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7) 대만 우다퀀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18년부터 세 나라 세 섬의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어 이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세 섬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로 국외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어 일어, 영어 번역 원고도 동시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섬의 아이들은 모국의 아이들과 체격이 다르다. 게다가 여성에게는 전족의 풍습이 있어, 섬 사람들을 위해 체육을 가르치는 필자는 하루빨리 각종 교과서를 편집하여 체육에 관한 책을 신속히 저술하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대만인들의 허약함을 강건하게 구제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 허펑리유(和風荔雨) , <한문대만일일신보>,메이지 41년(1908년) 6월 7일 6월 7일

국가의 기계에 대한 자성

일본어 '라디오체조'는 '수음기(收音機)체조'를 뜻하며, 중국어로는 '방송체조'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이 운동은 일본과 대만, 한국에서 일어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체조의 보급 범위가 확대되었고, 방송의 구령에 따르는 형식과 결합하여 군대나 학교기관에까지 그 적용 범위가 미쳤으며, 대만이나 기타 동아시아 지역의 역사과정에서 식민근대성을 반영하였다.

대만의 많은 사람들은 국민건강운동을 일상생활의 일부로 기억하고 있지만 그것이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라디오체조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실제로 20세기 초, 카와세 모토코로와 이구치 료세키는 스웨덴의 체조이론, 연습 및 관련 번역 등을 일본에 소개하였는데, 1916년 대만의 '체조과교수요목취조위원보고서(體操科教授要目取調委員報告書)'를 작성할 때 참고자료로 제공되었다. 특질인류학자들이 옹호하는 열대기후로 인한 '몸의 악화'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일본 식민지 당국은 대만 학생과 일본 학생 사이의 생리적 차이를 연구하여 현지 운동을 설계한 것이다.

사진=우다퀀. ⓒ제주의소리
타이페이 제2고등중학교(현재의 성공고등학교) 학생들이 일제시대에 매일 수업을 하기 전 운동장에서 라디오 체조를 하는 역사 사진. 사진=국립중앙도서관 대만 별관, 우다퀀. ⓒ제주의소리
사진=우다퀀. ⓒ제주의소리
'국제라디오체조'에서 대만 체조 모습. 사진=우다퀀. ⓒ제주의소리

‘섬에 사는 아이들의 체격은 모국과 다소 차이가 있다‘는 관점에서, 정부는 과학적 교정을 위한 자료를 제공하기로 합의하고, 실행에 옮겼다. 동시에 교육 과정을 통해 여성의 신체 참여를 보장하기도 했다. 1922년 신대만교육령이 공포된 이후 공립학교의 체조 조항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주요 변화는 교육 내용에 있었다. 기존 연습과 게임 외에 군사 훈련 코스가 실시되었다. 군사훈련은 '모국의 확장'이라고도 불리며, 신체 훈련을 통해 대만인들에게 군국주의적 식민주의를 주입하려 했던 일본 제국주의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또한 일본의 라디오 체조는 1928년 히로히토 천황 즉위의 '선물'로 미국이 일본에 도입하여 도쿄중앙방송국이 천황 즉위시를 계기로 방송을 시작하였다는 설도 있다. (라디오)방송은 근대국가의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이며, 식민지 대만에서는 일본 국내보다 앞서 1925년 6월 17일 시정30년대만박람회라는 이름으로 에스포국에서 10일간 연속으로 대만인을 대상으로 방송이 이루어졌다. 연구에 따르면 대만에서는 매일 방송하는 라디오 체조가 1930년 4월 1일 시작됐고(도쿄중앙방송국에서 체조를 처음 방송한 것은 1928년), 타이페이방송국(JFAK)에서는 매일 정오와 오후에 각각 10분씩 체조를 방송했다. 타이페이방송국은 이듬해 방송체제 정비를 마치고 아침과 오후에 라디오 체조를 방송했다. 이후 각 기관·학교·공장·청년단 등의 조직은 '라디오체조'라는 명목으로 연속적인 활동을 조직했고, 후에 일본을 모방해 전국적인 '라디오체조대회'를 출범시켰다.

