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64. 서울 가려 하면 눈썹 하나도 무겁다

* 가젠 호민 = 가려 하면
* 벤다 = 무겁다 (기본형 : 베다)

제주 사람들 마음속에 샘솟는 따뜻한 인정이 흐르는 말이다. 게다가 넉넉한 정을 실제보다 훨씬 부풀려 실감이 나게 했다. 터무니없는 게 아니라 과장할 만도하다.

서울이 어디인가.

더욱이 맨 남쪽에 외떨어진 섬, 제주도에서 서울이 어디인가. 예로부터 ‘한양 천리’라 했지만 그것은 육지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는 말이다. 그 한양 천릿길은 제주에서 만 리길도 더 한 것이 아닌가.
  
배 타고 험한 파도와 싸우며 육지에 닿으면 그때부터 그 멀고 먼 길을 걸어야 다다를 수 있는 곳이 수도 서울 땅이다. 그도 맨 몸인가. 오랜만에 서울 간다고 나서면서, 더군다나 제주 인심에 빈손으로 갈 수 있는가. 보리쌀 좁쌀이며 말린 생선 몇 마리, 미역이며 우뭇가사리 묶음도 챙겨 짊어져야 한다. 그게 세상이 인정하는 제주 사람의 인심이요 제주 사람의 인정이다.
  
바리바리 등에 지었으니 안 그래도 뱃길에 시달린 몸 한 걸음이 천근만근일 터다. 그러니 ‘눈썹 하나마저 무겁다’ 한 것이다. 고달프기 짝이 없지만 이왕 지고 나선 길인데 어찌하랴.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거 너무 싸들었구나. 조금만 덜고 왔으면 좋았을 것을 한다.’ 그런 심사를 ‘아이고 눈썹 하나도 무거운데’라 해 보는 투덜거림, 곧 푸념이다. 

제주 사람들에게 서울 나들이는 꿈에나 하는 것이었을 테다. 형편이 된다 해도 바다를 건너는 고통을 견뎌내야 했고, 이것저것 싸들고 가야 하니 먹고 살기 힘든 사람으로선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러면서 ‘눈썹 운운’ 넋두리를 하는 것이 정 많은 제주 사람의 민낯이란 생각이 든다. 눈썹이 무거우면 그게 얼마나 무거우랴. 이런 과장이 오히려 때 묻지 않은 성정을 그대로 드러낸 게 아닌가 싶다.

설명절 연휴를 앞두고 귀성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제주국제공항에서 한 노인이 반가움에 손주의 볼에 입을 맞추고 있다. ⓒ제주의소리
지난 2018년 설명절 연휴를 앞두고 귀성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제주국제공항에서 한 노인이 반가움에 손주의 볼에 입을 맞추고 있다. ⓒ제주의소리

남을 동정하고 타인의 어려운 사정에 연민하는 인정은 가장 제주적인 인간됨의 표상이 아닌가. 

그게 옛날에 그치지 않았다. 지금도 버스 터미널에 가보면, 시골에서 제주시에 사는 자식 집을 찾아오는 노파들을 쉬이 만날 수 있다. 구부정한 등에 잔뜩 지고 있는 먹을거리, 등에만 진 게 아니라 두 손에까지 들고 있다. 무거울 텐데도 걸음이 재다. 단 몇 분이라도 일찍 도착해야 그리운 자식을 볼 게 아닌가. 

한쪽에선 마중 나온 자식이 있어 웃으며 반기는데, 이쪽은 자식들이 맞벌이를 하나 보다. 혼자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보기에 안쓰럽다. 하지만 조금씩 멀어져 가는 노파의 뒷모습이 밝아 보인다.

세상이 놀라울 정도로 변했다. 요즘에 등짐지고 서울 가는 사람이 없다, 여객선도 타겠지만 웬만하면 비행기를 탄다. 공항에 가족이 차를 가지고 마중 나온다. 격세지감을 누르지 못한다.

‘이제는 서울 가젱 호민 눈썹 호나도 벤다’고 말할 일이 없다. 하지만 궁핍으로 쪼들리던 옛 시절도 돌이켜보며 살아야 한다. 그 속에 사람이 살아야 하는 이유, 놓쳐선 안될 인생의 진리가 깃들어 있음에랴.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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