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6) 박경훈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18년부터 세 나라 세 섬의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어 이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세 섬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로 국외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어 일어, 영어 번역 원고도 동시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4.3해원상생굿은 2002년 처음 시작되어 올해까지 단 한번 쉰 것을 빼고는 내리 18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4.3학살터’와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가는 현장예술제이며,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을 달래는 위령굿이다. 4.3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는 4.3해원상생굿은 현대 예술과 전통 의식이 함께 하는 생명굿이면서 동시에 현재와 미래의 평화를 열어 가는 평화예술프로젝트이다.

해원상생굿 모습. 사진=박경훈. ⓒ제주의소리
다랑쉬굴로 가는 길. 도로에서 다랑쉬굴 유적지까지 보행로 주변을 따라 설치한 흑백 만장들. 멀리 다랑쉬오름이 보인다. 2002. ©강정효.

트라우마

‘트라우마(Trauma)’란 ‘상처’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트라우마트(Traumat)를 어원으로 한다. 통상의 의학적 용어로는 ‘외상(外傷)’을 뜻하나, 심리학에서는 ‘정신적 외상’, ‘(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을 말한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로 말하기도 한다. ‘정신적 외상’이란 충격적이거나 두려운 사건을 당하거나 목격하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외상들은 대부분 갑작스럽게 일어나며 경험하는 사람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준다. 트라우마는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동반하는 경우가 극히 많으며 이러한 기억이 장기지속된다는 특징이 있다.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사람은 사고 당시의 외상이나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비슷한 상황에 처하거나 기억이 떠오를 때, 불안감과 극심한 감정적 동요를 겪기도 한다. 

또한 그런 외상이 이미 지나간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 당시의 충격적인 기억이 떠오르고, 그 외상을 떠오르게 하는 활동이나 장소를 피하게 된다고 한다. 특히 4.3과 같은 ‘집단 트라우마(collective trauma)’는 사건을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상이 지역사회의 구성원에 의해 공유되고 사회적 관계를 통해 확산된다. 집단 트라우마에서 외상적 사건은 시·공간적으로 확장되어 과거에서 현재·미래로 투사되며,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나 집단으로까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 전승(social transmission)을 통해 세대를 넘어 영향을 끼치고, 발생 이전의 사회적 규범과 가치, 의미 체계를 붕괴·변화 시키기도 한다. 사람들은 직접적인 외상 경험 때문이 아니라 외상을 겪은 선조들과의 관계 때문에 외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개인도 먼 과거의 외상 생존자와 동일시하게 된다고 한다. 4.3을 겪은 제주섬 주민들은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70여 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그 트라우마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

제주섬의 4.3집단 트라우마

4.3이라는 미증유의 역사적 사건과 조우한 제주섬 주민들의 트라우마는 지독한 것이어서 두 세대가 지나도록 체험자와 유족들은 물론 제주도민들은 4.3의 기억으로부터 드리운 그림자를 안고 살아야 했다. 3만여 명이 학살당한 엄청난 인명피해와 4만여 동의 가옥이 불태워지는 물적 피해 등 그야말로 제주공동체는 철저히 유린되었다. 또한 4.3 이전의 사회구조가 반공국가의 변방으로 재편되면서 일제로부터 해방공간까지 이어지던 제주공동체의 인적·물적 권력관계 역시 극심한 변동을 겪어야 했다. 일찍부터 빨갱이의 섬(Redisland)로 낙인찍힌 제주사회는 그 반동으로 철저한 육지사람콤플렉스와 집단적 트라우마를 겪어야 했다. 

특히 4.3사건이 종료되었다고 공식 기록된 1954년 이후로도 그 권력적 속성을 계승한 박정희 군부독재 18년, 전두환 5년의 외형적 독재기간과 이후 87년 6월 항쟁에 의해 등장한 노태우 김영삼 정부하에서도 그 속성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이 긴 시간 동안 여전히 4.3은 금기의 영역으로 치부되었다. 특히 ‘연좌제’를 통해 유지된 공포의 지속성은 제주지역사회공동체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 태도 심지어 언어 사용에서까지 그 영향을 미치었다. 어릴적 어른들이 흔히 얘기했던 “큰일 날 소리 하지 말라”, “입도 벙긋하지 말라”는 금기의 워딩들은 바로 이 집단 트라우마를 봉인하는 주술의 언어들이었던 것이다. 제주사회에서 4.3로 인한 집단트라우마는 근 50년에 걸쳐 이어져 온 셈이다. 