이 집단체조는 여름휴가 중 열흘 연속 전국 각지에서 실시돼 참가 인원은 1933년 3만 명에서 1941년 493만 명으로 급증했다. 방송 매체와 결합된 체조는 이후 1930년대, 40년대에 전쟁이 확대되면서 식민지인 대만, 만주국, 말레이 제도 등으로 확산됐다. 서방 국가의 라디오 체조가 개인이나 가정에 압력을 가하는 것과 달리 일본 식민 정부는 사회통합을 상향식으로 실현하기 위한 라디오를 적극 찬양했다. 대만과 조선에서 대동아공영권을 선전하는 동력이었을 뿐 아니라 식민의 모국보다 한 단계 앞선 ‘황민(皇民)체조(미타미(みたみ)체조)’와 ‘황국신민(皇國臣民)체조’가 탄생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총동원을 적나라하게 구현했다.

사진=우다퀀. ⓒ제주의소리
'국제라디오체조'에서 일본 체조 모습. 사진=우다퀀. ⓒ제주의소리
사진=우다퀀. ⓒ제주의소리
'국제라디오체조'에서 한국 체조 모습. 사진=우다퀀. ⓒ제주의소리

두 가지 설의 진위가 어떻든 우리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라디오체조의 표층에 있던 ‘군국주의적’색채 때문에 방송이 정지됐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군국주의적 색채가 짙은 이 라디오 체조는 2차대전 종식과 함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배계급의 후계자는 이 시스템에 있어서의 국가 의지의 연속성과 신체적 규율을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대만은 물론, 한국, 일본에서도 이것을 개량하여, 국민의 체력 강화와 체질 개선의 명분으로, 교육이나 군사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아직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국제라디오체조'는 어떻게 재현됐나

동아시아에서 라디오체조는 짙은 식민지적 군사적 색채와 연관이 깊다. 과거의 동아시아 교육시스템에서 국가나 사회는 언제나 개인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고, 개인은 소집단의 영예를 쟁취해야 하며, 그 소집단은 큰 집단에 예속되고, 큰 집단은 서로 협조하도록 호령해야 한다. 다시 말해 체육교육의 커리큘럼은 개인의 신체에 대한 규율과 동시에 집단적 동일성을 배양한다. 대만의 예술가인 천칭야오는 왜 그것을 창작의 주제로 사용할까?

2011년부터 후쿠오카에 체류하면서 천칭야오는 국가집단주의의 개인의 신체에 대한 규범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직접 안무 작업을 해서 현대적 신버전의 라디오체조를 연출했다. 과거 대만, 한국, 일본은 식민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아티스트는 일본 후쿠오카, 대만 중정기념당, 한국 부산 해운대 등에서 세 나라의 다른 버전의 라디오체조를 촬영했다.
첸칭야오의 체조 영상 작품을 볼 때, 우리는 그의 의도가 개인이나 국가 권력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피부색과 인종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현대적이고 의미있는 건강체조를 만들어내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티스트의 간단한 강의 후, 참가자들은 둔한 몸놀림, 스윙샷, 적절하지 못한 몸짓, 몸에 맞지 않는 교복을 통하여 일종의 반사회적인 저항, 의도적 농담과 풍자의 의미를 보여준다. 이 예술가의 역사적 증거와 번역을 통해 우리는 동아시아 공통 경험의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다. 신체적 저항을 통해, 그들은 다른 종류의 비협조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그 의도는 국가적 인식에서 나온 신체에 대한 규율을 단절하려는 것이며, 역사적 지배로부터 벗어나 탈도구화하려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진정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은 ‘신체의 저항’과 ‘자유’라고 나는 믿는다. 어떤 시대든 우리 자신은 우리 몸의 주인이다. / 우다퀀 큐레이터

우다퀀(吳達坤, WU Darkeun)은 타이페이국립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타이페이예술대학 <관두미술관> 큐레이터, 대안공간 <VT ARTSALON> 디렉터, <타이페이국제예술촌> 디렉터 등을 역임했습니다. 현재 타이페이 소재 복합문화공간 <C-LAB(Taiwan Contemporary Culture Lab) 수석큐레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國際收音機體操》背後的意識形態和規訓

吳達坤

「夫島人之童蒙,其體格與母國人恆異,況女子殊有纏足之習,為島人體育教授書者,刻不容緩,故願各種教科書等編修後,速著述關於體育之冊,庶幾可以拯臺人之孱弱而為康強矣。」

〈和風荔雨〉,《漢文臺灣日日新報》,明治41年(1908年)6月7日

對於國家機器的反思

日文音譯「ラジオ体操」的「收音機體操」,中文又可譯為「廣播體操」。這項運動在臺灣與日本、韓國都有不少人們從事,而該體操流傳的範圍、結合廣播口令的操作形式,以及在軍隊或學校機關的應用領域,在在反映殖民現代性於臺灣甚至其他東亞地區的歷史進程。

