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정치권, 더 이상 ‘정의’ 거부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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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의 4.3피해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뜨면서 4.3특별법 개정안 처리와 4.3수형인 재심 절차를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올 2월에도 재판 일정만 기다리던 송석진 할아버지가 눈을 감았다. 문재인 대통령도 올해 4.3추념식에서 송 할아버지를 거론하면서 정치권 등을 향해 조속한 움직임을 촉구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호소는 절제됐지만 절절했다. 제72주년 4.3희생자 추념식에서다. 호소는 정치권을 향한 제주4.3특별법 개정안의 조속 처리 요청이었다. 4.3생존수형인과 4.3행불수형인에 대한 재심을 서둘러달라는 당부의 의미도 있었다. 고령의 당사자들에게는 촌급을 다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재임 중 두차례 추념식을 찾은 것에서도 절박함이 느껴졌다. 코로나19 때문에 참석자가 크게 줄어 식장은 한산했지만 문 대통령의 메시지는 묵직했다. 

문 대통령이 일일이 이름을 언급했듯이, 지난 1년여동안 생존수형인 네 분이 유명을 달리했다. 이중 세 분은 사실상 무죄에 해당하는 공소기각 결정이라도 받아봤지만, 한 분은 재판 일정만 기다리다가 94세를 일기로 올해 2월 일본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제주의소리>가 지난해 창간 15주년 특집으로 조명한 송석진 할아버지다. 취재차 일본에 찾아갔을 때, 치매 초기 임에도 힘겹게 기억의 파편을 하나둘 끄집어내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보다 기구한 운명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에게 제주는 고향이라기 보다 ‘두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공포스런 존재였다. 4.3 때 모든 것을 잃은 그는 쫓기듯 일본(도쿄)으로 터전을 옮겼다. 

일제강점기 제주에서 소학교 4학년까지 마친 그는 태평양전쟁에 강제징집됐다. 일본 패망 후 제주시에서 버스를 몰면서 가정을 꾸렸다. 부인과 2남1녀. 단란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집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먼 훗날 발굴된 수형인명부에 그의 죄목은 ‘내란죄’로 기재돼 있었다. 목포형무소에서 1년을 보낸 송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나자 곧바로 해병대로 자원 입대했다.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여했다. 5년여의 군 생활 후에도 그는 제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돌아갈 수 없었다. 광기어린 4.3의 악몽이 그를 고향과 떼어놓게 했다. 부산에서 뱃일을 하다가 일본으로 넘어갔다. 온갖 허드렛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새 가정도 꾸렸다. 

‘한국전쟁 참전 후 왜 귀향하지 않으셨느냐’는 질문에 할아버지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제주에는 4.3이 있으니까” 결국 할아버지는 눈을 감은 뒤에야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송 할아버지 뿐만이 아니다. 2~3차 재심청구자 대부분이 나이 백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도 2019년 1월17일 최초 공소기각 결정 이후 어떤 재판 일정도 잡히지 않고 있다. 

생존희생자는 물론 유족들도 시간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 불법 군사재판 무효화 등의 내용을 담은 4.3특별법 개정안이 3년 넘게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어서다. 애초 4.3특별법은 진상조사에 초점이 맞춰졌다. 당시 사회적 논의가 충분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다 보니 명예회복과 피해구제에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개정안 발의 배경이다. 유족들이 문턱이 닳도록 국회를 찾아 읍소했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20대 국회 폐원이 두 달도 남지않은 상황이어서 여야간에 극적인 합의가 없는한 자동폐기될 가능성이 높다. 

가관인 것은 정치권이 그동안 직무를 유기해놓고, 총선을 앞두고 네탓공방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문 대통령의 말마따나 부당하게 희생당한 국민에 대한 구제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는 본질적인 문제인데도 말이다. 

바야흐로 총선정국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정치권은 어김없이 말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미래통합당은 4.3의 완전해결을 제주지역 1호 공약으로 내걸었고, 더불어민주당은 20대 국회가 저물기 전에 개정안 처리 노력을 약속했다. 이번에도 총선 용 립서비스로 끝나선 곤란하다. 대통령도 신속 처리를 촉구하고 나선 마당에 국민의 시선은 정치권으로 쏠릴게 분명하다.

누구 책임이 더 큰지는 따지고 싶지 않다. 국민과 도민이 잘 판단하고 있으리라 본다.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순간 정치권도 면죄부를 받게될 것이다.  

문 대통령은 추도사에서 “너무 오래 지연된 정의는 거부된 정의”라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을 인용했다. 위대한 인권운동가 킹 목사는 또 “‘기다려라!’는 말은 대부분 ‘안돼!’라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맞다. 4.3피해자들은 너무 오래 기다렸다. 이들이 살아있는 동안 법적 구제를 받을 수 없다면 정의가 세워진들 그 의미는 반감될 수 밖에 없다. 지금도 늦었다. 정치권이 더 이상 정의를 거부하지 않길 바란다. <논설주간 /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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