해원상생굿 모습. 사진=박경훈. ⓒ제주의소리
2002년 4월 5일 첫 번째 해원상생굿이 벌이진 다랑쉬굴 주변. 해원상생굿의 행사명은 ‘다랑쉬굴 4.3민간인의생자 추모 해원상생굿-살아남은 자들의 흰그늘’이었다. 2002. ©강정효

4.3해원상생굿

4.3해원상생굿은 이러한 개인적 트라우마와 집단적 트라우마를 넘어선 생태적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일종의 예술퍼포먼스이면서 컨템포러리아트와 정신적 치유의례였던 전승 ‘굿’의 접맥을 시도했던 산물이다.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4.3해원상생굿의 기원은 11구의 4.3희생자 유골이 발굴되면서 제주사회를 뒤흔들었던 다랑쉬굴 발굴 10주년을 맞아 2002년 처음 시도되었다. 당시 이 행사를 기획했던 필자의 기획취지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해원원상생굿을 왜 하는가? 그것은 예술의 쓸모 있음에 대한 모색이면서 동시에 예술의 쓸모 없음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신화에서 세속의 시간으로 내려온 인간의 시간, 역사의 길을 예술이 연어처럼 거슬러 신을 울리고 영개를 울릴 수 없음에 대한 지독한 독백이요 절망에 대한 다른 몸부림이다. 예술이 원초적인 인간의 영혼을 치유할 수 없으리라는 어떤 예감, 그 한계에 대한 나름의 처방전이다. (중략) 해원상생굿은 인간만을 위무하지 않는다. 비극적 죽임을 당한 ‘학살의 터’를 찾아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상처받은 장소, 즉 ‘죽임의 장소’였던 자연의 공간까지도 함께 치유하는 ‘상생의 굿’이며 ‘생명의 굿’이다. 그러므로 이 굿은 인간과 자연이 동시에 치유되어야 할 대상임을 일깨우는 일이며, 이제는 죽음의 터전이 되어버려, 기억하기 싫은 몸서리치는 ‘죽은 땅’을 되살리는 ‘회생의 제의’이기도 하다. 해원상생굿은 현재의 문화예술과 전통적 연희인 굿을 빌려 죽은 자와 죽은 땅에 보시하는 일이다. 맺힌 죽음, 맺힌 땅을 풀어주는 본풀이이며, 땅풀이다." (후략)

그 당시 4.3트라우마를 예술로서 어떻게 풀어나가느냐는 중대한 과제였다. 4.3트라우마가 현대예술장르로는 감당안된다는 자괴감과 그로 인한 강박에서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 이미 흘릴 눈물조차 말라버린 4.3체험자들에게 그림 한 점, 시 한 편이 어떤 위로와 의미를 가질까라는 좌절감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 “예술의 쓸모 있음에 대한 모색이면서 동시에 예술의 쓸모 없음에 대한 반성”은 이에 대한 고백이다. 현대예술이 감당할 수 없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유효했는지, 첫 번째 해원상생굿에서 유족들은 죽창 같은 어욱 뿌리에 찔려 발바닥에 피를 흘리는 춤꾼의 춤사위에, 죽음의 내력담인 ‘본풀이’를 구송하는 심방(무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눈물을 흘렸다. 일종의 카타르시스였을 것이다. 해원상생굿을 통해, 다랑쉬 유족들은 참혹했던 섬을 떠나 몇십 년 만에 희생당한 유족들끼리 만나기도 했다.

해원상생굿 모습. 사진=박경훈. ⓒ제주의소리
다랑쉬굴 입구에서의 ‘풍장굿’. 풍장은 농악의 이명이기도 한데, 육지부에서 논의 벼가 기운 없이 스러져 있을 때, 농악꾼들이 밤새 풍물을 쳐내 스러진 벼들을 다시 꼿꼿하게 세우는 데서 착안한, 풍물소리로 버려진 땅, 죽은 터를 살리는 의례이다. 2002. ©강정효
해원상생굿 모습. 사진=박경훈. ⓒ제주의소리
다랑쉬굴 해원상생굿에서 진혼무를 추고 있는 춤꾼 이애주. 이애주는 이날 거칠게 벌초한 다랑쉬굴 주변의 억새밭에서 날카로운 억새 뿌리에 찔린 발바닥에 피가 오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춤을 추어 참여자들의 감동을 이끌었다. 2002. ©강정효

산남지역 각지에서 끌려와 4.3 내내 학살당했던 악명높았던 정방폭포 학살터에 벌였던 해원상생굿의 경우, 굿을 보러 왔던 유족들이 기존의 지역별 4.3유족회와는 달리, ‘정방폭포유족회’를 결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며, 오랫동안 ‘해태동산’이라 불렸던 ‘도령마루’는 해원상생굿을 계기로 대로변의 ‘해태상’이 철거되고 본래의 지명을 되찾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해원상생굿이 찾아가는 곳들은 4.3 당시 집단학살터나 초토화작전으로 소실되어 다시는 복구되지 못한 소위 ‘잃어버린 마을’터들이 대부분이다. ‘화북리의 곤흘동’이나 ‘동광리의 무등이왓’ 등은 해원상생굿을 치르고 나서 세상의 이목을 끌면서 다크투어리즘의 방문포인트로 부각되기도 했다. 