在臺灣,多數人記憶中的「國民健康操」(國際收音機體操)是日常生活的一部分,卻少有人知道源頭是日本殖民時期引進的收音機體操。事實上,早在20世紀初川瀨元九郎、井口了夕便將瑞典式體操的理論、實踐及相關譯書引進日本,這也提供為1916年時臺灣編成「體操科教授要目取調委員報告書」的參考背景:為免於體質人類學家主張熱帶風土造成的「體質退化」威脅,日本殖民當局調查臺、日學生之生理差異並設計本地體操,作為科學矯治手段的教材議定、實踐並回應「島人之童蒙,其體格與母國人恆異」之觀點,同時透過教育保障女性的體能參與。1922年<新臺灣教育令>公布後,公學校體操的規定與先前沒有太大不同,主要的改變在於教學內容,除了原來的「體操、遊戲」之外,還增加了「教練」一項。「教練」即是兵式體操(軍事化操練),體操課的內容也因此「內地延長」,將軍國主義的殖民意識透過身體的規訓植入台灣人之中,作為皇民化教育的一部分。

另一個說法,日本的收音機體操是根據1928年作為裕仁天皇登基的「獻禮」而從美國引入日本,也是東京中央放送局從天皇即位時開播的節目。而廣播作為現代國家的傳播媒介,殖民地臺灣更早於日本國內,早在1925年6月17日便藉著「始政30年臺灣博覽會」之名於遞送局博覽會場連續十天對臺人播音。根據考據,臺灣每日播放的收音機體操要到1930年4月1日起(亦即晚於東京中央放送台初次播放體操的1928年),臺北放送局(代號JFAK)在每日中午及下午各播放十分鐘體操。隔年臺北放送局落成並完備廣播體制,固定於早、午播放收音機體操。隨後各級機關、學校、工廠、青年團等組織陸續以「收音機體操」的名義組織活動響應,後來還仿效日本發起全國性的「收音機體操大會」。這種集團體操每逢暑假,連續十天早晨在各地辦理,參與人數更從1933年的三萬人次迅速倍增至1941年的493萬人次。結合廣播媒介的體操後來隨著1930、40年代的戰爭擴張而傳播至殖民地臺灣、滿州國、馬來群島等地。相異於歐美國家的收音機體操以個人或家庭為訴求,日本殖民政府除了大力鼓吹收音機是由下而上體現社會一體化的配置。除了在臺灣與朝鮮宣傳「大東亞共榮圈」的動力,更衍生比殖民母國更進一步的「皇民體操」(みたみ體操)、「皇國臣民體操」,赤裸裸地體現了帝國主義意識形態的總體動員。

無論以上兩種說法何以為真,我們確知的是在1945年二戰結束後,收音機體操表面上因為其「軍國主義」的色彩被迫停止放送。但實際上這套充滿軍國主義色彩的「收音機體操」,並沒有隨著二戰的結束而完全消失。接替的各國統治階層深知這套系統對於國家意志的延續與身體的規訓展現,無論是在臺灣、韓國或是日本都將其改良,仍以強健國民體魄、體質改良之名,保留在教育、軍事體系中廣為流傳。

何以再現《國際收音機體操》?

在東亞,收音機體操是如此深具殖民軍事色彩的。在過去的東亞教育體系之中,國家、社會永遠高於個人,個人必須為小團體爭取榮譽,而小團體隸屬於大團體,在大團體裡必須聽號令、彼此協調。也就是說,從教育體育內課的設計反而呈現出同時規訓個人的身體,同時培養團體的一致性。而臺灣藝術家陳擎耀為何要以它作為創作題材?

自2011年在日本福岡駐村時,陳擎耀開始以反思這套國家集體主義對個人身體的規訓,透過編導式的安排親自演出詮釋出當代新版的「收音機體操」。因為臺灣、韓國和日本這三地過去都深受日本殖民主義的影響,藉著各種機會藝術家分別在日本福岡、臺灣中正紀念堂、韓國釜山海雲臺,拍攝三種國度不同版本的「收音機體操」。

