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9) 토미야마 카즈미 문화평론가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18년부터 세 나라 세 섬의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어 이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세 섬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로 국외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어 일어, 영어 번역 원고도 동시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섬사람과 일본군

COVID-19. 지금 전지구적인 규모로, 전인류가 죽음의 바로 옆에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런 일이 있었을까. 우리는 분명히 엄청난 사망자를 낸 제2차 세계대전을 알고 있지만, 바이러스의 확산력은 전선의 확장 등에 비할 수 없는 공포다. 우리는 저승사자의 눈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자의 동굴에 몸을 숨기지 않을 수 없다. 저승사자들의 포식이 지나갈 때까지. 

오키나와 섬에서 전투가 역병처럼 만연한 봄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제2차 세계대전 마지막 국면인 1945년 3월말, 미국은 일본제국으로 진입하는 길을 열기 위해 오키나와 침공을 실행, 주변 낙도부터 점령해서 4월 1일에는 일본군이 근거지를 둔 오키나와에 상륙했다. 섬사람들은 미군이 민간인을 잡아 학살하고 여성을 유린당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군이 침공한 중국대륙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해 온 일이다. 패닉에 빠진 섬사람은 공동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서로 죽이는 지옥 같은 일을 벌였다. 일본군이 준 수류탄을 사용해 집단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섬사람들도 있었다. 일본군의 작전은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민간인을 방패로 해서라도 오키나와 전투를 가능한 한 길게 연장하는 것이었다. 오키나와 주민의 목숨 따위는 애당초 지킬 생각이 없었던 일본군에게 섬사람들은 충성을 다했다. 2020년인 지금도 그렇듯이, 오키나와는 일본의 안전을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었는데.

그 66년 전 같은 4월까지 오키나와는 류큐왕을 모시는 한 나라였다. 류큐가 '오키나와현'으로서 일본에 병합된 것은 1879년이다. 이 병합은 수년에 걸쳐 행해졌으며 그 사이에는 일본의 침략을 거부하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청나라의 구원을 바랐지만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그 희망은 꺾이고 말았다. 그 뒤 일본의 황태자보다 류큐의 왕이 미남이라고 자랑하던 과거의 섬사람들이 제국 일본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황민이 되기까지 66년도 걸리지 않았다.

결국 섬사람들에 닥친 일들은 경애하는 황군(우군)이 악화되는 전황 하에서 섬사람들에게 자행한 잔인무도한 일들이다. 섬사람들의 식량을 빼앗아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동굴로 피신한 섬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몰고, 아기가 울면 적에게 알려진다며 살해하라고 명령하고, 섬사람을 간첩으로 몰아 히스테릭하게 참살하기도 했다. 일본군의 열악함은 전후에야 일본군의 행동조사를 위해 섬에 온 일본정부 관리들로 하여금 ‘이것이 황군의 영락한 몰골이냐’고 말하게 할 정도였다.

1945년 5월 말 오키나와 남쪽 끝으로 도망쳐 낙오됐던 사령관 우시지마는 약 3주 뒤 현재의 이토만 시 마부니에서 자살했다. 일본군에게 매달리듯 남하한 섬사람은 미군의 맹공격을 받아 그 시체가 온통 초토를 덮었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섬사람의 피로 바다는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1944년 당시의 오키나와 인구는 59만명, 오키나와전에서의 민간인 사망자는 9만 4천명에 달한다. 오키나와전의 전 사망자는 일·미 양군을 포함해 20만명 이상. 이 정도의 생명이, 단 3개월 사이에 없어졌다. 이 얼마나 처참한 역사의 상처인가.

오키나와와 제주, 마부니에서의 만남

지금 이 마부니 일대는 평화기념공원으로 정비되어 평화기념자료관과 전몰자의 이름을 새긴 기념비 '평화의 초석'이 세워져있다. 우시지마의 사망일인 6월 23일에는 일·미 양국 정부의 요인도 참가해 오키나와현 주최의 전몰자 추도식이 거행된다. 제주4.3평화기념공원은 오키나와의 평화기념공원을 참고해서 만들어졌다고 들었지만 예술적 접근은 4.3이 훨씬 훌륭하다. 오키나와에서는 진혼과 치유의 예술력이 크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 실상에 대한 하나의 도전으로서 오키나와의 위령의 달인 6월에 공원이나 자료관 내에서 미술전 등을 전개하는 평화미술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 2015년이다. 필자는 그 프로젝트에 2019년까지 이어진 인연으로 이전 칼럼에서 쓴 대로 2018년 제주의 4.3예술과 만났다.