해원상생굿이 이루어진 몇몇 장소들은 집단학살 이후 버려진 터들로 그 내력을 알고 있는 주민들은 다시는 그곳에 가려고 하지 않았던 곳들로 소위 트라우마 장소들이다.  학살의 끔찍한 기억은 학살터마저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해원상생굿은 이 죽은 터와 죽은 이들, 살아남은 자들을 위무하는 ‘트라우마힐링프로젝트’로 아직도 갈길이 멀다. 아마도 다 돌아본다면 앞으로도 200여 군데는 더 남았다. 제주섬 어느 곳이든 학살터가 아닌 곳이 없으며, 죽음의 기억이 드리워지지 않은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해원상생의 굿판에서는 그 학살과 관련된 체험자들이 직접 출연해 당시의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준다.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체험자들의 이야기는 이 굿판에 참여한  유족들·지역주민·일반시민·학생들에게 함께 공유되고, 체험자들은 이 과정을 통해 오랜 트라우마의 장막을 걷어내고 치유의 여정에 오르게 된다. 그 자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치유사이기도 한 것이다. 제주에서의 평화예술은 4.3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4.3학살터’와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가는 해원상생굿은 이 섬에 깊게 드리운 4.3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치유의 몸굿’이자, 생명과 평화의 기운이 생동하게 하는 제주식의 ‘평화예술의례’이다. / 박경훈 작가

* 최윤경, <집단트라우마와 마음의 치유>, 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논문집, 2014.

박경훈 작가는 제주대학교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사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4.3목판화를 중심으로 미술운동을 했으며, 각 출판사를 설립해 200여종의 인문학 서적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탐라미술인협회 회장,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비영리예술공간 포지션민제주 운영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治癒創傷的和平藝術,解寃相生的4.3巫儀

朴京勳

「4.3解寃相生」的巫儀始於2002年,除了其中一年停辦之外,至今已經舉行了18年。這是一個藉重訪「4.3屠殺」現場和「遺落村莊」的藝術節慶,也是對被遺忘的死者進行悼念的儀式。尋求撫慰4.3創傷的「4.3解寃相生」是當代藝術與傳統共融結合的生活巫儀,希冀能祈求現在與未來的和平,同時也是一個治癒創傷的和平藝術計畫。 

4.3創傷
“Trauma"源自于希臘語"Traumat",意爲"受傷"。在普通的醫學用語中是指"外傷",但在心理學上,它的意思是"精神的外傷"、“衝擊"(留下永久的精神障礙)。也稱為"創傷後壓力症候群(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 所謂”精神外傷”,就是遭受或目睹令人震驚和可怕的事件,這些創傷幾乎是突然發生,帶給經歷的人嚴重的痛苦。創傷往往伴隨着鮮明的視覺圖像,並具有長期持續的特點。抱着心理創傷生活的人,在因事故發生時的外傷或精神上的衝擊而處於類似情況或記憶浮現時,可能會出現嚴重焦慮和極度情緒波動。

所謂"集體創傷(Collective Trauma)”,是指可能成爲大規模創傷的原因並影響國家,區域和全世界的災難。集體創傷還會導致社會規範,價值觀和意識體系崩潰。因此,集體創傷不僅限於直接遭受創傷的人,而是創傷事件的心理後果通過社會分享來承擔,並通過社會成員之間傳遞。在大規模集體創傷中,創傷事件可能在時間和空間上擴展,從過去到現在和未來都能被預測,並且可以影響到非直接受害者的其他人或群體。儘管創傷事件已經結束,但人想起當年的記憶卻令人震驚,甚至會迴避那些令人想起創傷的事件或地點。

問題的嚴重性在於它不僅影響當事方,而且影響他們的後代。社會學家崔允京(音)的論文《集體創傷和心靈的治癒》(韓國社會學協會,社會學大會論文集,2014年)詳細介紹了這種現象。創傷的影響可以傳播給後代。在歷史創傷中,未直接遭受創傷的人可能會因爲祖先的關係而遭受負面心理症狀。創傷的過程還會損害家庭的基本社會功能,甚至導致沒有遭受創傷的個人直接將自己與遙遠的過去的倖存者區分開來。濟州島的居民經歷了4.3慘案的經歷,他們個人和集體都遭受了創傷,那段創傷的旅程尚未結束。

