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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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世通, 제주 읽기] 162. 프레드 사사키 돈셰어 엮음, '누가 시를 읽는가', 신해경 옮김, 봄날의 책, 2019.
프레드 사사키 돈셰어 엮음, '누가 시를 읽는가', 신해경 옮김, 봄날의 책, 2019. 출처=알라딘.
프레드 사사키 돈셰어 엮음, '누가 시를 읽는가', 신해경 옮김, 봄날의 책, 2019. 출처=알라딘.

1. 선거 이후의 삶

최인훈은 <광장>을 통해 ‘광장’과 ‘밀실’이 적절히 조화를 이룰 때 우리의 삶이 온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제 불과 며칠 후면 선거가 끝나고 ‘광장’을 메웠던 사람들은 다시 자기만의 ‘밀실’로 돌아갈 것이다. 그나마 신종코로나 때문에 거리는 예전처럼 소란스럽지 않았다. 게다가 선거 때면 늘 등장했던 ‘북풍’도 없었고, 정치인에 대한 심각한 ‘테러’도 없었으며, ‘공작’이라고 할 만한 것도 별로 없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유권자들은 집에서 정당의 공보물을 훑어볼 여유가 생겼다. 선거의 결과를 떠나서 물리력이 아닌 언어를 통해 상대방을 설득하고자 하는 전반적인 분위기가 확산된 것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발전한 증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거의 결과가 가져다 줄 흥분이 쉽사리 가라앉지는 않겠지만, ‘광장’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는 ‘밀실’로 돌아와 자신의 삶을 돌보아야 할 것이다. 정치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각자의 ‘밀실’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할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사적인 공간을 갖지 못한 개인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신념과 욕망을 간직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광장의 정치는 그러한 밀실 속에서 개인이 입고, 먹고, 자면서 왜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삶의 과정을 겪는지 생각할 시간적인 여유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신종코로나 사태는 그런 점에서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몇 가지 장면을 연출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이 소위 ‘뉴노멀(new normal)’의 하나로서 ‘아프면 쉬는 문화’를 권고한 것이다. 매우 당연한 이 말이 파장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생각했던 삶의 방식이 대단히 ‘노멀’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그 하찮은 개근상이라는 것을 받기 위해 아무리 열이 오르고 몸살이 와도 이를 악물고 학교에 출석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미련한 선생들과 학부모, 그리고 불쌍한 학생들의 시대였다. 문제는 오늘날이라고 해서 상황이 나아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프면 쉬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직장 소득 보전’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현실이다. 돈 때문에 아파도 일해야 한다는 것인데 아마도 돈이 사람보다 우선시되는 사회가 지속되는 한 일상의 ‘업노멀(abnormal)’은 계속될 것이다. 

예전에 내 수업의 한 학생이 스펙 쌓기 바쁜 시대에 소설이나 시를 읽는 것은 사치로 여겨진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아프면 쉬라’는 말과 학생의 말은 묘하게 공명하면서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전 세계에 퍼진 신종코로나는 많은 사람들의 밀실을 파괴할 것이다. 특히 생계를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해야 하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밀실을 더 많이 파괴할 것이다. 각국의 정부가 돈을 풀어도 돈이 사람보다 우선하는 시대에서 책읽기는 여전히 사치로 간주될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책을 읽는 것이 사치로 간주될수록 우리는 적극적으로 사치를 누리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돈이 우리의 위태로운 ‘밀실’을 파괴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스스로를 돌볼 방도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을 읽는 데는 돈이 별로 들지 않는다. 

2. 시를 읽는 삶

책을 읽다보면 우연치 않게 매우 반가운 글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누가 시를 읽는가>(프레드 사사키 돈셰어 엮음, 신해경 옮김, 봄날의 책, 2019)는 그야말로 우연히 접하게 된 책이다. 논문을 쓰기 위해 철학책이나 철학논문을 주로 읽거나 아니면 학생들의 독서모임에서 소설을 읽는 것이 전부인 필자에게 이 책을 읽게 해 준 사람은 사진 예술가이자 미학자인 황선영 박사이다. 그는 몇 해 전 홍대 미학과 대학원에서 내 수업에 참여해서 로티를 함께 읽었는데, 이 책에서 로티의 글을 발견해 내게 선물한 것이다. 