제주를 떠나 마부니에 모습을 드러낸 작품들은 평화기념자료관 전시실 한 모퉁이에서 고요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다섯 작가는 각기 다른 양식으로 비명에 간 제주 사람들에 대한 애절함과 진혼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는데, 그 중 유독 이채롭게 다가온 것은 박경훈의 목판화 '정명-두무인명상도면(正名-頭無人瞑想図面)'이었다. 한지의 가로 지폭에 가득 찬 10명의 사람들은 머리가 잘려있었고, 노출된 목의 단면은 선명한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그 붉은 색은 가운데에 있는 여인이 손에 쥔 동백의 붉은 색과 호응하며 그 뒤에 날개를 접고 있는 까마귀의 검은 실루엣과 함께 참사를 은유하며 관람자의 눈을 찌른다. 이들은 그곳 마부니에서 미일 양국의 군인들에 의해 피살된 오키나와 사람들의 피냄새를 알아채고 튀어 나와 오키나와전 사망자들을 소환하고 있는 듯했다.

박경훈의 작품 '정명-두무인명상도 (正名_頭無人冥想圖)', 목판화, 1860x1000mm, 2018. 70년의 4.3은 반쪽짜리 4.3으로 이름도 얻지 못한 채 부끄러운 70주년을 맞고 있다. 작품명을 ‘정명-두무인명상도(正名_頭無人冥想圖)’라 붙인 이유는 이러한 70주년을 맞는 부끄러움과 씁쓸함을 고백하고 싶었음이리라. 4.3 70주년을 맞으면서 정명되지 못한 오늘을 바라보는, 얼굴을 빼앗기고 역사에서 배제된 주인공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다. 여전히 숫자 4.3으로만 남은 제주4.3, 사태, 사건, 항쟁, 학살. 영문으로도 Uprising, Rebellion, Massacre 등 여전히 어느 하나로 번역이 안 되는 “4.3”. 4.3의 성격과 본질을 보여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하는 현실은 여전히 아물지 못하는 상처로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4.3 70주년은 동아시아 냉전의 초입, 해방조국으로 해맑은 웃음을 띄며 돌아와 밝은 미래를 꿈꾸었던 젊디 젊은이들의 얼굴을 찾아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박경훈의 작품 '정명-두무인명상도 (正名_頭無人冥想圖)', 목판화, 1860x1000mm, 2018. ⓒ제주의소리

1962년생인 박경훈은 물론 4.3의 학살을 겪지는 않았지만, 4.3이 섬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새겨놓은 깊은 상처 속에서 성장하여, 1980년대 이후 성난 파도와 같은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후, 국가폭력에 유린당한 고향 섬사람들의 목소리 없는 목소리를 작품에 새겼다. 그는 해방공간의 희망을 절망으로 바꾼 학살의 트라우마가 사과만으로 치유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4.3을 단순한 비극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분단 반대를 표명한 제주 민중의 정의(正義)로운 항쟁으로 정의(定義)하고, 나아가 현재도 계속되는 ‘분단’의 책임을 따지는 것. 그것이 죽은 사람들의 명예회복이고, 그래야 이 사망자들은 머리를 되찾는 것이라고.

평안하지 못한 망자를 위하여

문화평론가 토미야마 카즈미.

그렇다면 오키나와전 사망자들의 명예회복이란 무엇일까. 섬사람들은 75년 전 비극 이후 국가의 전쟁기계가 된 것을 진심으로 뉘우쳤다. 그러나 전후 이 섬에 부여된 것은 미일 안전보장조약의 요석(要石, Key-stone)으로서 미군에 광대한 군사기지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할이다. 일찍이 이 섬에서 장렬한 사투를 벌여 섬사람을 살육한 미일은, 지금 동맹국이 되어 이 섬에 군사 기지를 유지하고, 한층 더 확장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75년 전과 다름없이 오키나와는 전쟁기계 역할을 맡고 있다. 이 현실에 마부니의 죽은자들은 과연 편히 잠들 수 있는 것일까?