4.3倖存者和遇難者家屬的集體創傷
遭受史無前例的4.3歷史事件的濟州島居民的創傷是極度可怕的。即使經過了兩代人,倖存者和遇難者家屬們也不得不生活在4.3的記憶陰影中。4.3事件也動搖了整個濟州,當時,濟州島的人口被屠殺了10%,造成了巨大的人身傷亡和物質損失。因爲可怕的焦土作戰徹底破壞了濟州社會,因此從日本帝國主義統治時期延續到解放後整個濟州共同體的人力、物力與權力關係也經歷了巨大的變動。4.3事件之前的社會結構被反共國家的前線化重組。濟州社會很早就被烙印上"赤色之島(Red Island)”的印記。因此,濟州社會不得不經歷徹底的韓半島的反共抗爭和集體創傷情節。

尤其,即便在1957年正式記錄4.3事件結束以後,我們經歷了繼承其權力屬性的朴正熙軍事獨裁18年,全斗煥5年的軍事獨裁時期。之後在1987年6月抗爭中登場的盧泰愚,金泳三政府時期,其屬性依然維持。在這漫長的時間裏,4.3慘案仍然被視爲社會禁忌。1987年6月的抗爭雖然是有限的,但由於公眾對民主的渴望而爆發,濟州4.3也在此時開始大聲疾呼,這首次消除了漫長的創傷之幕。經歷破裂至今已有十多年了,直系親屬開始見證4.3的真相。但是,這並不意味著濟州社會此時已經克服了群體創傷。

回顧過去,濟州社會的集體創傷已經持續約50年。兒時長輩們常說的「不要亂說話」,「保持沈默」這些都是封閉式集體創傷的恐懼語言。特定時間發生的歷史事件影響了濟州當地社群的價值觀,生活方式,態度甚至語言的使用。特別是,通過長時間的「連坐制度」的恐懼持續維穩造成了4.3的社會集體創傷。以目前的進步形式,無論個人還是群體,在任何時候都將噩夢召喚起來都是恐怖的。

4.3 解冤相生
4.3 解冤相生是一個融合傳統與現代的融合項目,旨在克服濟州4.3慘案對個人和社會集體的傷害。 這是將傳統薩滿儀式與當代藝術結合的一種表演藝術。目前,這持續進行的精神創傷修復計畫已有近20年的歷史。 4.3解冤相生的起源是在1992年發掘11具4.3犧牲者遺骨時,爲了紀念曾轟動濟州社會的多浪溪窟發現10週年而首次舉行。在這裡,我介紹由該作者撰寫的項目的文件的一部分。

"我們爲什麼要表演解怨相生?這不僅是在尋找藝術的用處,也是對藝術無意義的反思。人類時間和歷史的藝術從神話傳給了世俗主義。這是對無法使上帝哭泣和迴盪到鮭魚之前的殘酷獨白,以及與絕望的另一場鬥爭:它預示著某種藝術將無法治愈人類原始靈魂及其局限性的預兆。藝術無法治癒原始人的靈魂,這是某種預感,也是對這種侷限的自我處方。(中略) 神社的少女不僅撫慰人類。藉由尋找悲劇的“屠殺地點”,不僅可以治愈人的靈魂,還可以治愈受傷的地方,而被稱為“殺戮之地”的自然空間則是“共存的巫師”和“生命的聖殿”。儀式“。因此,這座神殿提醒我們,人與自然都是同時要醫治的對象,現在已成為死亡的基礎,並使我們不想記住發抖的“死亡聖地”復活。這也是一個“再生建議”。祭司制度將通過當前的文化藝術和傳統戲劇應用於死者和死者。這是緩解與死亡有關的土地的“本解”和“地解”方案(後略)。 "

當時在進行4.3藝術活動的過程中,藝術如何解決4.3心理創傷的問題是一個重大的課題。沮喪的是,一幅畫或一首詩對已經流淚的倖存者沒有任何影響。“尋找藝術的有用性,同時也反思藝術的無用性”是這情況的表達。這是一個關於現代藝術如何療癒這艱困的歷史創傷議題。在最初的解怨相生儀式中,儀式上的薩滿祭司被竹槍的根部刺穿了腳底,流血不止,死者家屬聽了薩滿祭司的聲音後流下淚來,這可能是一種宣洩的方式。洞穴中的家屬與他們的亡故親人會面,他們首度在離開這個悲慘的島嶼幾十年後相遇。

