빠듯이 남자아이도 중학교까지 시키면 된다고 여겼다.

공부가 시원치 않으면 시내 고등하교 진학은 어림도 없었다. 방 세 내랴, 비싼 공납금 내랴, 밖에 내놓으면 용돈도 쥐어 줘야 한다. 하물며 대학은 아득히 먼 데 있었다. 한 마을에 대학 나온 사람이 한둘이 될까 말까 했으니. 1950년~1960년의 우리네 삶의 풍경이었다.

1988년 성읍리 애기구덕 모습. 출처=김만덕기념관, 강만보.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988년 성읍리 애기구덕 모습. 출처=김만덕기념관, 강만보.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그러니 ‘밴 땐 혼 시름, 난 땐 열 시름’이란 말이 안 나올 수가 있으랴.

아기가 들어섰구나 할 땐 희망에 가슴 설레어 시름을 잊게도 되니, ‘혼 시름’인데,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하나에서 열까지 뒤치다꺼리에 드는 게 돈이니 ‘열 시름’이라 함이다. ‘열 시름’이라 한 소리엔 아이를 키우려고 억척스럽게 살면서 내쉬던 옛 어멍(어미)들의 한숨이 짙게 배어 있다. 그냥 한숨이 아닌 장탄식이었다.

그래도 우리 선인들은 자식을 고이 길러 훌륭한 일꾼이 되게 하리라는 일념으로 평생을 살았다. 먹을 것 안 머고 남루를 거친 채 허름한 초가집에서 더위와 추위도 잊고 살던 분들이다. 1950년대만 해도 우리네 삶이 참 구차했다. 보리쌀을 덜 빻아 겨가 붙은 대로 먹었다. 양식이 줄어들어 버릴까 봐 그랬다. 밀도 메밀도 마찬가지였다. 식구들을 한 끼라도 더 먹이려 한 것이니, 얼마나 군색한 노릇이었는지 모른다.

쌀도 산디쏠(산도, 山稻 ; 밭벼), 조악해 차지지 않고 거칠었다. 불현듯 베트남에서 수입한 알량미(베트남의 한자 借字 안남이 알량으로 변음됨, 활음조 현상) 생각이 난다. 쌀알이 따로 놀아 풀기가 없었던 생각이 난다.

지금도 교육열에 관한 한 제주도를 따를 지역이 없잖은가.

박한 섬 제주에 한 시대를 살아 자녀들을 잘 키워 중앙으로 진출시킨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들. 당신들의 ‘열 시름’을 잊고 살았던 생애를 오늘에 돌이키게 된다. 갑자기 숙연해 눈물겹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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