피와 살의 질곡을 탈취한 근대적 공간에 정비된 마부니이지만 공원을 벗어나 자연 그대로의 잡목림과 해안을 거닐면 으레 불어닥치는 바람 속에 죽은 이들의 원성을 들을 때가 있다. 박경훈의 작품은 죽은 이의 말하자면 영매가 되어 4.3과 오키나와전의 망자들을 이어준 것이다. 그것은 예술이 할 수 있는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토미야마 카즈미(豊見山和美 TOMIYAMA Kazumi) 씨는 도쿄 소재 추오대학교와 류큐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영국 런던대학교 아카이브연구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오키나와현립공문서관의 아키비스트로 일하면서, 오키나와 전후사를 중심으로 문화평론을 하고 있습니다.

荒ぶる死者たちの召喚                        

豊見山和美

1945年 沖縄戦における島人と日本軍

COVID-19。いま、地球規模で、全人類が死のすぐ傍らにいることを感じている。こんなことがかってあっただろうか。確かに我々は夥しい死者を出した第二次世界大戦を知っているが、ウィルスの拡散力は戦線の伸長などとは比べようのない恐怖だ。私たちは死神のまなざしから逃れるようとそれぞれの巣穴に身を潜めざるを得ない。死神たちが飽食して行き過ぎるまで。

沖縄島で、戦闘が疫病のように蔓延した春があったことを思い出す。第二次世界大戦最終局面の1945年3月末、アメリカは日本帝国に引導を渡すために沖縄侵攻を実行、周辺離島から占領して4月1日には日本軍が本拠を構える沖縄島へ上陸した。島人は、米軍は民間人を捕らえて虐殺し女性は蹂躙されると教えられていた。それは日本軍が侵攻した中国大陸をはじめさまざまな場所で行ってきたことだ。パニックに陥った島人は、せめて共同体の手で命を絶とうと考え、互いに殺し合う地獄絵が現出した。日本軍が与えた手りゅう弾を使って集団で死ぬことを選んだ島人たちもいた。日本軍の作戦は、日本本土を防衛するため、民間人を盾にしてでも沖縄での戦闘をできる限り長く引き伸ばすというものだった。沖縄住民の命などはなから守る気のなかった日本軍に、島人は忠誠を尽くした。沖縄は―2020年の今もそうであるように―日本の安全のための捨て石でしかなかったというのに。

その66年前の同じ4月まで、沖縄は琉球王を戴くひとつの国だった。琉球が「沖縄県」として日本に併合されたのは1879年である。この併合は数年かけて行われ、その間には日本の侵略を拒否して命がけで闘う人々も多くいた。彼らは清の救援を願ったが、日清戦争における日本の勝利はその希望を打ち砕いた。その後、日本の皇太子より琉球の王様の方が美男だと誇っていたかつての島人が、帝国日本のために死をも恐れぬ皇民に変わるまで66年も要しなかった。

その果てに島人がみたものは、敬愛する皇軍:友軍が、悪化する戦況下で島人になした非道の数々だ。島人の食料を奪い、洞窟に避難した島人を自らの安全のために戦火の下へ追い出し、赤子が泣くと敵に知られると言って殺害を命じ、島人をスパイ視してヒステリックに惨殺することもあった。日本軍の劣悪さは、戦後になって日本兵の行動調査のため来島した日本政府の役人をして「これが皇軍の成れの果てか」と言わしめたほどのものだった。

1945年5月末、沖縄島の南端へ逃げ落ちた司令官の牛島は、その約3週間後、現在の糸満市摩文仁で自殺した。日本軍に追いすがるように南下した島人は、米軍の猛攻撃を受け、その死体が一面の焦土を覆った。断崖から飛び降りた島人の血で海は赤く染まったという。1944年当時の沖縄の人口は59万人、沖縄戦での民間人死亡者は9万4千人とされる。沖縄戦の全死亡者は日米両軍含めて20万人以上。これだけの命が、たった3か月の間に失われた。なんという凄惨な歴史の傷であろうか。