在惡名昭彰的正房瀑布屠殺現場也舉行了「解冤相生」儀式。 4月3日中旬,來自濟州南部地區各地的濟州居民被帶到這裡並被屠殺。與之前各地區4.3遺屬會不同,前來祭拜的遺屬們以成立「正房瀑布遺屬會」爲契機,長期以來被稱爲"海太洞山"。 解冤相生儀式去的地方大部分是4.3當時因集體屠殺或焦土化作戰而被消失滅絕的「失落村莊」遺址。 無論是《華北里的昆屹洞》,還是《東光里的無等伊瓦》等地,在舉辦完儀式後,都吸引了世人的關注,成爲黑暗旅遊的觀光景點。
自從被滅村以來,「解冤相生」的一些遺址就被廢棄了。知道其歷史的居民從未想再去的地方就成為所謂的創傷,慘案的可怕記憶使該地點變成了死亡之地。「解冤相生」儀式是慰藉這些死去的地方和死去的人們,生存下來的人的創傷治癒項目,這是尚未結束的旅程。回顧歷史過往,還有200多處未進行。因爲濟州島的任何一個地方不是屠殺場,也沒有不留下死亡記憶的地方。由濟州4.3開始的和平藝術計畫是治癒島嶼深陷的4.3創傷,藉此儀式再次讓島嶼重新燃起生命的氣韻。


トラウマを癒す平和芸術プロジェクト、4.3解寃相生の巫儀
朴京勳

4.3解寃相生の巫儀は、2002年に始まり今年まで、一度の休止を除いて18年間続いている。 それは「4.3虐殺の場」と「失われた村」を訪ねる芸術祭であり、無念に死んだ魂たちの慰霊の儀式である。トラウマとしての4.3を治癒しようとする4.3解寃相生の巫儀は、現代芸術と伝統儀式が共にする生命巫儀であり、同時に現在と未来の平和を開いていく平和芸術プロジェクトだ。

4.3のトラウマ
「トラウマ(Trauma)」は「傷」という意味のギリシャ語のトラウマート(Traumat)を語源とする。通常の医学的用語では「外傷」を意味するが、心理学では「精神的外傷」、(永久的な精神障害を残す)「衝撃」を意味する。「外傷後ストレス障害:Post-Traumatic Stress Disorder:PTSD)」とも言う。トラウマは、衝撃的で恐ろしい事件にあったり目撃したりする際に、ほとんどが突然起こり、経験する人にひどい苦痛を与える。トラウマは鮮明な視覚的イメージを伴うことが極めて多く、このような記憶が長く続くという特徴がある。トラウマを抱えて暮らす人は、事故当時の心的外傷や精神的衝撃のため、似たような状況に置かれたり、その記憶が浮かんできた時、不安感と激しい感情的動揺を経験することもある。
「集団トラウマ(Collective Trauma)」とは、大規模なPTSDの原因となったり、国や地域、世界中に影響を与えうる災害をいう。集団トラウマは社会的規範や価値、意味体系を崩壊させたりする。そのため、集団トラウマは心的外傷を直接経験した人に限られず、社会的伝承(Social Transmission)を通じて外傷的事件の心理的結果が地域社会の構成員によって共有され、社会的関係を通じて広がる。集団トラウマにおいて外傷的事件は時間・空間的に拡張され、過去から現在・未来に投射され、直接的な被害者ではない他の人や集団にまで影響を与えうる。トラウマとは、すでに終わった事件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その当時の衝撃的な記憶が浮かび上がり、それを想起させるような活動や場所を忌避させる。
問題の深刻さは、当事者だけでなくその子孫にまで影響を及ぼすという点にある。心理学者チェ・ユンギョンの論文「集団トラウマと心の癒やし」(『韓国社会学会、社会学大会の論文集』2014)は、このような現象を詳しく教えてくれる。トラウマの影響は子孫に伝わる可能性がある。歴史的な外傷において人々は、直接的にトラウマを経験していなくても、経験した先祖との関係から、否定的な心理的症状によって傷つきやすくなる結果が生じうる。 また、トラウマは家族内の一次的社会化の過程にダメージを与え、トラウマを直接経験していない個人も、遠い過去におけるサバイバーと自己を同一視する。4.3を経験した済州島の住民らは、個人的かつ集団的にトラウマを経験している。 トラウマの旅はまだ終わっていない。