我們可從觀看陳擎耀的體操錄像作品中體認他的意圖被並非對個人或者國家政權歌功頌德,而是藉由不同膚色、人種的加入作出具當代意義的「健康操」,裡面所有的入鏡者在藝術家短暫教學後的生疏肢體,揮舞擺動著落拍、不到位的身體姿態,試圖藉由不合身的制服、讓反社會成為一種身體的消極抵抗,甚至呈現出特意的戲謔與嘲諷意味。藝術家藉由對歷史的考據與轉譯,讓人反思屬於東亞共同經歷的歷史,藉著身體的抵抗展現出另類的不合作運動,在「似作非做、要做不做」的肢體之間,意圖切斷國家意識對於身體的規訓與對歷史宰制除魅儀式。

我相信,藝術家真實想表現的是「身體的抵抗」與「自由」。無論在哪個時代,我們自己才是身體的主人。 


「国際ラジオ体操」の背後にあるイデオロギーと統制

吳達坤

「島の子どもらは、その体格が母国の者と一定の差があり、まして女子には纏足の風習があり、島人のために体育を教授する筆者は、一刻も容れず、各種教科書を編集した後に、体育に関する本を速やかに著すことを願い、台人の虚弱さを強壮と為すべく救済できるよう切に望む。」
〈和風荔雨〉《漢文臺灣日日新報》 明治41年(1908年)6月7日

国家の装置たることへの自省

日本語でいう「ラジオ体操」は「収音機体操」のことで、中国語では「放送体操」とも訳せる。この運動は日本と台湾、韓国で起こり、少なからぬ人々が従事し、体操の普及範囲は広がり、放送の号令に従う形式と結びついて、軍隊や学校機関にまでその適用範囲が及び、台湾やその他の東アジア地域の歴史過程における植民の近代性を反映した。
台湾では、多くの人が国民健康体操(国際ラジオ体操)を日常生活の一部として記憶するが、その起源が日本植民地時代に導入されたラジオ体操だと知る人はほとんどいない。実際には、20世紀初頭に、川瀬元九郎と井口あくりがスウェーデン式体操の理論と実践及び関連する翻訳書を日本に紹介しており、これは1916年に台湾で「体操科教授の要目調査委員報告書」を作成する際の参考資料として提供された。つまり、形質人類学者が主張する熱帯の風土による「体質退化」の脅威を避けるため、日本の植民地当局は、台湾人学生と日本人学生の生理的差異を調査し合わせて当地用体操を設計し、「島の子どもらの体格は母国人と一定の差がある」という観点から、科学的矯正手段の教材を合意し、実践し、対応し、同時に教育を通して女性の身体的参画を保障した。1922年の「新台湾教育令」公布後、公立学校での体操の規定は以前と大きく変わらず、主な改変はその教育内容にあり、従来の「体操、遊戯」に加えて「教練」の一項が追加された。「教練」とは兵法体操(軍事訓練)で、体操の授業内容も「内地の延長」とされ、 軍国主義的な植民意識を身体的訓練を通じて台湾人に植えつけようとした、皇民化教育の一環だった。

また、日本のラジオ体操は、1928年の裕仁天皇即位の「贈り物」としてアメリカが日本に導入し、東京中央放送局が天皇即位時を契機に放送を開始したという説もある。(ラジオ)放送は近代国家におけるコミュニケーション・メディアであり、植民地台湾では日本国内より早く、1925年6月17日、「始政30年台湾博覧会」という逓送局博覧会場で、連続10日間、台湾人向けに放送が行われた。研究によると、台湾では毎日放送するラジオ体操が1930年4月1日に開始され(東京中央放送局で体操を初めて放送したのは1928年)、台北放送局(JFAK)では毎日正午と午後にそれぞれ10分ずつ体操を放送したという。台北放送局は、翌年に放送体制の整備を終了して、朝と午後にラジオ体操を放送するようになった。以後、各機関・学校・工場・青年団などの組織は「ラジオ体操」という名目で連続的な活動を組織し、のちに日本を模倣して全国的な「ラジオ体操大会」を発足した。

この集団体操は、夏休み中に10日間連続して全国各地で行われ、参加人員は1933年の3万人から、1941年には493万人に急増した。放送メディアと結びついた体操は、その後、1930年代、40年代の戦争拡大に伴い、植民地の台湾、満州国、マレー諸島などに広がった。欧米諸国のラジオ体操が個人や家庭に働きかけるものであるのと違って、日本植民政府は、社会統合をボトムアップで実現するためのラジオを積極的に称揚した。台湾と朝鮮で「大東亜共栄圏」を宣伝する動力であるだけでなく、植民の母国より一歩進んだ「みたみ体操」と「皇国臣民体操」が誕生し、帝国主義イデオロギーの総動員を赤裸々に体現した。