沖縄と済州 摩文仁での出会い

いま、この摩文仁一帯は平和祈念公園として整備され、平和祈念資料館や、戦没者の名を刻んだモニュメント「平和の礎」が建つ。牛島の死亡日とされる6月23日には日米両政府の要人も参列して沖縄県主催の戦没者追悼式典が行われる。済州4.3平和記念公園は沖縄の平和祈念公園を参考にして作られたと聞くが、芸術的なアプローチという面では4.3がはるかに素晴らしい。沖縄では、鎮魂と癒しにおける芸術の力があまり評価されていないのだ。その実情に対するひとつのチャレンジとして、沖縄の慰霊の月である6月に、公園や資料館内で美術展などを展開する平和美術プロジェクトが始まったのが2015年のことだ。筆者はそのプロジェクトに2019年まで関った縁で、以前のコラムで書いたとおり2018年の済州の4.3芸術との出会いに導かれたのである。

済州を離れて摩文仁に姿を現した作品群は、平和祈念資料館展示室の一角で静謐な熱気を漲らせていた。5人の作家はそれぞれの様式で、非業の死を遂げた済州の人々への哀切と鎮魂の思いを表現し、中でもひときわ異彩を放ったのが朴京勳の木版画「正名 - 頭無人瞑想図面」だった。韓紙の横長の紙幅いっぱいに居並ぶ10人の人々は頭を切り落とされ、露出した首の断面は禍々しい赤に彩られている。その赤は、中央の女性が手にした椿の赤と呼応し、その背後に翼を休める大鴉の黒いシルエットとともに惨事の隠喩として見る者の眼に突き刺さる。この死者たちは、摩文仁のこの場所で日米両軍に殺された沖縄の人々の血の匂いを嗅ぎ取って蠢き出し、沖縄戦の死者たちを召喚しているかのようだった。

1962年生まれの朴は、もちろん4.3の虐殺時を体験してはいないが、4.3が島人の心身に刻み付けた深い傷の傍らで成長し、1980年代の怒涛の民主化運動に挺身した後、国家暴力に蹂躙された故郷の島人の声なき声を作品に刻みつけるようになった。彼は、解放空間の希望を絶望へと変えた虐殺のトラウマが、「謝罪」だけで癒されるものではないと言う。4.3を単なる悲劇に閉じ込めるのでなく、朝鮮分断反対を表明した済州民衆の正義の抗争としてそれを定義し、さらには現在も継続する「分断」の責任を問いただすこと。それが死者たちの名誉回復であり、その時にこれらの死者は「頭」を取り戻すのだと。

安らげぬ死者のために

では、沖縄戦の死者たちの名誉回復とは何だろうか。島人は75年前の悲劇の後、国家の戦争機械となったことを心から悔いた。しかし、戦後この島に与えられたのは、日米安全保障条約の要石として、米軍に広大な軍事基地と労働力を提供する役割である。かつてこの島で壮絶な死闘を繰り広げて島人を殺戮した日米は、いま同盟国となってこの島に軍事基地を維持し、さらに拡張を企てる。75年前と変わらず、沖縄は戦争機械の役割を負わされている。この現実に、摩文仁の死者たちは果たして安らかに眠れるというのだろうか?

血と肉の穢れを脱臭した近代的な空間に整備された摩文仁だが、公園を外れて自然のままの雑木林や海岸を歩くと、常に吹きすさぶ風の中に、死者たちの怨嗟の声を聴く思いのすることがある。朴の作品は、死者たちのいわば依り代となって、4.3と沖縄戦の死者たちを繋いだのだ。それは芸術がなしうる奇跡と言ってよいのかもしれない。


召喚憤怒的死者

豐見山和美

1945年沖繩戰役中的島民和日軍
COVID-19,從全球爆發的規模來看,可以感受到全人類正處在死亡的邊緣。怎麼會有這種事情發生呢?雖然我們知道第二次世界大戰導致了無數人死亡,但病毒的擴散能力的恐怖與戰戰爭前線的擴張無法比擬。人們別無選擇,必須躲在每個洞穴中,以逃避死神的目光。直到死神厭食而遠離。