4.3体験者と遺族の集団トラウマ
4.3という未曽有の歴史的事件に遭遇した済州島住民のトラウマはひどいものだった。体験者や遺族は2世代が過ぎても、4.3の記憶が落とす影を抱えて生き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社会的にも4.3は済州を揺るがした。当時、済州道の人口の10%が虐殺され、莫大な人命被害と物的被害が発生した。 恐るべき焦土化作戦によって済州の共同体は徹底的に破壊され、これにより日本帝国から解放空間まで続いた済州共同体の人的・物的権力関係も激しい変動を経験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4.3以前の社会構造は反共国家の辺境として再編されたのだ。早くから「アカの島(Red Island)」という烙印を押された済州社会は、その反動で徹底した半島人コンプレックスと集団的トラウマを経験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特に、4.3が終了したと公式に記録される1957年以後も、私たちはその権力的属性を継承した朴正熙18年、全斗煥5年の軍部独裁期を経験した。以後、1987年6月抗争によって登場した盧泰愚、金泳三政権下でもその属性は依然として維持された。この長い時間、4.3は禁断の領域と認識された。1987年6月抗争は制限的ではあっても民主化に対する国民的欲求を噴出させ、済州4.3もこの時に初めてこの長いトラウマのカーテンを取り除いて声を上げ始めたが、タブーの社会的風土が壊れ、体験者と直系遺族らが4.3の真実を証言し始めたのはそれから10年余りも経った後のことだ。だからといって、この時期の済州社会が集団トラウマを克服したわけではない。
振り返ってみれば、済州社会での集団トラウマは約50年にわたって続いてきたわけだ。幼い頃、大人たちがよく言った「滅多なことを言うな」「口にするな」というタブーの言葉は、まさにこの集団トラウマを封印する恐怖の言語だった。一定の時期に発生した4.3という歴史的事件は、済州地域社会共同体の価値観や生き方、態度、言語使用にもその影響を及ぼした。特に長期にわたって「連座制」を通じて維持された恐怖の持続が、4.3の集団的トラウマを残した。 それは個人と共同体の悪夢のような4.3の記憶をいつでも召喚する現在進行形の恐怖だった。

4.3解寃相生の巫儀
4.3解寃相生の巫儀は、済州の個人的トラウマと集団的なトラウマを克服するため、伝統と現代を融合したプロジェクトである。それは「グッ」と呼ばれる精神的な治癒儀礼である巫儀をコンテンポラリーアートと組み合わせた一種のパフォーマンスアートだ。現在も続くこのエコロジカルなトラウマ治癒プロジェクトは20年近い歴史を有する。 4.3解寃相生巫儀の起源は、1992年に4.3犠牲者の11人の遺骨が発見されて済州社会を揺るがしたダランシ窟発掘10周年に際して初めて試みられた。当時、この行事を企画した筆者の趣旨文の一部をここに引用する。

"なぜ巫儀をするのか。それは、芸術の有用性の模索であると同時に、芸術の無用性への反省でもある。神話から世俗へと受け継がれてきた人間の時間、歴史の道を芸術が鮭のように遡って神を泣かせ、凛を響かせることができないことに対する厳しい独白であり、絶望に対する別のたたかいだ。芸術が原初的な人間の魂を癒す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予感、その限界に対するそれなりの処方箋だ (中略)。巫儀は人間だけを慰撫しない。悲劇的な「虐殺の場」を探し、人間の霊魂だけでなく、傷ついた場所すなわち「殺しの場所」だった自然の空間までも、ともに治癒する「共存の巫儀」であり「生命の巫儀」である。それゆえこの巫儀は、人間と自然とが同時に治癒すべき対象であると悟らせるものであり、今や死の基盤となってしまい、思い出したくもない身震いするような「死んだ地」をよみがえらせる「回生の提議」でもある。巫儀は、現在の文化芸術と伝統的な演戯を通して、死者と死地に布施することだ。 死と結ばれた地をほぐす「本解」と「地解」である (後略)。」

その当時、4.3芸術活動を推進しながらも、4.3トラウマを芸術としてどう紐解いていくかという問題は重大な悩みの種だった。4.3トラウマの深さが現代芸術のジャンルにマッチできないという罪悪感とそれによるプレッシャーから始まったものかもしれない。すでに流す涙も枯れてしまった4.3体験者には、絵一点、詩一篇がなんの影響も及ぼさないという挫折感から来た可能性もある。

芸術の有用性に対する模索であると同時に芸術の無用性への反省とは、このような状況を表現したものだ。それは現代芸術が、手に負えない歴史的トラウマを治癒する方法に対する悩みだった。 こうした悩みが功を奏したか、最初の巫儀で、竹槍のようなススキの根に刺された足の裏に血を流す踊り手の声に耳を傾けながら遺族が涙を流した。それは一種のカタルシスだったのだろう。残酷な島を去っていたタランシィ窟の遺族たちは、ここで数十年ぶりに互いに会うことになった。
悪名高い正房虐殺跡でも巫儀が行われた。4.3のさなか、山南地域各地の済州島の人々がここに連行されて虐殺された場所だ。巫儀を見に来た遺族たちが、従来の地域別の4.3遺族会ではなく、「正房瀑布遺族会」を結成するきっかけにもなり、長い間「獬豸庭園」と呼ばれた「郎子床」は、解寃相生の巫儀を機に、本来の名を取り戻す契機になったこともある。 解寃相生の巫儀が訪れるのは、4.3当時、集団虐殺からか焦土化作戦で焼失され、または復旧されなかったいわゆる「失われた村:トドゥル」が大半だ。 いくつかの村は、巫儀を行ってから世間の注目を集め、ダークツーリズムの訪問ポイントにもなった。
巫儀が行われたいくつかの場所は集団虐殺後に放棄された場所だった。 その由来を知っている住民は二度とそこに行こうとしなかった場所で、いわゆるトラウマの場所だ。 虐殺の残酷な記憶は虐殺場まで死の地にしたのだ。巫儀は、この死地と死者たち、生き残った者たちを祀るトラウマ・ヒーリング・プロジェクトで、まだ終わらない道程にある。 顧みるとまだ200ヵ所残っている。 済州島にはどこにも虐殺場でない所がなく、死の記憶が残っていない所がなかったためだ。済州4.3で始まった平和芸術はこの島に深く垂れこめた4.3トラウマを治癒する肉体の儀式であり、この島に再び生命の気韻を動かそうという芸術儀式なのだ。


