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45) 휴일 오후 / 김윤미

묵은 것들 다 비워내는 휴일. ⓒ 김연미
묵은 것들 다 비워내는 휴일. ⓒ 김연미

햇살 자박자박 방으로 걸어 들어온다
텔레비전 안의 사람들 재잘거리며
빈 방을 휘돌고

할 일을 마친 청소기
여전히 바쁜 세탁기
오늘은 너무 평화로워
묵은 것들 다 비워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휴일

넣기만 했을 뿐
오래도록 비우지 않은 가방에서
낡은 메모지 뚝! 떨어진다
토사물 같은 취중의 말들
바닥과 허공으로 널뛰던 이야기들
흔들리던 볼펜 끝의 기억
담아두기만 했던
핏줄 드러나는 말, 말, 말들
하나 둘 후드륵 떨어진다

이제는 그저 빛바랜 종이를 닮은
스쳐간 인연들 사이사이
구겨져 있던 것들을 펼쳐 들어본다
실핏줄 촘촘히 박혀 시리기만 한 민낯
낡은 메모들 쓰레기통에 버리고
수많은 말들이 떠돌며 지나갈 여정을 가늠해본다

고인 둠벙 같은 나날
흩어져버린 발자국들이 지그시
심장을 밟고 지나가는 
휴일 오후  

-김윤미 <휴일 오후> 전문-

‘햇살이 자박자박 방으로 들어온다’ 오랜만에 창문을 열어 제치면 한라산 정상에 하얀 눈이 가득하다. 4월 중순. 목련도 피었다 지고, 벚꽃도 왔다 간지 오래, 들판에 유채꽃도 절정을 넘어섰는데 난데없이 내린 눈이 뜬금없기는 하다. 하지만 보기에 좋은 건 사실. 차가움과 따뜻함이 공존하기가 쉬운 게 아닐텐데...

모호해져 버린 계절의 경계선처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의심하는 시간이 벌써 몇 달째. 집안에 오랫동안 묵혀 있던 공기를 바꿔본다. 강제적 휴일이 계속되는 상태에서도 늘 그만큼의 희망은 남아 있는 것. 그 사이 전 세계가 주목하는 국회의원 선거도 보란 듯이 치러냈고, 코로나19도 많이 잠잠해져 가고 있다. 모두한테 감사하고, 모두가 다 대견스럽다. 

정상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내 속에 남아있던 ‘토사물 같은 말들’과 ‘널뛰던 이야기’들을 비워내야 한다. 너무나 비싼 수업료가 들었던 코로나19와 같은 시간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먼지 가득한 생각들을 닦아내야 한다.

지루한 휴일이 지나고 다시 시작하는 일상에서는 욕심이나 미련 같은 거 싹 다 사라진, 빈 시공간이었으면 좋겠다. 거기에 하나씩 채워갈 맑은 것들을 생각하며, 지금은 창문 활짝 열고 청소를 해야겠다.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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