這讓人想起了在沖繩島戰鬥如同疫病般蔓延的春天。第二次世界大戰的最後一刻,即1945年3月末,美國為了從日本帝國移交而侵略沖繩,並從周邊孤島佔領,並於4月1日登陸日軍的根據地沖繩島。島民被告知美軍將俘虜並殺害平民,並將踐踏婦女。那就是日軍入侵中國大陸在內的很多地方所做過的事。陷入驚慌失措的島民們決定至少將自己的生命終結在自己人手裡。一幅互相殘殺的地獄照片顯現,一些島民用日軍給予的手榴彈集體。日軍的作戰策略是爲了防衛日本本土,即使把平民當作盾牌,也要儘可能地延長在沖繩的戰鬥。對於根本不想保護沖繩居民性命的日本軍隊,沖繩人盡忠捨身。就像2020年的今天一樣,沖繩只是爲了日本安全捨棄的"白子"而已。

直到66年前的同年4月,沖繩依舊是琉球國王統治的一個國家。琉球在1879年被日本併吞爲"沖繩縣"。吞併過程耗時數年,在此期間,許多人為反對日本統治而冒著生命危險戰鬥。他們曾希望向清朝政府求援,但是日本在日清戰爭中的勝利使這些希望破滅了。從此以後,比起日本皇太子,以琉球皇帝是美男自居的過去島民們爲了帝國日本,成爲不怕死的皇民,也無需過66年。

最終,島民看到了敬愛的皇軍:在戰況惡化的情況下對島民的不道德行為。他們搶奪島民的食物,爲了自己的安全驅逐逃到洞穴中的島民們到砲火下,命令他們說嬰兒哭泣,就以”被敵人發現"爲由殺害,還歇斯底里將島民視爲間諜,殘忍地屠殺。日軍的惡劣程度甚至達到了令戰後調查日本士兵的行動而來到的日本政府官員感嘆說:「這難道是皇軍的終結?」。

1945年5月底,逃往沖繩島南端的牛島司令在三週後在現在的系滿市摩文仁自殺。被日軍追趕逼迫而南下的島民們遭到美軍的猛烈攻擊,屍體被覆蓋了一片焦土。據說,從懸崖上跳下來的島民們的鮮血染紅了大海。1944年當時沖繩人口爲59萬名,沖繩戰中的民間死亡者爲9萬4千名。包括美日兩軍在內,沖繩戰死亡人數超過20萬人。生命在短短三個月內喪生,這是多麼悽慘的歷史傷痛?

沖繩和濟州在摩文仁的相遇

目前,摩文仁一帶已被改造成和平祈願公園,建設為和平祈願資料館和刻有陣亡者名字的紀念碑公園。被譽爲"牛島死亡日"的6月23日,美日兩國政府要員也將一同參加由沖繩縣主辦的戰死者追悼儀式。我聽說濟州4.3和平紀念公園是參考沖繩和平祈願公園而建造的,但從藝術角度來看,4.3紀念公園更爲優秀。在沖繩,人們對於藝術在安魂和治癒方面的力量並未給予很高評價。在沖繩慰靈之月—6月,在公園和資料館內舉行美術展的和平藝術項目始於2015年。筆者一直參與該項目直到2019年,正如之前專欄中所寫,筆者2018年與濟州4.3藝術相遇,結下不解之緣。

離開濟州,出現在摩文仁的那組作品在和平祈願館展示室的一角,充滿了平靜的能量。5位藝術家以各自的方式,表達了對濟州垂死生命的的悲切和撫慰的心情。其中,最傑出的是樸京勳的木版畫《正名-頭無人冥想圖》。排滿韓紙寬度的十個人被砍下了頭顱,露出脖子的橫斷面被詭異鮮紅的紅色裝飾,與中央女性手持的山茶花相呼應,背後的烏鴉在黑色石塚上休憩,就像是慘案的安息隱喻。這些死者似乎是在摩文仁的這個地方聞到了被美日兩國軍隊殺害的沖繩人的血腥味,在蠢蠢欲動地搜尋沖繩戰死者。