A Peace Art Project to heal the Trauma, 4.3 Haewon-Sangsaeng Gut*

BAK Gyeonghun

4.3 Haewon-Sangsaeng Gut was first launched in 2002 and has been continuing for 18 years, except for just one rest until this year. It is an art festival to visit the 4.3 massacre sites and the lost villages, and a memorial rite to soothe the unjustly deceased original spirits. 4.3 Haewon-Sangsaeng Gut which seeks to heal the trauma of 4.3,  is a ceremony of life with modern art and traditional ceremony, and at the same time is a peace art project that opens up peace now and in the future.

4.3 trauma
'Trauma' is an etymology for the Greek word 'injured'. As a conventional medical term, it means "injury",  but as a psychological term it means "psychological trauma" and "shock (which leaves permanent mental disability)”.  It is also calle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 Most of trauma occurs suddenly and causes severe pain to the person experiencing it in a shocking or frightening event. Trauma is often accompanied by clear visual images and is characterized by long-lasting memory. A person who lives with trauma can experience anxiety and extreme emotional unrest when he or she is in a similar situation or mental shock by recalling the memory of the accident. 
'Collective Trauma' refers to disasters that can cause large-scale PTSDs or affects countries, regions and the world. Collective trauma also destroys social norms, values, and semantic systems. This is why in collective trauma, the psychological consequences of traumatic events are shared by members of the community and spread through social relationships by social transmission, not limited to those who have experienced trauma firsthand. In collective trauma, traumatic events extend time and space to project from the past to the present and the future, and can affect other people or groups who are not direct victims. Trauma continues to conjure up the memories of the time, even though it's already an terminated event, and let people to avoid activities or places that remind them of the event.
The seriousness of the problem lies in the fact that it affects not only the parties but also their descendants. A psychologist, Choe Yun-Gyeong's paper, “Collective Trauma and the Healing of the Heart,"(The Journal of Sociology at the Korean Society for Social Studies, 2014) gives details of this phenomenon. The effects of trauma can be passed on to their descendants. In historical trauma, people can be vulnerable to negative psychological symptoms and consequences not because of direct trauma experience but because of their relationship with ancestors who have suffered trauma. Trauma also damages the primary socialization process in the family and make individuals who have not experienced trauma directly identify with the survivors of the distant past trauma. Residents of the island of Jeju, who have experienced 4.3, are suffering from personal and collective trauma. The journey of trauma is not over yet.

A collective trauma of survivors and the bereaved families
The trauma of the Jeju residents who encountered unprecedented historical event of 4.3 was extremely terrible. The survivors and the bereaved families had to live with the shadows cast from the memories of 4.3 in two generations. 4.3 also shook Jeju.  At that time, 10 percent of Jeju's population was massacred, causing massive casualties and physical damage. The formidable scorching operation has completely destroyed the Jeju community, and it forced the human and physical power relations of the Jeju community which had continued from the Japanese colonial rule to the emancipation to undergo extreme fluctuations. The social structure before 4.3 was reorganized as the periphery of an anti-communist state. The Jeju society, branded as Red Island from early on, had to experience an exhaustive complex to the peninsula people and collective trauma due to the reaction.
In particular, even after 1957, when the 4.3 was officially recorded to be over, we went through a period of external dictatorship of 18 years under the Park Chung-hee military dictatorship and 5 years of Chun Doo-hwan's reign. Since then, under the Roh Tae-woo and Kim Young-sam administrations, which emerged in June 1987 uprising, its attributes had been maintained as ever. In this long period of time, still 4.3 was dismissed as taboo territory. The June 1987 uprising allowed the people to vent their desire for democracy, even though limited, since then Jeju 4.3 began to remove the shroud of long-standing trauma and raise the voice, but it was more than a decade later that the social climate of the taboo broke down and the survivors and bereaved families began to testify about the truth of 4.3. That doesn't mean that Jeju society overcame collective trauma at this time. 
In retrospect, the collective trauma in Jeju has been going on for almost 50 years. When I was very young, the adults often told me "Don't speak carelessly" or "Keep silence". Those taboo phrases were the horrible ones to seal this collective trauma. The historical event 4.3 occurred at a certain time affected the values, ways of life, attitudes and even the use of language in Jeju local community. In particular, the persistence of fear maintained through the "linking system" during that long period has left a collective trauma of 4.3. It has been a terror for both of individuals and communities in the present progressive form to summon the memories as nightmare at any time.