両説の真偽がどうであっても、私たちは、1945年に第2次世界大戦が終結後、ラジオ体操の表層にあった軍国主義的色彩のために放送が停止されたことを知っている。しかし、軍国主義的色彩の濃いこの「ラジオ体操」は第2次大戦の終焉とともに完全に消えたわけではない。支配階級の後継者は、このシステムにおける国家意志の継続性と身体的規律をよく認識しているため、台湾はもちろん、韓国、日本でもこれを改良して、国民の体格体力の強化と、体質改善の名のもとに、教育や軍事システムを維持するため、いまだに広く用いられている。

「国際ラジオ体操」をどう再生産するか 東アジアにおいて、ラジオ体操と深く植民知的軍事的色彩はつながりが深い。過去の東アジアの教育システムにおいて、国家や社会は永遠に個人より高位にあり、個人は小集団の栄誉を勝ち取らねばならず、その小集団は大集団に隷属し、大集団は互いに号令され協調される。換言すると、体育教育のカリキュラムは、個人の身体への規律と同時に、集団的同一性を培養する。台湾の芸術家である陳擎耀は、なぜそれを創作の主題として用いるのだろうか。

2011年から福岡に滞在して以来、陳は、国家集団主義による個人の身体への規範について考えるようになり、振り付けのアレンジを自ら行って、現代的な新ヴァージョンの「ラジオ体操」を解釈した。台湾、韓国、日本は、過去に植民地主義の影響を受けたことから、アーティストたちは福岡や、台湾の中正紀念堂で、韓国の釜山海雲台といったさまざまな場所で、3つの異なるバージョンの「ラジオ体操」を撮影した。
陳擎耀の体操映像の作品を見ると、彼の意図は、個人や国家権力を称賛することではなく、さまざまな肌の色や人種を参加させて現代的な意義のある「健康体操」を作り出すことにあり、(映像の中で)アーティストの簡単なレクチャーの後、参加者は、鈍い動き、スイングダウンショット、適切でない身振り、身体に合わない制服を着ようとするなどして、社会に反対する一種の身体的消極的な抵抗、意図的なジョークや風刺の意味を示す。
芸術家は、歴史的な証拠と翻訳を用いて、東アジアに共通する経験の歴史を振り返ることができ、身体的抵抗を介したアルタナティヴな非協調的な動きを示す意図は、身体の間で、身体の規律と歴史的支配に対する国家意識から身体の統制を切断するという破壊の儀式だ。
芸術家たちが真に表現したいのは、「身体の抵抗」と「自由」であり、私たち自身が、自己の身体の主人なのだ。


The Ideology and discipline behind “International Radio Gymnastics”

Wu Darkuen

"The Islanders’children are physically different from those of their motherland. Moreover,women physical education at the islanders, has a habit of foot binding, and is therefore anxious to compile and edit all kinds of textbooks and other materials, so that can quickly write a book on physical education, and perhaps save the weak and healthy of the Taiwanese."

"He Feng Li Yu", "Chinese Taiwan Daily News", Meiji 41 (1908) June 7

Rethinking the State Apparatus
"Radio Gymnastics", which is transliterated "Japanese Gymnastics" in Japanese, and "Radio Gymnastics" in Mandarin. There are many people engaged in this sport in Taiwan, Japan, and South Korea. The scope of the gymnastics, the operation mode combined with broadcast command, and the application fields in the military or school institutions reflect the colonial modernity in Taiwan and even other History of East Asia.
In Taiwan, the "National Health Exercise" (International Radio Gymnastics) that most people remember is part of daily life, but few people know that the source is the radio gymnastics introduced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fact, as early as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Kawase Kuro and Iguchi introduced the theory, practice, and related translations of Swedish gymnastics to Japan. This also provided the report of the "Gymnastics Professor's Report to the Commissioner," which was compiled by Taiwan in 1916. Reference background of the book: In order to avoid physical anthropologists ’claims of the“physical degradation ”caused by tropical territories, the Japanese colonial authorities investigated the physiological differences between Japanese students and Japanese students and designed local gymnastics. Responding to the view that "the islander's childhood is physically different from that of the motherland", and at the same time, women's physical participation is guaranteed through education. After the publication of the New Taiwan Education Order in 1922, the rules for gymnastics in public schools were not much different from the previous ones. The main change was in the content of teaching. In addition to the original "gymnastics and games," a "coach" was added. The "coach" is military gymnastics (military training), and the content of the gymnastics class is "extended from Japan Mainland." The colonial consciousness of militarism is implanted into the Taiwanese through physical discipline, as part of the education of imperialization. 