1962年出生的樸氏雖然沒有親身體驗過4.3屠殺事件,但是4.3處被刻印在島民心底的傷痛旁成長,80年代因憤怒的民主化運動挺身而出後,在作品中刻畫了遭受國家暴力蹂躪的故鄉島民的無聲吶喊。他說,將解放空間的希望變成絕望的屠殺的精神創傷並不只通過"道歉"就能治癒。4.3不僅僅是單純的悲劇,它定義爲濟州民衆反對朝鮮分裂的正義抗爭,甚至是追究持續至今的"分裂"的責任。那就是恢復死者名譽,而彼時他們的「頭顱」將重新抬起。

爲了無助的死者

那麼沖繩戰死者的名譽恢復又是什麼呢?在75年前的悲劇發生後,島民對他們成為國家戰爭機器感到遺憾。但戰後的《美日安保條約》的主要內容,沖繩被賦予提供美軍廣闊的軍事基地和勞動力。曾經在該島上激戰並殺死了島民的美國和日本一旦成為盟友,並在該島上維持軍事基地併計劃進一步擴張。和75年前一樣,沖繩一直扮演戰爭機器的角色。在這個現實中,摩文仁的死亡者能否安息?

雖然摩文仁已脫去了血肉的穢味被整修成為現代化空間,但是當你走出公園,穿越原始的森林和海岸時,總會聽到風中死者的悲傷。樸的作品將4.3的死者與沖繩戰的死者聯繫在一起,成為死者的祭壇。可以說,這是藝術可以實現的奇蹟。


Summons of the Wreaking Deads.

TOMIYAMA Kazumi

The islanders and the Japanese military in the Battle of Okinawa 1945

COVID-19. Now on a global scale, all human beings feels themselve on the verge of death. Have we ever experienced like this? Certainly, we know World War II, which resulted in numerous deaths, but the horror of the virus's spreading power is incomparable to the expansion of war front. We have no choice but to hide in our respective lairs to escape the gaze of the Grim Reaper. Until the Grim Reapers are fed up and pass by. 

I think about the spring when the battle was as rampant as a plague on Okinawa Island. In the final phase of World War II, at the end of March 1945, the United States carried out an invasion of Okinawa to say a requiem to the Japanese Empire, occupied the neighboring small islands, and on April 1, landed on Okinawa Island, which was home to Japanese troops. The islanders were taught that the U.S. military would capture and slaughter civilians and that women would be raped. That's what Japanese solders did in various places, including mainland China, where they invaded.

In a panic, the islanders decided to at least end their lives at the people’s hands of the  community, to kill each other. A picture of hell emerged, Some of the islanders chose to die en masse using hand grenades given to them by the Japanese military. The Japanese military's strategy was to prolong the fighting on Okinawa for as long as possible, even using civilians as shields, in order to defend the Japanese mainland. The islanders were loyal to the Japanese military, which had no intention of saving the lives of Okinawans. Okinawa - as it still is in 2020 - was nothing more than a sacrificial pawn for the security of Japan.

Until the same April 66 years ago, Okinawa was a country where the king of Ryukyu was crowned. It was in 1879 that Ryukyu was annexed to Japan as "Okinawa Prefecture". This annexation process took several years, during which many people fought at the risk of their lives by against the Japanese rule. They hoped for relief for the Qing, but the Japanese victory in the Sino-Japanese War dashed those hopes. Later, it didn't take 66 years for the islanders, who once boasted that the king of Ryukyu was more good-looking than the crown prince of Japan, to be transformed into the imperial people who did not fear death for the sake of Imperial Japan. 

What the islanders finally saw was the atrocities committed by beloved Royal Army: their “friends solders” to the islanders during the deteriorating war situation. The soldiers robbed the islanders of their food, drove them out under the fire of war for their own safety when they took refuge in caves, ordered them to kill babies when they cried, saying that the enemy would know where they hide. Sometimes they dismissed the islanders as spies and slaughtered them hysterically. The inferiority of the Japanese military was so great that after the war, an official of the Japanese government who came to the island to investigate the behavior of Japanese soldiers that he said, "Is this the end of the Imperial Army's formation?"