4.3 Haewon-Sangsaeng Gut
4.3 Haewon-Sangsaeng Gut is a fusion project combining tradition and modernity to overcome Jeju's trauma of individuals and collectives. It's a kind of performance art that combines a spiritual healing ritual ceremony called "Haewon-Sangsaeng Gut" with contemporary art. The ongoing ecological trauma healing project has nearly 20 years of history. The origin of this ceremony was first tried in 1992 to mark the 10th anniversary of the excavation of Darangshi cave, which shook Jeju society by excavating the remains of 11 victims of 4.3. Here I introduce a part of position paper of this project which prepared by the present author.

"Why Haewon-Sangsaeng Gut? It is a search for the usefulness of art and at the same time a reflection on the futility of art. It is a strict monologue to tell the fact that art can't go upstream like a salmon and make the beautiful tune on the historical path where the human time from mythology down to the present, and is another struggle for despair. It is a prescription for a certain premonition that art will not heal the primitive human soul, its limitations. ... Haewon-Sangsaeng Gut does not serve only humans. It is a "ceremony of coexistence" and "ceremony of life" that heals not only the human soul, but also the natural space, which has been a damaged place by the massacre, in search of the tragic site of death. Therefore, the ceremony is a reminder that humans and nature should be cured at the same time, and is an offering the rehabilitation of the horrible dead land with a memory one does not want to remember, where now exists as a basement of the death. The ceremony is an offering to the dead and land of the dead through the modern culture, art and traditional performance. It is a Bonpuri and It is a The death, the 'Bonpuri' and Ddangpuri that releases the land desecrated from death, ... “

When I was developing 4.3 art movement, my serious problem was how to express "4.3 trauma" in art. It might be caused by the sense of shame and the pressure that I can not adopt the depth of 4.3 trauma to the modern art genre. It may have come out of frustration with the feeling that a single painting or a poem does not have any effect on the survivors who have already dried up tears. "A search for the usefulness of art and while also reflecting on the uselessness of art” is an expression of this situation. It was a question about how modern art can heal such an impossible historical trauma. In the first Haewon-Sangsaeng Gut, the bereaved families listened to the shaman's voice of "Bonpuri" and cried. The shaman at the dance was stabbed on the soles of her feet by pampas grass like bamboo spears and shed the blood. It might a kind of catharsis. Through the ceremony, the bereaved families of Darangshi cave met with their bereaved families who were victimized decades after leaving the miserable island.

A Haewon-Sangsaeng Gut was also held at the infamous Jeongbang Falls Massacre site. During 4.3, residents from all parts of the Southern Jeju area were brought here and slaughtered. It provided a chance to the bereaved families who came to see the ceremony to form the "Association of Bereaved Family of Jeongbang Falls", apart from the already existed local 4.3 Parcels Association. And the "Doryeong-maru" called the Haetae Garden for a long time restored the original name after the Haewon-Sangsaeng Gut. Most of the places where the Haewon-Sangsaeng Gut visited were the sites so-called "lost village" destroyed by genocide or scorched operations at the time of 4.3 and never recovered. Hwabuk-ri's "Gonheuldong" and "Donggwang-ri's Mudeungiwat" has gathered attention and became visiting points of dark tourism after the ceremony.
Some sites of the Haewon-Sangsaeng Gut were the places was abandoned since the genocide. The places where the residents who know its history never wanted to visit are so-called trauma sites. The terrible memory of the massacre turned the site into land of death. Haewon-Sangsaeng Gut is on an unfinished journey as a trauma-healing project that consigns the dead land and the dead and the survivors. There are more than 200 places left. There is no place on Jeju Island that is not a slaughter site, and there is no place where the memory of death has not been cast aside. The Peace Art, which began in Jeju 4.3, is a Mom-Gut for healing the 4.3 trauma that has been deeply thrown on the island, and is an art rite that invigorates the energy of life on the island again.

* ‘Haewon’ means Resolution of bitterness and grief. ‘Sangsaeng’ means mutual life-giving and life-saving. ‘Gut’ is the shaman cerem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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