In other words, Japan ’s radio gymnastics was introduced from the United States in 1928 as a “dedication”to Emperor Hirohito ’s ascension to the throne, and it was also a program broadcast by the Tokyo Central Broadcasting Bureau from the emperor ’s throne. As a medium for modern nations, broadcasting was earlier in Taiwan than in Japan. As early as June 17, 1925, under the name of "Taiwan Expo in 30 Years of Administration", it was broadcast to Taiwanese people for ten days in a row at the Expo Bureau.  According to textual research, the daily radio gymnastics broadcast in Taiwan will start on April 1, 1930 (that is, later than the Tokyo Central Broadcasting Station's first broadcast of the gymnastics in 1928). The Taipei Broadcasting Bureau (code JFAK) will be at noon and afternoon each day. Play ten minutes of gymnastics. The Taipei Broadcasting Bureau was completed the following year and has a complete broadcasting system. Subsequently, organizations at all levels, schools, factories, youth groups and other organizations successively organized activities in the name of "radio gymnastics", and later imitated Japan to launch a national "radio gymnastics conference." This group gymnastics is handled in various places every morning for ten consecutive days during the summer vacation, and the number of participants has rapidly doubled from 30,000 times in 1933 to 4.93 million times in 1941. Gymnastics combined with broadcasting media spread to colonial Taiwan, Manchuria, and the Malay Islands with the expansion of the war in the 1930s and 1940s. Different from the European and American countries, the gymnastics demands individual or family. In addition to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s vigorous promotion of the radio, it is a bottom-up configuration that reflects social integration. In addition to promoting the "Greater East Asian Co-Prosperity Circle" in Taiwan and Korea, it also gave birth to "Royal Gymnastics" (Gong Gymnastics) and "Royal Gymnastics", have given rise to the general mobilization of imperial ideology.
Whatever the above two statements are true, what we do know is that after the end of World War II in 1945, radio gymnastics were forced to stop broadcasting because of their "militarist" color. But in fact, this set of "radio gymnastics" full of militarism did not completely disappear with the end of World War II. The ruling classes of the succeeding countries are well aware of the continuity of the nation ’s will and the physical display of this system. Whether it is in Taiwan, South Korea, or Japan, it has been improved. It is still in the name of strong national health and physical fitness and is retained in education. It is widely spread in the military system.

How to reproduce "International Radio Gymnastics"?
In East Asia, radio gymnastics is so colonial. In the past East Asian education system, the state and society were always higher than individuals. Individuals must strive for honor for small groups, and small groups belong to large groups. In large groups, orders must be heard and coordinated with each other. In other words, the design of the internal education and physical education curriculum instead shows the discipline of the individual's body at the same time, while fostering the consistency of the group. And Why would CHEN Ching-Yao, a Taiwanese artist, use it as a subject of creativity?
Since being stationed in Fukuoka, Japan in 2011, CHEN Ching-Yao has begun to reflect on this set of national collectivist disciplines on personal bodies, and personally interpreted a new version of "radio gymnastics" through a choreographic arrangement. Because Taiwan, South Korea, and Japan were all deeply influenced by Japanese colonialism in the past, the artist took various opportunities to shoot three different versions of "radio gymnastics" in Fukuoka, Japan, the Chiang Kai-shek Memorial Hall in Taiwan, and Haeundae in Busan, South Korea.
We can realize from watching CHEN Ching-Yao ’s gymnastic videos that his intention is not to sing praises to individuals or state power, but to make a contemporary “health exercise”by adding different skin colors and races. The entrant's unfamiliar body after the artist's brief teaching, swinging down-shots, inadequate body postures, trying to make anti-society a negative resistance of the body through unfitting uniforms, and even showing deliberate jokes and satire. . The artist's evidence and translation of history allow people to reflect on the history that belongs to East Asia's common experience. Through physical resistance, they show another kind of uncooperative movement, between the limbs that "do not do, do not do", The intention is to sever the discipline of the body from the national consciousness and the de-enchantment ritual of historical domination.

I believe that what the artist really wants to express is "body resistance" and "freedom." No matter at what era, we ourselves are the masters of our b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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