At the end of May 1945, Ushijhima, a commander who had fled to the southern tip of Okinawa Island. About three weeks later he committed suicide in Mabuni. Islanders who were driven south as they followed the commander, were attacked by the U.S. military onslaught and their dead bodies covered the scorched soil. It is said that the sea was dyed red by the blood of the islanders who jumped off the cliff. In 1944, Okinawa's population was 590,000 and the number of civilian deaths in the Battle of Okinawa is said to be 94,000. The total number of people killed in the Battle of Okinawa was more than 200,000, including Japanese and American troops. So many lives have been lost in just three months. What a horrible wound of history.

Okinawa and Jeju, encountering in Mabunin

Mabuni area is now developed as a peace memorial park, with a peace museum and a monument called "Cornerstone of Peace" carved in the names of the war dead. On June 23, the day of Ushishima's supposed death, a memorial service for the fallen has been held by Okinawa Prefecture, with attendance of dignitaries from the Japanese and U.S. governments. I heard that the Jeju 4.3 Peace Memorial Park was modeled after Okinawa's Peace Memorial Park, but in terms of artistic approach, 4.3 is far better. In Okinawa, the power of the arts in repose and healing is under-appreciated very much. As one of the challenges to this reality, the Peace Art Project was launched in 2015 to hold art exhibitions in the park and museums in June, the month of commemoration in Okinawa. The author's involvement in the project until 2019 led to an encounter with Jeju's 4.3 Arts in 2018, as I wrote in an earlier column.

The art works left Jeju to make their appearance in Mabuni were filled with a quiet enthusiasm in the corner of the exhibition room at the Peace Memorial Museum, each expressing of 5 artists in their own style their compassion for the people of Jeju who died untimely deaths and their desire to repose their souls. The most striking piece of the exhibition was Bak Kyoung-hoon's woodcut painting "Maditation正名 - 頭無人瞑想図面” . 10 people lined up to fill the width of sheet of Korean paper, their heads decapitated, their exposed necks crossed in a sinister red. The red corresponds to the red of the camellia held by the woman in the center, and thrusts into the eye of the viewer as a metaphor for disaster with the black silhouette of a raven resting its wings behind it. It was as if the dead were summoning the dead of the Battle of Okinawa, writhing and smelling the blood of Okinawans killed by Japanese and U.S. troops at this spot in Mabunin.

Born in 1962, Bak, of course, did not experience the time of the 4.3 massacre, but he grew up beside the deep wounds that 4.3 inflicted on the islanders' bodies and minds, and after he became involved in the furious pro-democracy movement of the 1980s, he came to engrave  the voiceless voices of the islanders in his homeland, which was abused by state violence in his artworks.  

He says that the trauma of the massacre that turned the hope of the liberation space into despair cannot be healed by an "apology" alone: instead of confining 4.3 to a mere tragedy, define it as the righteous struggle of the people of Jeju who expressed their opposition to the division of Korea, and then confront them with the responsibility for the ongoing "division. That is the restoration of the honor of the dead, and at that time these dead will regain their "heads".

For the unrelieved dead.

What, then, is the restoration of honor for those who died in the Battle of Okinawa? After the tragedy the islanders sincerely regretted that they had become the nation's war machine. However, what was given to the island after the war was its role as a cornerstone of the U.S.-Japan Security Treaty, providing the U.S. military with a vast military base and labor force. The U.S. and Japan, which once fought a fierce battle to the death on this island and slaughtered the islanders, are now allies in maintaining military bases on the island and planning further expansion, leaving Okinawa as much of a war machine as it was 75 years ago. In this reality, can the dead of Mabuni really rest in peace?

Mabuni has been set up in a modern space that has been deodorized by the defilement of blood and flesh, but when you leave the park and walk through the pristine thickets and beaches, you can't help but hear the vexed voices of the dead in the ever-blowing wind. Park's work connects the deads of 4.3 with those of the Battle of Okinawa, becoming an altar of the dead. It may be said that it is a miracle that art can achi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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