이 책은 'Poetry' 라는 잡지에서 연재된 50편의 글을 엮어 출간한 것이다. 사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이미 시는 일상을 살아가는 장삼이사의 영역에서 저 천상에 속하는 전문가들의 영역으로 올라가 버린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시는 대부분 교수-시인들이 생산하고 서로 비평하는 문화장르처럼 되었다. 그래서 시를 접하게 되면 마치 미술관에서 기괴하고 난해한 현대 미술작품을 만났을 때와 같은 곤혹스러움이 느껴진다. 과연 그 앞에서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는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시 전문 잡지인 Poetry는 시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지면을 따로 할당해서 그들이 시를 읽는 이유에 대해 쓰게 했다. 의사, 교수, 언론인, 정치인 등과 같은 비전문가들이 각자의 시선에서 시를 왜 읽는지, 시가 그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서술했다. 물론 필자 가운데에는 시인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로티가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쓴 짧은 에세이가 그 잡지에 실렸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 글도 읽은 것이었지만 그 글이 이 책 속에 포함되어 국내에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황박사가 아니었으면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다. 사실 로티의 마지막 에세이라고 할 ‘생명의 불’이라는 짧은 글은 로티 연구자로서 일생을 살아 온 내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로티는 철학계에서는 소위 철학 종언론자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전통적인 철학적 글쓰기를 전복시키고자 한 인물이다. 그에게 글쓰기는 ‘광장’의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밀실’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였다. 그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철학 논문을 쓰는 것의 의미를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마지막 에세이는 죽음에 직면한 위대한 노철학자의 겸손하고 소박한 삶에 대한 회고를 담고 있다. 췌장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온 아들과 사촌과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로티는 “직접 쓴 것도 읽었던 것도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주는 글은 없는 듯했다”(75쪽)고 말한다. 이 짧은 회고는 그가 쓴 글을 읽는 데서 특별한 의미를 찾아왔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매우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울림을 주는 것은 그가 생의 마지막에 소개하고 있는 짧은 시 구절이다.  

그 시는 랜더의 ‘그의 일흔 다섯 번째 생일에’에 있는 구절로서 영어로는 다음과 같다.

Nature I loved, and next to Nature, Art;
I warmed both hands before the fire of life,
It sinks, and I am ready to depart. 

이 시를 역자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내 첫 번째 사랑은 자연이며, 다음은 예술이라
생의 불꽃에 두 손 쬐다가
그 불꽃 가라앉으니 나, 떠날 채비를 마쳤어라

역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시의 번역은 원래의 시가 전해 주는 어떤 담담함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쉽다. 첫 번째라는 단어는 아마도 의역으로 보인다. ‘예술이라’와 ‘마쳤어라’는 아마도 art와 depart의 운율을 살리려고 했던 것 같다. 역자보다 더 잘 번역하기는 힘들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냥 산문처럼 직역을 해서 읽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식이다.

나는 자연을 사랑했고, 그 다음으로 예술을 사랑했다.
나는 생명의 불꽃 앞에서 두 손을 녹였다.
불꽃은 사그러들었고 이제 나는 떠날 준비가 되었다. 

이 시가 전하는 담담함은 죽음을 앞둔 노 철학자의 삶에 대한 태도를 전달해 준다. 로티는 자신이 더 많은 시간을 시와 보냈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말로 글을 마치고 있다. 그는 평생 뉴욕 타임즈의 정치컬럼을 통해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매우 독창적인 글쓰기를 통해 문학과 철학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업적을 남겼다. 그런 그가 더 많은 시간을 시와 함께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각자의 ‘밀실’을 지키고 가꾸는 일은 ‘광장’의 소통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선거는 그래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 광장은 ‘밀실’이 살아있을 때에만 작동할 수 있다. 돈의 무자비한 힘에 맞서서 밀실을 지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아마도 시를 읽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투표를 마쳤다면 이제 시를 읽을 시간이다.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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